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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제12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6.


12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무의(無爲)란? 보편적 이념이나 가치를 벗어나서 그것을 밞고 일어서는 자아의 활동성을 말한다. 노자나 장자의 사상은 집단적인 규제나 보편적인 이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무관심 하거나, 개인주의적이거나 좀 더 심한 표현으로 세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성이 부족해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만 관심이있는 사람들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적 책임자가 될 수 있었는가?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사회에 적용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을수 있다.


양주의 위아주의(爲我主義)

양주(楊朱 BC395?~BC335) 라는 철학자는 ‘위아주의(爲我主義)’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위아주의(爲我主義)란? 고대 중국식 표현으로 ‘이기주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이란 표현과 비슷하다. 이 말은 맹자가 양주를 비판 하면서 ‘위아(爲我)란 표현으로 처음 사용했다. 맹자는 양주가 “위아(爲我)를 채택했다.”라고 하면서 맹자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편에서 양주을 비판한다. 


[맹자 진심장구상편]

孟子曰 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맹자왈 양자취위아 발일모이리천하 불위야

“양주는 자기몸에 있는 털 한 올을 뽑아서 세상이 평화로워 지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 자라고 말을 해도 맞는 말이다. 그러면서 양주을 비판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楊氏爲我 是無君也

양씨위아 시무군야

“양주가 말하는 위아설(爲我說)에는 ‘무군야(無君也), 군주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비판 한다. 군주가 없기 때문이란 말은 군주가 주도권을 가지는 체계가 없다는 표현이다. 양주는 ‘위아주의(爲我主義)’를 주장할 때는 항상 털 한올과 천하를 대비시켜 이야기 했다. 열자(列子)라는 책 양주편에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열자 양주]

人人有損一毫 人人不利天下 天下治矣 

인인유손일호 인인부리천하 천하치의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 몸에 있는 털 한올을 뽑으려 하지 않고, 사람마다 모두 천하를 이롭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 천하가 다스려 진다.” 사람들이 모두 위하기 때문에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양주의 설명에 금자라는 사람이 질문을 한다.


금자 :  당신이 털 한 올을 뽑으면 천하가 이롭게 된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됩니까?

양자 :  …(어이없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때 양주의 제자 맹손야가 나서 양자에게 묻는다.

맹손 :  스승님 “털 한올이 진짜 털 한 올이 아니지요?”

양자 :  맞다. 털 한 올로 어떻게 천하를 이롭게 하겠느냐.

맹손 : 털 한 올이란 것은 사람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까?

양자 : 그래, 그렇다.

  

여기에서 털 한 올이 상징하는 것은 자신의 몸, 신체를 이야기 하고 있다. 양주가 털 한 올을 신체와 천하로 대비 시킨것으로 짐작이된다. 양주는 신체는 만질수 있고, 천하는 개념을 갖고 있어 신체와 천하를 대비 시켰다. 양주가 생각할 때 천하라는 것은 구체적인 실제 존재물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의 구조물이고, 이념을 실현 시키는 하나의 조직이었다. 그런데 신체는 이념의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주는 개념에는 실제가 없고, 개념에는 실제가 없다. 개념은 조작된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주장을 했다.


윤리적 책임자가 되자

통치(統治)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현실을 세계로 반영해야 된다. 그런데 정치라는 것이 천하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이념을 반영시켜 실현하려고 한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실제와 이념의 괴리가 정치 혼란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념이 실제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 실제가 이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 실제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정치 현실에서 가장 큰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도덕경 12장]

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

貴귀할귀以써이身몸신爲할위天하늘천下아래하, 若같을약可옳을가奇기이기天하늘천下아래하, 愛사랑애 以써이 身몸신 爲할위 天하늘천 下아래하, 若같을약可옳을가託부탁탁天하늘천下아래하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고,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아낀다면 천하를 맡길 수가 있다.” 노자는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천하를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어떠한가? 이 한몸 불살라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치겠다는 정치인, 보기 어렵다. 노자는 천하를 위한다는 사람은 구체적 실제로부터 유기(有機)된 사람이라고 보았다.  천하는 개념의 구조물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을수 없다고 말한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함석헌선생의 사상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 우리나라는 서양에서 들어온 철학에 대해 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함선헌(1901~1989)선생과 같은 사상가를 철학자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주저한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의 사상은 서양 철학의 논리와 구조가 조금 다를수 도 있지만 한국적 토양에서 우리가 이런 독특한 사상가를 같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함석헌(咸錫憲 1901~1989)

