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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제11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4.



제11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내가 요즘 노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에 공자를 좋아하거나 유가(儒家)의 사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노자는 좋게 말하고 공자는 나쁘게만 이야기 하냐고” 우스개 소리를 자주 듣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현대가 흘러가는 방향을 볼때 공자의 사상보다 노자의 사상이 좀 더 효과적이고 긍정적인 역활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철학도 이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은 없다. 이 세계의 주도권은 이론에 있지 않고 세계 자체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가 어떤 형태로 움직이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감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떤 이론과 믿음체계을 같고 있는가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  보고,  내가 어떤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가 가 더 중요하다.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단계 무위(無爲)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비교 하는 이유는 세계의 움직이는 모습이 노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좀 더 효과가 있을거 같아서 하는것 이다. 공자와 노자는 같은 시대를 마주했다. 그래서 사유(思惟)대상과 역사의 흐름, 시대의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했다. 다만 해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공자는 세계를 관리하는 방식을 인간의 근본적인 정서인 내면성과 인간성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공통 이념으로 이 세계를 운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들어 놓은 보편적 이념이라는 것이 인간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선(善)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가 인간성에 바탕을 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선(善)하다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선(善)이든 악(惡)이든 관계없이 그것이 보편적 이념으로 요구되는 한 그것은 기준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기준은 권력으로 행사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기준이 권력으로 행사되서 사회가 권력에 의해서 구분되고, 배제되고, 억압되는 불편한 운영이 있을수 밖에 없다. 라고 한다.


 노자가 볼 때 유학(儒學)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가치론에 빠질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가치의 실연자로 남으면 세계와 어깃장이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세계와 관계할 때 자기 내면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가치론을 할 수 있는한 최대한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자의 전략은 인간의 내면성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가치론의 체계를 최대한 무력화 시키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을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했다. 무위(無爲)와 반대되는 말은 유위(有爲)다.  유위(有爲)어떤 근거를 가지고 세계와 관계하는 것이다.


노자가 생각할 때 이 세계를 보고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노자는 이것을 무위(無爲)의 힘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이 무위(無爲)의 능력을 지키면 당신은 되지 않는 일이 없고, 당신이 제후(帝侯)라면 천하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은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이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업(業)’이 쌓이는 과정이다. 인간이 지식과 경험으로 축적되어 만들어진 기억들을 지울수 있을까?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지식과 경험이 기억에 지배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지식 같은 태도을 극단적으로 두 개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지식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과 하나는 지식을 다루고 이용하는 것이다. 노자 식으로 하면은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식을 지배 한다는 것은 이론을 밞고 서는 것이다. 지식보다 자기의 자발성을 들어내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세계를 봐야 하는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범위가 다만 넓어진 것 뿐이다.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단계를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했다. 


신뢰와 믿음의 정치

공자와 노자는 정치 철학자의 냄새가 강하다. 중국의 철학은 장자(莊子)를 제외 하고는 대개 정치 철학자의 냄새가 배여있다. 중국의 사유(思惟)가 항상 현실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냄새가 있다. 무위(無爲)의 실천이란? 것은 도덕경 안에서 통치 방식과 관련이 있고, 무위(無爲)의 방식을 통치에 적용될때 그것이 어떻게 운영되고, 보였는지 볼 수 있다. 무위(無爲) 전개되는 단계에 따라서 도덕경 17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도덕경 17장]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其貴言 
태상 하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외지 기차모지 신부족언 유불신언 유혜기귀언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太上 下知有之 태상 하지유지

太클태, 上윗상  下아래하, 知알지, 有있을유, 之갈지

통치자 중에서 최고 수준의 통치자, 가장 훌룡한 통치자의 레벨은 ‘하지유지(下知有之)’ 아래에서 볼 때 있다는 것 만 아는 단계이다. 제일 높은단계에는 있는 줄만 알지 통치자가 백성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느낌이 없는 상태.


其次 親而譽之  기차 친이예지

其그기, 次차례차  親친할친, 而어조사어, 譽기릴예, 之갈지

그다음 단계에는 통치자를 굉장히 좋게 생각하고 떠받드는 단계.


其次畏之  기차외지

其그기, 次차례차, 畏겁낼외, 之갈지

그다음 단계로는 통치자를 무서워 한다.


其次侮之  기차모지

其그기, 次차례차, 侮없신여길모, 之갈지

그 다음으로 아래에 백성들이 통치자를 놀려 먹는다. 이제 아래에서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단계를 넘어 조롱하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부족언 유불신언

信믿을신, 不아닐부, 足다리족, 焉어찌언  有있을유, 不아니부, 信믿을신, 焉어찌언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으면, 배성들에게 신뢰가 부족하면, 유불신언(有不信焉)배성들은 통치자를 믿지 않는다.



