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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제13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8.



13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노자의 사상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운영이 되고, 적용이 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철학적으로 보면 노자로 시작해 법가(法家)로 마무리가 된다. 이 말은 진시황의 통일로 춘추전국시대가 종합이 된다는 것이다.


법가(法家)

춘추전국시대에 부국강병과 왕권 강화를 위해 엄정한 법치를 주장한 제자백가의 한 종류로 진시황의 통치사상이다.


진시황 천하통일과 사상의 통일


진시황이 통일을 할 때 법가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법가라는 사상은 도가(道家)쪽보다 유가(儒家)쪽에 더 가깝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편찬할 때 유명한 철학가나 정치가들을 열전(列傳)편에 담았다. 그래서  유명한 중국 철학자들을 알기 위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에 나온 사람인가, 나오지 안는 사람인가 본다. 나온 사람이라면 사기열전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를 보는 것이 도움을 준다. 우리가 노자를 공부할 때 먼저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본다. 당시 한(漢)나라 사람들은 노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를 먼저 봄으로써 노자로 천천히 들어갈 수 있다. 사마천은 노자를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이라는 책 안에 배치 했다. 노자한비열전은 ‘노자신안열전(老子申韓列傳)’ 이라고도 한다.


노자신안열전(老子申韓列傳)

도가(道家) 사상의 대표적인 노자와 장자, 법가(法家)사상의 대표자인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에 대한 기록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은 노자와 한비자를 기록한 것이고,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 노자, 장자, 신불해, 한비자 이 네 사람을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도가 사상의 대표자인 노자와 장자, 법가 사상의 대표자인 신불해, 한비자를 한 편에 묶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도가 사상과 법가 사상은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이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사마천 정도의 학식이 있는 사람만이 노자와 장자, 신불혜와 한비자 두 학파를 하나로 묶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마천의 모습이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마천이 당시 얼마나 당시 철학적 흐름에 정통해 있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역사 발전은 지방분권 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는 한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자와 노자는 최초의 철학자로써 인간을 신의 명령으로 부터 독립시키는 역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의 명령에서 독립시키는 사람들을 우리는 철학자라고 한다. 그래서 공자와 노자는 중국에서 최초의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공자와 노자가 철학을 시작하기 이전에 중국을 지배했던 세계관은 천명(天命)이었다. 그리고 공자와 노자가 세운 철학적 세계관은 도(道)의 질서관 이었다. 천명(天命)에서 도(道)로 이동한다, 하면은 천명(天命)이 가지고 있던 특징을 도(道)가 가지고 있던 새로운 특징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천명(天命)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징은 비위성, 임의성, 주관성이다. 그래서 새로운 도(道)의 질서는 비의성, 임의성, 주관성을 극복해서 투명성, 보편성, 객관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천명론을 극복해서 도의 질서를 건립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완수 한다는 점에서는 노자는 공자보다 훨씬 완벽하게 완수해 내고 있다. 도덕경 4장에서 공자는 道… 象帝之先(도…상제진선) 도는, 상제(하느님)보다 앞서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 안에서 하늘에 기도하는 일을 한다든가 하늘을 극복하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노자는 분명하게 “내가 말하는 도는 신(상제)을 완벽히 극복해서 상제보다 우선한 것이다.” 라고 주장 한다. 그래서 천명론을 극복한다는 점에서는 공자보다 노자가 더 잘 완수했다.


노자는 소극과민(小國寡民)를 주장한다. 이것은 지방분권형 이라는 것이다. 당시 국가 형태가 지방분권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서 주도권은 공자보다 노자에서 있었다. 그래서 사상계 흐름에서 정치적 영역에서 주도권은 여전히 노자가 가지고 있었다.


