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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제10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4. 30.




제10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바람이 세게 불때 살아 있는 나무는 태풍속에서 흔들리지만 하고 죽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살아 있는 나무래야 흔들리고 살아있는 것 이래야 부드럽다. 노자가 생각할때 자기 마음속에 하나의 기준을 같는 것, 전체 사회가 하나의 이념으로 묶이는 것은 뻣뻣해지는 일이다고 했다. 뻣뻣해지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같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은 ‘성공기억’ 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공의 기억이 자기를 뻣뻣하게 한다. 성공했을 때는 그 사람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부드러워 졌다는 것은 잘 적응 했다는 것이고, 한 번 성공하고 난 뒤에는 그 기억이 너무 강해서 성공기억 속으로 갇히게 된다. 갇히는 순간 뻣뻣해 지고, 뻣뻣해지는 이유는 자기가 스스로 개념의 구조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아있는 인간으로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말은 어느 단계에서 공부를 끊거나 줄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극기봉례

학(學),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있는 것을 습득하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들은 다 개념의 구조물로 되어 있다.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순간 나의 주체력이 없으면 뻣뻣해지기가 훨씬 쉬어진다. 공자의 사상을 하나의 주제로 묶으면 주자라는 대철학자는 그것을 ‘극기봉례(克己復禮)’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별적인 내가 집단화된 가치관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극기봉례(克己復禮)는 내가 보편적인 이념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禮)는 보편적 기준이고, 보편적 이념이다. 그 예(禮)는 ‘저기’에 있다. 기(己)는 학습 과정을 통해 올라가려고 하는 것으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유가(儒家)의 구도을 다른 말로 하면은 여기에 있는 내가 이상적으로 설정된 저곳으로 부단히 전진해가는 굉장히 엄숙한 노정(路程) 이다. 그래서 유가(儒家)의 기본 구도는 내가 우리가 되는 과정이다. 개별성이 집단성이 되는 것이고, 개별성이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노자는 이런 것들이 눈에는 거슬러 보였을 것이다. 노자가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자기 방식대로 해결해 나가는지 도덕경 12장을 통해서 알아보자.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한다.

[도덕경 12장]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

오색령인목맹, 오음령인이롱, 오미령인구상, 치빙전엽 영인심발광, 난득지화 영인행방

是以聖人 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시이성인 위복불위목, 고거피취차


五色令人目盲 오색영인목맹

五다섯오,色빛색, 令영령, 人사람인, 目눈목, 盲소경맹 

닷섯 가지로 구분된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유가(儒家)는 구분을 긍정한다. 본질을 긍정하는 세계관은 구분을 대체로 긍정한다. 본질이라는 말 자체가 동일성과 배타성을 같는다. 그래서 본질이라는 개념안에 구분이라는 기능이 이미 들어가 있다. 오색(五色)은 청, 황, 적, 백, 흑 다섯가지 색깔이다. 유가(儒家)에서는 기본적으로 색깔을 나누고 구분을 긍정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고대 왕조마다 색깔을 다르게 사용했다. 하나라는 검은색을 숭상했고  은나라는 하얀색을 숭상했고 주나라는 붉은색을 숭상했다. 이렇게 왕조마다 기준색을 지정 했었다.


색깔은 이 세계에 무한대로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색깔을 표현하고 세계에 색깔을 받아들일때 다섯가지 기준색을 가지고 받아들이다. 이 세계에 무한대로 있는 색깔중에서 닷가지만 골라내서 그 다섯가지 색깔들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 세계에 있는 색깔들과 관계하려고 한다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기준이 생겨서 무한대의 색깔 중에서  다섯가지 색깔만 보게 된다.


