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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기행(奇行)

by 파장 2015. 6. 29.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기행(奇行)


전쟁발발하자 일본으로 망명 검토

한국전쟁이 발발 했을때 이승만의 나이는 75세 였다. 그는 독재자답지 않게 겁에 질린 노인네 모습 그대로였다.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에 대한 어떠한 방송도 하지 않았고, 비상 국무회의도 소집하지 않고 간담회 비슷한 국무회의에서 제각기 임무를 다하라고 당부했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이 한국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망명정권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교토 오타니 대학의 정우종 박사는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 당시 일본 정부에 망명정권 설치를 요청했던 문서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내 공개했다. 문서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이 미 대사관과 일본 정부에 야마구치 현에 6만 명 규모의 망명 정권을 설치하는 방안을 타진했다고 기록돼 있다.


겁에질려 국민을 팽겨치고 도망치는 대통령

전쟁이 일어나자 공포에 질린 이승만은 저녁 늦게 찾아온 무초 주한 미군 대사에게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잡히는 것이 한국을 위해 좋은 못된다고 끈덕지게 주장했다. 무초는 우리가 그렇게 절망적인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라고 설득하며, 대통령과 정부가 떠나면 군대도 없어진다고 말하고 서울을 옮기는 것을 반대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 6월 26일, 전쟁과 관련해서 특별 조치를 취하지 않던 이승만은 심야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수원 천도를 결정한 국무위원들이나 심야 국회에서 수도 사수를 결의한 국회의원들에게도, 군 수뇌부에도 연락하지 않고 6월 27일 새벽 2~3시경 대기기켜놓은 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대전으로 돌아갔다.



국민에게 거짓말 방송하는 나쁜 대통령

이승만의 기행(奇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녹음해 그날 밤10시에서 12시사이에,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대통령도 서울을 따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지키겠다는 여러 차례 내보냈다. 전쟁 상황이 심각해지자 방송국 스스로 자정에 이런 거짓말 방송을 중단했다. 그리고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한강 인도교 폭파로 피란길도 막혔다. 어쩔 수 없이 ‘잔류파’가 된 서울 사람들은 얼마나 분개 했을까? 그런데 이승만은 대전이 7월 20일에야 함락 되었는데, 벌써 7월 1일 새벽 3시 대전을 떠나 목포를 거쳐 바다로 부산에 갔다. 6대 독자여서 그토록 비굴하게 묵숨을 아꼈을까?



1951년 6월 8일 피란민을 둘러보기 위해 거제도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내외



민간인 집단학살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대전에서 6월 28일,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한 이승만은 첫 번째 중요 조치로 긴급명령 제1호인 비상 사태 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을 6월 25일로 ‘소급’ 해 공포했다. 이 긴급명령 제1호는 사소한 잘못도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사형, 무기에 처하게 했고, 그것도 단심으로 처리하게 해 잘못 판결을 내리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증거 설명조차 생략할 수 있게한 악법 중의 악법으로 부역자들은 대부분 이 법에 의해 단죄를 받았다. 그와 함께 도처에서 군경에 의한 주민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학살이었다. 

국회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민간인 집단 학살과 관련해 6월 30일 이승만에게 사과 발표를 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승만은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라고 역정을 내며 일축했다. 그해 9월 국회는 비인간적 인권유린에 제동을 걸기 위해 ‘부역행위특별처리법’, 사형(私刑) 금지법’ 통과시켰으나 이승만이 거부하자 다시 통과 시켜 확정지었다. 국회는 이승만의 특별조치령에 대해서도 개정 법률안에 이어 폐지 법률안을 통과시켰으나 그때마다 이승만은 거부했다.


전쟁 극복보다 권력욕에 빠진 대통령

1951년에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으로 떠들썩했으나, 이승만은 외국에 알려지는 것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보다 못해 이시영 부통령이 항의 사임을 했다. 그런데 국회에서 이승만과 사이가 나쁜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해 이승만을 긴장시켰다. 

이승만의 권력욕은 그야말로 초인적이었다. 전쟁중에 부산에서 자유당이 급조 되었고, 백골단과 땃벌때가 국회를 협박하는가 하면, 국제공산당 사건 조작으로 반대파 국회의원 대부분이 대거 구속 수배되어, 5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이리저리 피해 다녔고 한다. 이승만은 전쟁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권력을 놓지 않기위해 조작, 음모 등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참고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서중석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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