제(濟)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 제일 잘나가는 국가였다. 그런 제(濟)나라에서 쿠테타가 일어났다. 제나라는 원래 강씨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전상(田常)이라는 신하가 왕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쿠테타를 일으켰다.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통치권의 정당성 확보다. 그래서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연구소를 세웠다. 이 때 부터 잡학(雜學)이라는 생긴다. 모든 학문을 썩어서 하나로 통일해야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제나라에 직문이라는 성문이 있었다. 그 성문 밖에다 직학학궁(稷下學宮)을 세우고, 전국 각지에 있는 학자들을 전부 모아서 잘먹이고 재우면서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정치는 논하지 말고, 사상만 통일’ 하라는것 이었다. 그 때 사상의 흐름의 주도권은 노자 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  사상을 합치는 것이었다. 그 때 황로학(潢老學)이라는 학풍이 형성된다.


황로학(潢老學)

노자 사상을 기반으로 묵가, 명가, 명가, 법가 등의 사상을 흡수한 청정무위(淸淨無蔿)의 정치사상


이 때 직학학궁(稷下學宮)에서는 중국에 있는 많은 철학자들이 전부 모여서 사상을 종합 통일하려는 사상운동이 일어났을때 주류의 중심학문은 노자 사상 이었다. 직하학궁안에 책임자를 좨주(祭酒)라고 했는데 순자(荀子)가 세 차례 역임 하게된다. 


순자(荀子, BC 298?~238?)

중국 전국 시대 말기의 사상가로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세차례나 좨주(祭酒)를 지냈다.


순자(荀子)는 노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 두 명의 제자들 배출한다. 특히 한비자(韓非子)는 진시황의 도와서 통일을 이루고, 법가(法家)사상을 집대성 한다. 한비자(韓非子)에 의해 집대성된 법가사상은 진시황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고, 법가 사상을 근거로 해서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한비자(韓非子, BC 280?~BC 233)

법가(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정치 사상가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자기를 ‘시황(始皇)’ 이라고 했다. 이 말은 진나라의 최초의 황제라는 것인다. 진시황은 자신을 ‘왕’이나 ‘천자’라 하지 않고 ‘시황(始皇)이라고 했다. 진시황의 통일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중앙집권체제 이다. 진시황 통일 이전 까지는 천자와 제후사이에서 나라와 나라의 연합으로 되어 있었는데, 통일 이후에 진시황은 진나라 전체를 군과 현으로 나눈다음 하나의 행정 단위로 묶었다. 그래고 군과 현을 다스리는 말단관리들까지 진시황 자신이 직접 임명했다.


진시황은 통일 이전의 왕들은 권력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왕으로 보였고,  그래서 “나는 그 이전의 왕들과 다르다. 행정 말단의 관리들 까지 내가 임명하겠다. 그래서 내가 비로서 진정으로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용어를 쓰지 말고 시황 이라고 해라.” 그렇게 해서 진시황으로 불리게된다.


진시황의 대표적인 정책들로 분서갱위(焚書坑儒), 도량형(度量衡), 수레바퀴 축의크기, 글자, 화폐 등이 있다. 진시황 통일 전까지 중국은 지방분권체제로 각 나라들은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다스리고 있었다. 지방분권형으로 나라를 쪼개서 다스리고 있을 때는 자기 고유의 특색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레바퀴 축의 크기도 따로 있었고, 문자도 따로 있었고, 이데올로기도 각 나라마다 따로 있었다.


진시황은 통일이후 학자들의 정치 비판을 막기위해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儒生)들을 생매장 시키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실시한다. 그리고 나서 하나의 법가(法家) 사상으로 통일시킨다. 진시황의 중앙집권체제는 통일 이전 귀족 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진시황의 몰락과 한나라 건국


노자 사상에서 법가사상까지 이어지는 맥락이 순자(荀子)를 통해서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로 이어졌다. 철학의 흐름과 완성의 측면에서 봤을때 법가의 뿌리는 노자 였다. 그래서 노자와 한비자를 하나의 편으로 묶을수 있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전체 사상에서 중국인들이 해결해야될 가장 큰 문제는 천명론(天命論)을 극복하고 어떻게 도(道)의 질서를 확보 하는가 였다. 도(道)의 질서를 어떻게 투명한 질서, 보편적 질서, 객관적 질서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시대 문제 의식을 일관되게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고, 역사를 진행해 나가서 최종 결론은 천명의 극복이라는 노선에서 노자에서 순자를 거처 이사와 한비자에서 법(法)으로 귀결 되는것 이었다. 법(法)으로 귀결 되었다는 것은 중국 사람들이 철학을 시작한 다음에 해결해야될 문제를 붙잡고 늘어져서 만들어낸 최정 귀결이었다. 그 최종 귀결은 중국 사람들에게 법(法)이었고, 그 법(法)은 가장 투명한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 역사적 사명을 진시황이 통일을 통해서 완성 시켰다. 그 완성의 과정속에서 개혁을 진행하였고, 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속에서 개혁의 힘이 분산되어 BC 206년 진(秦)나라는 멸망하게된다.