국가 주도권을 민간의 자률성으로

통치자가 백성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어떤 방식의 이념으로 다스리겠다는 기준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기준에서 백성을 바라보게 되어 백성들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불신이 있을수 밖에 없다. 백성들을 믿지 않으면, 믿지 않은 상태에서 정책이 만들어 지고, 백성들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정책은 백성의 꿈과 관계없는 정책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백성들은 통치자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위에서 백성들을 믿지 않으면 백성들이 통치자를 믿지 않게 된다.

     

悠兮 其貴言 유혜 기귀언

悠멀유, 兮어조혜 其그기, 貴귀할귀, 言말씀언

말을 아끼면 말이 귀하게 여긴다. 도가(道家) 사상가들에게 말(言)이란? 가치를 담애내는 개념들이다.  귀언(貴言)은 이념체계를 약화 시킨다.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功공로공, 成이룰성, 事일사, 遂이룰수  百일백백, 成이룰성, 皆모두개, 謂이를위, 我나아, 自스스로자, 然그럴연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마무리가 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나는 원래부터 이랬어” 라고 하는구나.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가 되었어도 백성들은 ‘통치자가 이렇게 잘살게 해주었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잘해서 잘 됐어’ 라고 생각한다. 라는 말이다. 속좁은 통치자는 아마 ‘내가 잘살게 해주었는데 저것들이 은공도 모르고 ’ 라고 하겠지만 이런 속좁은 통치자는 그런 백성들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도가(道家)의 핵심은 주도권을 정부가 같지 말고 민간의 자율성에 맡겨라. 집단이 주도권을 잡지 말고 개별자가 주도권을 잡게 해라, 그런 개발자가 주도권을 같고 만든 집단이 강하다는 것이다. 민간의 자율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국가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 강한 힘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위(無爲)가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된다.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

무위(無爲)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반응들이 있고, 이런 반응을 크게 세가지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헛소리 하고 있네’ 라는 냉소적인 반응이고, 두번째 반응은 ‘맞는거 같기도 하고, 맞지않 은거 같기도 고’ 조금 긍정적인 반응이다. 마지막 세번째 반응은 믿고 묵묵히 따르는 완전 긍정적인 반응이다.


[도덕경 41장]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상사문도 근이행지, 중사문도 약존약망, 하사문도 대소지, 불소 부족이위도, 고건언유지 명도약매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免成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대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 대방무우, 대기면성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始且善成  

대음희성, 대상무형, 도은무명 부유도 선시차선성

上士聞道 勤而行之  상사문도 근이행지

 上윗상, 士선비사, 聞들을문, 道길도  勤부지런할근, 而어조사이, 行나닐행, 之갈지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인(上士)은 노자의 무의의 도(道)를 들으면 근이행지(勤而行之) 근면하게 그것을 실천한다.


中士聞道 若存若亡  중사문도 약존약망

 上윗상, 士선비사, 聞들을문, 道길도  若같을약, 存있을존, 若같을약, 亡망할망

중간 수준의 학자가 도(道)를 들으면 ‘약존약망(若存若亡)’ 반신반의 한다.


 下士聞道 大笑之 하사문도 대소지

 上윗상, 士선비사, 聞들을문, 道길도  大큰대, 笑웃을소, 之갈지

가장 낮은 수준의 선비는 도(道)를 들으면 크게 비웃어 버린다.


不笑 不足以爲道 불소 부족이위도

不아니불, 笑웃을소 不아니부, 足다리족, 爲할위, 道길도

하사(下士)가 도(道)를 듣고 비웃지 않으면 그것은 도(道)가 아니다.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고건언유지  명도약매

故고향고, 建세울건, 言말씀언, 有있을유, 之갈지  明밝을명, 道길도,若같을약, 昧어둘매

그래서 건언유지(建言有之)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명도약매(明道若昧) 밝은 길은 어둑한 듯하다.


進道若退 夷道若纇  진도약퇴  이도약뢰

進나갈진, 道길도, 若같을약, 退퇴근퇴  夷오랑캐이道길도, 若같을약, 纇한쪽에치우치다 뢰

전전하는 길은 몰러서는것 같으며,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다.


上德若谷 大白若辱  상덕약곡 대백약욕

上윗상, 德큰덕, 若같을약, 谷계곡곡  大큰대, 白흰백, 若같을약, 辱욕되게할 욕

아주높은 수준의 덕(德)은 계곡과 같고, 진짜 결백한 상태는 약간 치욕스럽게 보이는 듯하다.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덕약부족 건덕약투

廣넓을광, 德큰덕, 若같을약, 不아니부, 足다리족  建세울건, 德큰덕, 若같을약, 偸훔칠투

정말 넓은 덕은 부족한 듯 하며,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하다.