기독교 문필가, 민중운동가 1985년 두 차례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우리나라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학생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학생운동의 영웅을 만들어 냈고, 그 영웅들이 구체적인 현실정치에 수혈되었다. 학생운동을 통해서 정권을 바꾸고, 정권의 안정에 영향까지 주었다. 이렇게 정권을 흔들 정도의 큰 영향을 줄 때 학생들은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했다.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한국 사회에 도덕과 정의의 양이 증가했을까? 그런 학생들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많이 진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혁명은 완수되지 못했다. 함석헌 선생은 이런 문제에 대해 혁명가들이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자기는 혁명되지 않고, 혁명이라는 이념을 강하게 실천한 것 뿐이다. 여기에 이런 물음을 던질수 있다. 당신은 혁명을 했는가? 아니면 혁명이라는 학습된 이념을 실천했는가?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자기가 혁명되지 않는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고 봤다.


우리가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 놓을수 있지만 집안에서 민주화를 이룬다는 것은 어려운일이다. 또 가난한 나라에 가서 굳은 일 마다하지 않고 한달, 두달 봉사할 수 는 있지만 자기 부모님이 대소변 하루 이틀 받아 내기는 어려운일이다. 영웅은 일상에서 좌절하고 실폐한다. 그러나 거대한 것에서는 성공을 이룬다. 거대한 것은 이념의 구조물이기 때문에 성공한다. 인간의 인격과 동력이 발동하는 곳은 구체적인 일상에서 나타난다.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는 책도 한 열권 쓸수는 있지만 가정안에서 자유와 평화는 힘들다. 우리는 모든것을 착각하고 있다. 자유와 평화같은 큰 이념들은 바로 자기의 삶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양주나 노자의 ‘위아주의(爲我主義)’ 라는 것은 진정한 덕성, 힘, 자유, 활동, 몸에 있다는 것이다. 보편셰계에 있는 것이 허구라는 것을 인지 해라는 것이다.


자기를 관리하고 보는 사람이 진짜 힘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천하를 가질 자격이있고, 자기를 천하 만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천하를 맡을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관리하는데 실폐한 사람에게는 절대 천하를 맡길수 없다. 그래서 윤리적 행위자가 중요한 것이다. 보편적인 이념, 가치체계로 삶을 지배하려고 하지 마라. 삶은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자기의 몸 안에 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은 천하와 대립 되거나, 천하를 초월하려고 속세를 떠나는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천하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고, 이 세계를 진정한 행복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력에 집중해서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자기들로 구성된 사회가 행복 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국 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한다거나, 가족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한다고 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삶을 영위할 때 한국 사회가 위해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한국 사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깨는 자기의 욕망이 거세되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이 거세(去勢) 되면 자기의 독립적인 충동이 발생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창의적일 수도 없다. 자신에게 집중해서 윤리에 책임자가 될 때 비로서 윤리적인 사회를 말들 수 있다.


자기 윤리에 책임자가 되었을때 뇌물을 거부할 수 있다. 자기가 자기가 아니고 어느 당의 책임자나, 파벌의 책임자라면 자기가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당이나, 파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뇌물을 거부할 수 없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것이 취약한 사회에서는 자기가 윤리적 책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부폐가 만연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가 뇌물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많은 사회 규정들이 윤리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주인일 때 비로서 자기의 존엄성에 대하여 진정으로 가치있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윤리에 능동적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도가의 이상적 사회

노자는 집단이 만든 이념으로 개인을 통합하면 사회가 약해지고, 자발적 개인들이 집단을 만드는 것이 더 강한 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Top-Down 방식이 아니라 Down-Top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및에서 부터 힘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및에서 부터 나오는 정치 환경은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지는가? 그것을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고 표현했다. 정치환경을 작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도덕경 80장]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소국과민, 사유십백지기이불용, 사민중사이불원사 수유주여, 무소승지, 수유갑병, 무소진지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사인부결승이용지,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낙기속 인국상망, 계견지성상문, 민지노사불상왕내 

小國寡民 소국과민

小작을소, 國나라국, 寡적을과, 民백성민

“나라를 작게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하라.” 이 말은 중앙집권관료체제가 아니라 지방분권체계로 나라의 단위를 작게 하라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철기가 발명되고 산업에 투입되면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이분 구도가 깨지면서 혼란이 시작됬다. 나리의 형태는 나라 규모가 작고, 갯수가 많은 상태에서 규모는 크고 개수는 적은 상태로 이동한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 안정기에 접어 들었을 때가 전국칠웅(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툰 7대 강국)이고, 이것이 마지막으로 하나로 작아졌을 때가 진시왕의 통일이다. 그래서 나라의 규모를 크게할 것인가, 작게할 것인가 하는 것이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였다.