진나라가 왜 멸망 했을까? 모든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스템을 향해서 변화해야 되는데 이 변화의 과정속에서 개혁의 피로감이 개혁 동참자에게 먼저 가게 됬다. 모든 개혁의 실폐는 초기에 함께 참여했던 개혁 참여 참여자들이 개혁 과정속에서 나타나는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반하면서 생긴다. 


옛날 귀족 세력의 압박에서 벗어날까 싶어서 진시황에게 동참했던 농민들에게 피로감이 먼저 갔다. 이 때 진승(蔯勝)이라는 농민이 “왕우 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 라고 선언하고 농민 반란을 일으킨다. 그 농민반란으로 나라가 흔들렸을때 구 기득권 세력들이 함께 일아나게 되면서 진나라는 15년만에 몰락하게 된다.


진승(蔯勝)

진나라 말기의 농민 민란 지도자로 BC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을으켜 진(秦)나라의 멸망을 초래한다.


진나라 멸망 당시에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라는 두 영웅이 등장한다. 항우는 귀족 출신으로 기존의 이론이나 통치 이데올로기에 밝았고, 유방은 천민 출신으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유방(劉邦, BC247?~BC195)

한(漢)나라의 1대 황제로 진나라말 군사를 일으켜 진왕으로 부터 항복을 받는다.


유방은 나라의 형태를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움직이는가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전쟁에서 패하고, 항우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이 때 유방의 책사 장량(張良)이 제후세력을 배후에 두고 있는 장수들을 옛날 세력이다고 배척하지 말고, 포섭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유방은 ‘중국 천하를 제후국들과 함께 나눠 함께 한다.’ 라는 공천하(共天下)를 선포한다.


유방은 역사 발전 추세가 중앙집권체제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지방분권 세력들의 힘이 약화 되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지방분권 세력을 품고 가야 되겠다.’ 하는 현실적 선택을 한다. 유방이 공천하를 선언하고 나서 한신등과 같은 장수들이 및으로 들어왔고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   

유방은 통일을 이룬 후 역사 발전추세가 중앙집권관료형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방분권의 기득권 세력들의 힘을 품고 가지 않으면 않되겠다고는 생각으로 진나라의 군현제(郡縣制)와 다르게 군국제(郡國制)라는 새로운 통치체제를 만든다.


군국제(郡國制)는 주(周)나라의 봉국제(封國制)와 진(秦)나라의 군현제(郡縣制)를 병용하여 실시한 것으로, 수도에 가까운 지역은 군현을 두어 황제가 직접 다스리고, 먼 지역은 황족이나 공신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였다. 


유방은 통일후 정권의 안정을 위해 어쩔수 없이 군국제(郡國制)를 시행 하였지만, 중앙집권체제인 군현제(郡縣制)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정권이 안정된 후 지방분권 세력인 한신, 회남왕, 주발 등을 제거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방을 도와 통일을 이룬 장량은 신변의 위험 느끼고 홀연히 가족들과 함께 ‘장가개’로 숨어들어 자손들을 번창 시키면서 살아갔다.


한나라의 멸망과 도가와 유가통합


유방의 통일 직후 진시황의 과도한 개혁정책으로 중앙의 재정이 고갈 상태에 있었다. 그래선 약법삼장(約法三章) ‘살인자는 사형시키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벌한다.’ 라는 법률만 남겨두고 풀어준다. 이것을 청정무위(靑淨無爲)정책, 국가의 간섭을 줄이고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대 시키는 정책을 시행한다.