五音令人耳聾 오음영인이롱

五다섯오, 音소리음, 令영령, 人사람인, 耳귀이, 聾귀머거리롱

다섯가지 구분된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한다. 소리도 무한대로 있다. 소리의 종류가 무한대로 있는데 우리가 다섯가지 기본 소리(궁, 상, 각, 치, 우)를 정한 다음, 이 다섯가지 소리의 관계로만 무한대로 존재 하는 소리들과 관계를 한다고 하면, 귀가 안들리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五味令人口爽 오미령인구상

五다섯오, 味맛미, 令영령, 人사람인, 口입구, 爽시원할상

다섯 가지로 구분된 맛은 사람의 맛을 잃게 한다. 맛도 무한대로 존재한다. 거기서 다섯가지 맛을 정한 다음에 그 다섯가지로 맛으로만 맛을 느끼게 한다면 입맛이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치빙전엽  영인심발광

馳달릴치, 騁달릴빙, 田밭전, 獵사냥할엽 令영령, 人사람인, 心마음심, 發필발, 狂미칠광

말을 달리며 즐기는 사냥은 사람들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치빙(馳騁)은 말을 달리는 거, 전엽(田獵)은 사냥 하는것이다. 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발광하게 된다. 사냥은 기본적으로 목표를 쫓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이 중요 했을까? 하고 싶은 것이 중요 했을까? 좋은 것이 중요 했을까?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는데 좋은 것을 해야만 하는 이 사람은 발광을 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해야 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미치는 것이다. 자기가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엇박자 때문에 인생이 고달프고, 삶이 재미가 없다.


그런데 노자의 생각은 구분을 만들어 내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실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만들어내는 것 뿐이다는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 놓고, 이 및에 있는 개별적 자아들이 그렇게 주눅이 들고, 고통을 받아야 되겠느냐? 그러지 말자. 라는 것이다. 노자의 기획은 바람직한 것은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앤 다음에 각자가 바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해야하는 것을 없애고 하고싶은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해서 이루어진 나라가 부강하다는 것이다.


難得之貨 令人行妨  난득지화 영인행방

難어지러울난,得얻을득, 之갈지, 貨재화화 令영령, 人사람인, 行다닐행, 妨방해방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게 한다. ‘난득지화(難得之貨)’는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들의 행동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이다.’ 난득지화(難得之貨)는 비싼물건, 비싼것, 얻기 어려운것을 말한다. 이것은 원래부터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 기준과 보편적 이념이 어떤것이 귀하고, 어떤것은 귀하지 않는가를 만들어 내는게 것이다.


지금 주의에 주먹만한 다이아몬드와 고구마가 있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를 가질것이다. 그런데 배을 타고 가다가 잘못되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고, 옷이 헤지고 배가고파 죽겠을때는 고구마를 같으려고 할것이다. 어떤것이 귀하고 어떤것이 귀하지 않는지 분명하게 정해진 사회는 기준이 분명한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의 행동은 항상 어지럽다.


是以聖人 爲復不爲目  시이성인 위복불위목

是때시, 以써이, 聖성인성, 人사람인   爲할위, 復회복곡, 不아닐부, 爲할위, 目눈목 

그래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여기서 ‘본다’ 는 구분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본다면 다른 사람들은 안본다는 뜻이다.그래서 눈(目)은 구분하는 일을 한다. ‘눈을 위하지 않는다.’ 이말은 구분하는 행위를 좋아 하지 않고, 대신에 ‘배를 위한다.’ 고 했다. 이말은 먹을 때가 되면 사상과 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배가 고프다. ‘배’ 에 해당되는 것은 이떤 이념과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 성인은 ‘배’ 를 위하지 눈(目)을 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성인은 구분을 분명히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대신에 구분이 해소되는 단계로 진입해서 구분이 완전히 소멸하는 단계로 진입 한다는 것이다.  

 

故 去彼取此 고 거피취차

故옛고 去갈거, 彼저피, 取취할취, 此이차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거피취차(去彼取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예(禮)는 저것(바람직한 것)이고, 기(己)는(바라는 주체) 이것이다.  노자의 표현을 빌려서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표현 한다면 공자는 거치취피(去彼取此),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것을 취해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공자는 저쪽에 이상적인 단계를 걸어 놓고 ‘그쪽으로 가자’ 고 하고 노자는 역기서 부터 이상을 산출하자는 것이다. 주도권을 여기에다 두면은 노자고, 주도권을 저기다 두면은 공자가 된다.