質眞若渝  질진약투

質바탕질. 眞참진, 若같을약, 渝달라질투

정말 참된 것은 변질된 듯하다.


여기까지 노자 사상이 실천속에서 잘 나타난 모습이다. 자기입으로 착하다고 하고, 참함을 계속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착함이 자기의 기준이 되고, 권력이 되서 그 착함으로 많은 폭력으로 행사 되거나 많은 판단에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명도(明道), 밝은 길은 항상 어두운것 같을때 진정한 밝은 길이다. 나아가는 길이 나아가기만 한다면 계속 나갈수가 없다. 진정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약간 물러서는 것이다. 진정으로 건실한 사람은 게으른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건덕약투(建德若偸) 진실한 덕은 약간 게으른듯 하다.’ 노자는 여기서 반대되는 것을 공존시키고 있다. 어떤 한가지 아름다운 덕목도 그 배후에 어두운 면과 함께 공존해 가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 노자는 대립면의 공존을 계속 강조하는가? 대립면의 공존을 강조해야 어떤 하나의 보편적 이념이 차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립면의 공존 속에서는 특정한 하나의 가치가 우월적 지위를 가질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대립면의 공존을 무위(無爲)을 실천하는 존재론적 기반으로 항상 강조하고 있다. 그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한다.


大方無隅 大器免成  대방무우 대기면성

大큰대,方모방,無없을무,隅기슭우 大큰대, 器그릇기, 免면할면, 成이룰성

정말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고, 정말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기만성(大器晩成)’ 큰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라고 알고 있는데, 이 문장의 출처는 도덕경이다. 그런데 이 ‘대기만성(大器晩成)’은 도덕경 전체 문장과 맥락이 맞지 않는다. 노자의 도덕경중 제일 오래된 문헌은 전국 중기에서 말기에 쓰여진 ‘죽간본(竹簡本)’이고, 그 다음은 전국 중기에서 한나라초기에 쓰여진 ’백서본(帛書本)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보는 도덕경은 중국 삼국시대에 쓰여진 왕필본(王弼本)이 있다. 


죽간본(竹簡本)에는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 쓰여있고, 백서본(帛書本)에는 대기면성(大器免成)으로 쓰여져 있다. 이것을 왕필이 만(晩)으로 잘못 쓴 것 같다. 왕필의 대기만성(大器晩成)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는 말로 조금 늦게 출세하는 사람들을 위로 하기 위해 쓰여진 말 같다. 대기(大器)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빨이 출세하는 사람도 있고, 늦게 출세하는 사람도 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 진다.’ 가 아니라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大音希聲, 大象無形  대음희성, 대상무형

大큰대, 音소리음, 希바랄희, 聲소리성  大큰대,象코키리상, 無없을무, 形형상형

정말 위대한 소리는 특정한 음가(音價)로 제한되지 않고, 정말 큰 형상은 특정한 형태가 없다. 여기서 우(隅), 성(成), 성(聲), 형(形)은 모두 특정한 모양 같은 것을 표현할 때 쓰이는 글자다. 


‘대방무우(大方無隅)’ 정말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다.

‘대음희성(大音希聲)’ 정말 큰 소리는 어떤 특정한 소리로 정해지지 않는다. 

‘대상무형(大象無形)’ 정말 큰 형상은 특정한 형태로 고정 되지 않는다.


일관되게 말해야 된다. 진짜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 아니라 대기면성(大器免成)이 옳은 것이다.


道隱無名 도은무명

道길도, 隱숨길은, 無없을무, 名이름명

도(道)는 이름속에 이름이 없는 것에 숨어있다. 이름이 없는 곳에 숨어 있다는것은 개념화 되지 않는다. 정의 내려지지 않는다. 개념화 된다는 것은 특정한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道)라는 것은 이 세계가 흘러가는 모습이란 것은 특정한 개념으로 정의 되지 않는다.


夫唯道 善始且善成  부유도 선시차선성

夫사내부, 唯오직유, 道길도, 善착할선,始처음시, 且또차, 善착할선, 成이룰성

오직 도(道)를 근거로 해야만 잘 시작하고 잘 이룰수 있다. 도를 근거로 해야만 된다. 당신이 크게 이루고 싶으면 도를 근거로 해라. 도를 근거로 한다는 것은 이 세계가 대립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라.


대립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다고 철저히 인식한 사람은 특정한 이념과 개념에 이론에 지식에 노예가 되지 않고 자기의 자발적 통찰력으로 세계와 관계할 수 있다.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볼수 있는 사람은 세계를 봐야 하는대로 보는 사람을 이길 수 있다. 이것이 무위(無爲)를 실천해서 얻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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