유방은 중앙 제정이 고갈되어 민간을 장악할 수 없게 되자,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시키는 ‘청정무의’ 정책을 시행하고,  전한의 7대 황제 한무제(漢武帝)때 까지 중앙의 안정적인 세수 확보를 위해 시행됐다. 


유방의 ‘청정무위’ 정책은 도가 사상의 정책으로 한나라 초기 민간에게 자율권을 주어 민간을 성장시키고 국가도 성장시켜 나갔다. 그러면서 민간과 국가사이에 힘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철과 소금의 전매권의 소유 문제로 갈등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무제때  국가의 힘이 커지면서 민간을 관리형을로 변경하게된다. 


한무제 이전까지  한나라는 도가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분권체제 였고, 한무제 이후 통치 이념이 유가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지방분권 세력은 힘이 약화되어 재야세력이 되었고, 유가 사상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 말엽에 사회적 변화에 의해서 유가 사상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역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재야에 숨에 있던 지방분권 세력이었던 도교도들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겨, 중앙집권체제의 유가 사상이 힘이 약해지고, 지방분권세력인 도교도들에 의해 한나라는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서 일어난 대표적인 영웅들로 유비, 조조, 손권 등이 등장하게 된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도교도들이 등장 할 때 유비은 도교도들을 이용하거나 제거 할려고 했지만, 손권은 무조건 제거 할려고 했다. 그러나 조조는 새로 등장한 도교도들을 정상적인 납세자와 군인으로 포섭 할려고 노력했고, 세 사람중에서 세력을 가장 강하게 키울수 있었다. 


조조는 지금은 유학이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새로 등장한 도교도 세력을 새로운 역사 발전 추세로 인정했다. 그래서 유방이 봉건제와 군현제로의 연합의 필요성을 느꼈듯이 새로 등장한 도교와 기존의 유학을 함께 연합해야 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위(魏)나라의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도가와 유가의 통합해 ‘위진현학(魏晉玄學)’ 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졌다. 위진현학은 위진 시대에 노자 사상을 중심으로 유가 이념과 조합하여 만든 사상으로 ‘자연’ 과 ‘명교(名敎)’를 회통하는 철학사상으로 왕필(王弼)에 의해 만들어졌다.   


노자 사상은 춘추전국시대에 주도권을 같고 있었으나 중앙집권체제의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노자 사상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순자가 노자 사상을 바탕으로 법가(法家)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민간의 자율성이 필요한 시기에는 통치 사상으로 등장 했다가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 약화되고 하면서 노자 사상은 춘추전시대부터 위진남북조시대 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통치 철학의 역활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중국 역사속에서 노자 사상은 반 이상의 역사 현실을 담당했다. 노자의 사상이 현실속에서 적용된다는 것은 주도권을 국가가 같지 않고 민간에게 주어서 민간의 자발성으로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민간의 자율성에서 기반하고 일어나는 자발적인 힘이 국가의 진정한 힘이 된다고 봤다.


[나의 생각] 그러나 민간에 주도권을 주는 것이 공공제의 성격이 강하고, 민간이 비도덕적, 비윤리적 이라면 이것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제도나 시스템이 완벽히 같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받게되고, 국가도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노자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유방와 항우 싸움에서, 항우는 제후국을 세우고 자기 머리속에 있는 통치 시스템을 적용할려고 했다. 그래서 항우는 세계를 봐야 하는대로 본 사람이었다. 유방은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이었다. 유비와 조조의 싸움에서도 유비는 유학의 이데올로기를 고집했다. 그래서 세계를 봐야 하는대로 바라본 사람이었다. 조조는 세계를 보여지는대로 보고 현실적 결정을 한 사람 이었다.


노자가 현대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세계를 봐야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 지는대로 보라고 한 것이다.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힘을 같으려면 우리속에서 자신을 융해 시켜버리면 않되고, 나의 독립적 자발성을 확보해야 한다. 집단속에서 자발적 생명력이 사라지도록 방치하면 않된다. 그 힘이 보여진느 대로 볼 수 있는 힘을 같게 만들수 있다.



<13강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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