3장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도덕경 38장]

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대장부처기후 불거기박

大큰대, 丈어른장, 夫사내부, 處곳처, 其그기, 厚후할후  不아니불, 居살거, 其그기, 薄엶을박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얄팍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 ’대장부는 두터음에 처하고 경박하게 처하지 않는다’ 는 말이다. 투더움이란? 내면의 중후함, 동력, 힘, 주체성 등을 두터움 이라고 하고, 경박한 것은 개념, 이념, 신념들이다.  이것들은 개념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경박한 것이다. 신념과 이념이 강한 사람들은 진리에 신념이 강하고 자기가 행동할 때 근거가 분명하기 때문에 행동이 경박하고 가볍다.  개념, 이론,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경박하고 과감하다. 이념을 떠난 내면의 주체력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대립면의 경계를 품은 사람들은 중후하다. 그래서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경박함에 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處其實 不居其華 처기실 불거기화

處곳처, 其그기, 實열매실, 不아니불, 居살거, 其그기, 華화려화

참된 모습에 처하지 꾸며진 곳에 거하지 않는다. 처기실(處其實), 실제에 처하지 꾸민곳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꾸며다는 것은 개념의 세계와  이름(名)이 화려하다는 것이다. 꾸며진 세계 화(華)에 처하지 않고  실제에 처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내면, 바탕, 지금여기, 현재에 처한다는 말이다.


故 去彼取此  고 거피취차

故옛고, 去거할거, 去저피, 取취할취, 此이차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저것이란 노자의 세계에서 볼 때 개념의 세계다. “실체하지 않는 비세계를 만들어 놓고 실제하는 세계를 관리하지 마라는 것이다. 변화하는 구체적인 실상과 현상 속에서 이념, 지식, 개념이 관계 되어야 한다.”라고 노자는 말한다.


노자는 우리와 나 중에서 ‘나’를 중시한다. 이념이 강한 사람은 이 세계를 볼때 이념을 기준으로해서 바라본다. 그런데 이제는 이념이 사라진 나만의 상태로 세계를 봐야 한다. 그렇게 하는 활동을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했다. 무엇인가 기준과 이념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유위(有爲)적 행동이다. 무위(無爲)는 팔장끼고 아무것도 안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기 머리속에 이미 선제된 이념과 가치관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일, 이것을 무위(無爲)라고 한다. 


[도덕경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爲할위, 學배울학, 日날일, 益더할익  爲할위, 道도도, 日날일, 損덜다손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논어의 첫 글자는 학(學)이고, 도덕경에 나오는 첫 글자는 도(道)이다. 우리가 ‘배운다’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모방한다.’ 뜻이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모델로해서 그것을 모방하는 일이다. 이것을 ‘배운다.’ 라고 한다. 


유학(儒學)은 기본적으로 성인(聖人)의 말씀을 쌓아가는 학문이다. 그래서 학(學)을 한다는 것은 날마다 무엇가를 더 하는 일이다. 그런데 노자의 도(道)는 그렇지 않고, 날마다 무엇가를 덜어내는 일이다. 여기서 ‘덜어낸다’ 는 의미는 자기가 같고 있던 것을 빼내는 것으로 더하기 빼기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이념, 지식, 개념 등을 점점 약화 시킨다는 것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것이나 이미 만들어진 것, 이미 정해진 것들로 나에게 들어왔던 있던 것을 그 양이 얼마가 되어든간에 그것이 가지고 있던 주도권을 약화 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 주도권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욕망, 표현력, 나의충동 등으로 채워서 역전 시켜야 한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損덜다손, 之갈지, 又거듭우,損덜다손  以써이, 至이를지, 於어조사어,無없을무, 爲할위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구나. 손지우손(損之又損), 줄이고 줄이면 무위(無爲)의 단계에 도달한다.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무위(無爲)를 행한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가치관과 신념으로 세계와 관계하지 않고, 이미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을 밞고서서 자기가 주인이 돼서 신념과 이념 없이 세계와 관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위(無爲)는 기준을 가지고 하지 않는 것으로 멋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멋대로 한다고 해도 정확할 정도의 내공은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이론을 가지고 문제를 접촉 하는것이 아니라 문제 안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무위(無爲)이다. 