使有什佰之器而不用 사유십백지기이불용

使부릴사,有있을유, 什열사람습, 佰백인백, 之갈지, 器그릇기, 而어조사이, 不아니불, 用쓸용

“쓸모있는 많은 물건들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게하고”


使民重死而不遠徙 사민중사이불원사

使부릴사,民백성민, 重무게중, 死죽을사, 而어조사이, 不아니불, 遠멀원, 徙옮길사

“백성이 죽음을 중히 생각하여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이념성이 강하거나 보편적 이념에 매몰되면 매몰 될수록 생, 사를 가볍게 여긴다. 그래서 노자는 보편적 이념으로 생, 사를 가벼이 여기는 사회 스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바라 봤고, 생과 사를 중히 여기는 사회 시스템으로 가자고 했다. 생과 사를 중히 여기는 것은 자신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수유주여 무소승지 수유갑병 무소진지

雖비록수有있을유舟배주輿수레여, 無없을무所바소乘탈승之갈지, 雖비록수有있을유甲첫째갑兵군사병,  無없을무所바소陣줄진之갈지

“배와 수레가 있더라도 탈 일이 없고, 군대가 있어도 펼칠 일이 없게해라”


使人復結繩而用之 사인부결승이용지

使부릴사,人사람인, 復회복부,結맺을결, 繩줄승, 而어조사이, 用쓸용, 之갈지

“백성들로 하여금 결승문자를 회복해서 사용하게 해라.” 결승문자(結繩文字)는 새끼줄을 꼬아 매듭을 지어 사용했던 중국의 고대문자로, 글자문자가 사용되기 이전까지 사용 되었다. 결승문자는 새기줄을 묶을때  사람의 감정, 상황등에 의해 모양이 각각 달라서 표준화 되지 못했고, 대신 글자문자가 표준화 되었다. 중국이 거대국가 체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표준화와 보편화로 가는 문제가 큰 이슈 였다. 표준화와 보편화로 간다는 것은 이념화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결승문자(結繩文字)로 회복해서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甘其食, 美其服 감기식, 미기복

甘달감, 其그기, 食먹을식  美예쁠미, 其그기, 服옷복

“그 음식을 맛있어 하고, 그 옷을 곱다고 여겨라”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하고, 입고 있는 옷이 예쁘다고 여겨라, 는 말이다. 우리가 손님을 접대할 때 된장찌게로 접대하는 것보다 고급 레스토랑가서 와인까지 곁드려야 접대를 잘 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밖으로 퍼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간판중에 한글 간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외국어 간판들이 즐비하다. 자기들이 써놓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간판을 지어 놓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이름은 원래 자기 꿈과 이상이 들어간다. 자기가 없고 비정상이다.


우리의 꿈과 이상은 멀리 있고, 우리의 기준은 밖에 있다. 한국은 아직까지도 독립된 기준으로 자기를 볼 수 없다. 그것은 거리에 나가 보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것이 문제라는 것도 모르는 단계로 퇴화한 것이다. 이게 사는 꼴인가? 자기 삶의 양식이 자기로 부터 나오지 않는 삶,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 자기로 부터 나오지 않는 삶, 자기 나라 운영하는 방식이 자기로 부터 나오지 않는 삶, 이게 정상일까?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니가 먹는 것이 맛있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입맛이 없을때는 다른 것도 먹어라.”


미기복(美其服), 너의 복장을 아름답게 생각해라. 우리의 것을 찾이면서 옛날 조선시대에 옷만 입는게 우리것이 아니다. 우리의 것에 집중해서 입었을때 우리 것이 진화한다. 우리 것에 집중하지 못하니까 진화할 토양 자체가 없는 것이다.