우리는 흔히 노자 철학은 소극적 철학이고, 반문명론적 철학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도가(道家)철학은 사람들이 현실을 잊어버리고 생리적 무지 속에서 희희 낙낙하면서 함부로 산다고 한다. 그러나 도가(道家)철학은 함부로 사는 것과 다르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천하을 장악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도가(道家)사상을 흔히 무위(無爲)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 말이 맞을수도 있지만 여기서 분명한 한가지는 피해야 한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말하지 않았다.  


無爲而無不爲 무위지무불위

無없을무,爲할위,而어조사이,無없을무,不아 니불,爲할위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면 노자의 시선은 무위(無爲)보다 무불위(無不爲)에 집중된다. 이렇게 노자가 무위(無爲)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불위(無不爲)에 효과를 주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상을 철저하게 품은 사람이었다. 노자는 절대 초월적인 철학자가 아니었고, 이 세상을 초월하려 하는 꿈을 단 한번도 꿔보지 않았다.


取天下 常以無事  취천하 상이무사

取취할취,天하늘천,下아래하  常항상상, 以써이, 無없을무, 事일사

천하를 차지하려면 항상 무위적으로 일 처리해야 한다. 취천하(取天下), 천하를 차지하려면 항상 무사(無事)로써 한다. 이것은 보통 일거리는 만들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유사(有事)는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어떤 이념의 틀 안에서 일을 하는 것 이고, 개방적인 상태에서 자율성에 맞기는 것을 무사(無事)라고 한다.  그래서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특정한 틀 안에서 움직이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방성과 자율성 속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마음껏 활동하게 해줌으로서 천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及미칠급, 其그기, 有있을유, 事일사 不아닐부,足발족,以써이,取취할쥐天하는천,下아래하

그래서 일거리를 만들면 천하를 차지할 수가 없다. 급기유사(及其有事)만약에 어떤 틀을 정해 놓고 그 이념에 맞게만 일처리를 한다면, 부족이취천하(不足以取天下) 천하를 차지 하는데 족하지 않을 것이다. 노자는 이 문장으로 봤을때 무엇을 세상이 귀찮고 하찮아서 도피 했다고 볼 수 없다. 46장에서 중요한 것은 노자의 철학이 무위(無爲)자연의 철학이 아니라 무불위(無不爲) 자연의 철학임을 알게 해준다. 


보여지는 대로 보는 것이 무위다.

 [도덕경7장]

天長地久 천장지구

天하늘천, 長긴장, 地땅지, 久오래구

하늘이(천지가) 장구하다, 천지자연은 장구하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천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불자생

天하늘천,地땅지, 所바소, 以써이, 能능할능, 長긴장, 且또차, 久오래구, 者놈자, 以써이, 其그기, 不아닐부, 自스스로자, 生날생

천지 자연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가 소이(所以) 까닭, 이유, 장차구자(長且久者) 장(長)하고, 구(久)할 수 있는 까닭은? 천지가 장구(長久)할 수 있는 까닭은? 이기부자생(以其不自生) 자기를 부자생(不自生)한다. 여기서 부자생(不自生)이란 중국 고대 문법에서는 목적어가 대명사일 때 그 대명사가 동사와 부정사 사이로 옮겨온다. 그래서 여기서 자(自)는 목적어가 된다. 그래서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자기를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故能長生  고능장생

故옛고, 能능할능, 長긴장, 生날생

그러무로 장생할 수 있다. 지기를 살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자기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손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장구(長久)할 수 있다, 왜 자기를 손님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유무상생(有無相生)이기 때문이다.


是以 聖人後其身而身先  시이 성인후기이신선

是때시, 以써이 聖성인성,人사람인, 後뒤후, 其그기,身몸신,而어조사이, 身몸신, 先먼저선

성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앞서게 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를 뒤로 몰리치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이 앞서있다.


外其身而身存  외기신이신존

外바깥외, 其그기, 身몸신, 而어조사이, 身몸신, 存있을존

그 자신을 도외시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 도덕경 2장에 생이불유 공성이불거 (生而不有 功成而不居, 잘 살게 해주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위에 자리 잡지 않는다.) 란 구절이있다. 이것은 자기 공을 자기와 관련시켜서 계속 빛나게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해놓고도 그 공을 자기 공으로 만들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생이불유(生而不有 잘살게 해주고도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무엇인가를 자기가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자기 소유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어떤 조직을 만들어 놓고, 어떤 선한 일을 하는 단체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자기 그림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이 조직은 더 잘되고 빛이 나게된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권모술수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노자는 철저하게 세계의 존재론인 유무상생(有無相生)과 관련시켜 이야기한다. 


자기라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자기는 물러나야 된다. 이러면 도덕경의 내용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물러날때 너는 앞서게 된다. 어떤 단체에서 몇명이 모여 의사결정할 때 꼭 물어봐야되는 권위를 가진 한 사람이 생긴다. 그 권위를 가진 사람을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은 항상 자기 주장 보다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듣는 쪽이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듣기만 한다고 해서 계속 듣는 역활만 하는 것은 아니다. IQ 1억3천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그 사람의 내공이 발견이 되서 어느 순간에 리더가 되어 있는 것이다.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 앞에 이야기 했던 것과 조금 다르게 이야기 하면, 도덕경이 굉장히 소극적인 철학이라 한다. “자기기를 항상 뒤로 물려라! , 자기를 도외시(度外視)해라!” 이것만 가지고 소극적 철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다음 결과는 자기가 앞서 있게 된다. 자기가 오히려 보존된다.


대립면의 긴장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항상 몸과 마음에 탄성이 있다. 이 몸과 마음에 있는 탄성은 이념을 수용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타이밍을 포착하는데 사용하는데 사용된다. 이 세계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판단의 궁극적인 가치는 타이밍이 맞냐 안맞느냐에서 나온다. 내면에 만들어진 대립면의 긴장이 만든 탄성은 적절한 판단을 하게 한다. 노자에게 적절한 판단을 하는 탄성이 언제 나오는지 증명하라면 “니가 그렇게 해봐, 반드시 그렇게 될거야!”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항상 세상과 세계와 어깃장 나는데서 끊긴다. 그런데 세상과 세계가 어깃장 날 때 세상에 맞추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사태(事態)가 생겼을때, 새로운 정책 결정할 때 혁신에 성공하는 나라의 결정은 항상 새로 전개될 프레임에 맞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런데 혁신에 실폐한 나라들은 항상 이미 있는 프레임을 가지고 미례를 설계한다. 세계는 변한다. 세계는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의 행동은 변화하는 세계와 함께 함께해야 한다. 도가(道家)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지말자! 보고 싶은대로 보지 마라! 세계가 보여지는 대로 봐라!”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는 것이 무위(無爲)다.


성공과 실폐는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하면 보이는 대로 보는 사람이 항상 보고 싶은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을 인긴다. 왜? 세계가 가는 방향에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위(無爲)가 말한 엄중한 의미이다.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비이기무사사 고능성기사

非아닐비, 以써이, 其그기, 無없을무, 私개인사, 邪간사사 故옛고,能능할능, 成이룰성, 其그기, 私개인사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버린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능히 그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1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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