安其居 樂其俗 안기거 낙시속

安편안안, 其그기, 居살거  樂음악낙, 其그기, 俗풍속속

“그 거처를 편안해 하고, 그 풍속을 기꺼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이 있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외국 여행이다. 안동에 한 번 안가 보고 외국 여행을 먼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 여행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좋은것, 이상적인 것, 기준은 다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도 더 좋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데 왜 우리 나름대로 기준을 만들고,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가?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인국상망, 계견지성상문, 민지노사불상왕내 

隣이웃인,國나라국,相서로상,望바랄망  鷄닭계,犬개견,之갈지,聲소리성,相서로상,聞들을문  民백성민,老늙을노,死죽을사,往갈왕,來올래

“옆 나라끼리 서로 바라다보고 개 짖는 소리나 닭 우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이 말은 ‘문을 걸어 닫고 자기들끼리 살아라.’ 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느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것에 먼저 집중하라는 말이다.


천하보다 나를, 천하보다 우리나라를, 보편 문화보다 내 문화를, 내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 보편 문화다. 너의 윤리에서 나오는 것이 보편 윤리다. 니가 만든 가치가 보편 가치다는 것이다. 이미 너의 앞에 펼쳐저 있는 보편가치, 보편윤리는 이미 다 이념이다. 그것은 폭력이다.


노자는 계속 강조 하고 있다. 자기 잔신에게 집중하자. 자기로 돌아가자. 자기의 신체를 중시하게 생각하라. 그것은 다만 보편적 이념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명사 고유명사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로 존재하고 있다. 자기 신분이 노출되어 있어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점잖다. 그런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익명성 뒤에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도시에는 폭력이 많고, 염치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골에서 자기는 고유명사로 존재 하고 있고, 도시에서는 일반명사로 존재한다.


노자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주장하는 이유는 사람이 익명적 존재, 일반명사의 일부로 존재하지 말고, 고유명사로서 존재하게 하라, 고유한 자기로 존재하는 존재감를 같도록 만들어라. 익명성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보편적 이념속에 존재한는 인간은 자신이 고유한 자기만의 고유한 존재라는 의식을 갇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신이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을 같을 수 있는 상태로 정치적 조건을 만들어 주어라. 물론 사회 발전 단계, 조건에 따라서 어느 단계에서는 집단적 이념을 그 집단이 공통적으로 수행해야 성취를 하는 단계도 있다.


지금 현대는 모든 개별적 존재들이 자신의 자발적 자존감을 회복하지 않으면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같지 못하는 단계로 이미 진입했다는 했다. 어른들이 젊은 사람들을 비판 할 때 ‘집도 없은 것이 차 부터 산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차가 없는데 집을 사나?’ 라고 생각한다. 차가 더 중요한 사람과 집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서로 생각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집도 없는 것이 차를 산다고 하는 세상에서, 차도 없는데 집을 산다고 하는 세상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모두다 자신의 독립적 개별성을 확보 할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조직을 크게 운영하지 않고, 쪼개서 작게 운영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현대인들은 거대한 조직의 일부로 일을 하면 자신이 삶의 영위하고 있다는 자존감을 같지 못한다. 그래서 작은 조직속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삶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느낄수가 있다. 


지금 현대인에게 맞는 조직은 작은 조직이다. 그래야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구성원들이 작은 조직속에서 비로서 자기를 익명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고유명사로 생각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 고유명사 속에서 자율적 행복을 누리는 존재로 만들어 내자. 이것이 노자의 ‘꿈’ 이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때 우리는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 인가? 아니면 자기 꿈의 실현자 인가? 우리가 바람직함을 수행하면서 살아갈까? 아니면 자기가 바라는 것을 수행하면서 살아갈까? 자기는 보편적 존재인가? 아니면 유일한 존재인가? 


유일한 존재인 자신들은 적어도 자식들에게 만이라도 자신이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해 주어야 한다. 그것을 알게 해주면서 자신도 스스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유일한 존재이고, 나는 내 윤리에 윤리적 행위에 고유한 입법자이다. 내 윤리적 삶은 나로 부터 나온다. 내 삶의 원동력은 내가 작동 시킨다. 나는 일반명사로 살다가 죽지않고, 고유명사로 살다가 죽겠다.’ 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고유명사로 살다 죽을 결심을 한 사람들의 총합이 사회을 역동적이고 건강하게 만든다. 이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12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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