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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제9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15.



제9강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최진석

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 대학교 졸업

북경대학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 철학박사  학위

하버드 객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장자철학’ 과 ‘노자신록’ 등이 있다.


노자 사상의 기본 구도는 이 세계가 대립 되는 것들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이 말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불렀다. 유무상생(有無相生)이란? 有와 無가 서로 살게 해준다는다는 것이다. 有와 無의 조합으로 이루워져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이 세계가 관계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도(道)라는 글자로 표시했고, 다른 은유적인 표현으로 일(一) 이라고 표시했다. 노자의 일(一)은 스텐레이스 젓가락 같은 일(一)이 아니고 새끼줄 같은 일(一)이다. 노자의 철학은 순결한 철학이 아니라 순결하지 않는 잡종철학 이다. 아주 맑고 청하한 철학이 아니라 탁한 철학이다. 노자의 철학은 유무상생(有無相生)원리, 有와 無의 조합으로 이루워져 있기 때문에 순종 철학이 아닌 잡종 철학이라고 한다.


[도덕경 39장]

昔之得一者 석지득일자

昔옛석,之갈지,得얻을득,一한일,者놈자

‘옛날에 하나를 얻어서 될 것들이 있다.’ 이 하나(一)는 네 글자로 풀어서 말하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다. 그 말은 옛날부터 대립면의 긴장 위에서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天得一以淸 천득일이청

天하늘천,得얻을득,一한일,以써이,淸맑을청

“하늘은 얻어서 맑다.” 하늘이 맑은 이유는 일(一)을 근거로 해서 하늘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 일(一)은 유무상생(有無相生)이다.


地得一以寧 지득일이영

地땅지,得얻을득,一한일,以써이,寧안녕영

“땅은 하나를 얻어서 안정된다.” 땅은 왜, 무너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렇게 땅에 있는가. 그것은 유무상생(有無相生)의 구조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대립면의 구조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도(道)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일(一)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神得一以靈 신득일이령

神귀신신,得얻을득,一한일,以써이,靈신령령

“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험하다.” 신은 일(一)을 얻어서 영험하다. 다시 말하면 대립면의 긴장위에 서 있기 때문에 신(神)은 신령스럽고 영험하다.


谷得一以盈 곡득일이영

谷계곡곡,得얻을득,一한일,以써이,盈찰영

“계곡은 하나를 얻어서 영험하다.” 계곡은 일(一)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채워질 수 있다. 계곡이 계곡인 이유는 일(一)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道)로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萬物得一以生 만물득일이생

萬일만만,物만물물,得얻을득,一한일,以써이,生날생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살아있다.” 만물이 왜, 어떻게 살아 있는가? 일(一)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 도(道)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 대립면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 우리 몸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있는 대립면의 긴장을 내가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


侯王得一以爲天下正 후왕득일이위천하정

侯제후후,王임금왕,得얻을득,一한일,以써이,爲할위,天하늘천,下아래하,正바를정

“통치자는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올바르게 한다.” 후황(侯王), 통치자는 일(一)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다.


其致之 기치지

其그기,致이를치,之갈지

“경계하는 의미로 그것을 더 설명해 보자.” 기치지(其致之),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더 설명해 보겠다.


天無以淸 將恐滅 천무이청 장공멸

天하늘천,無없을무,以써이,淸맑을청  將장차장,恐두려울공,滅멸망할멸

“하늘이 끊임없이 청명하기만 하려고 하면 장차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만일 하늘이 끊임없이 청(淸), 맑아 지려고만 하면, ‘장공멸(將恐裂)’ 장차 하늘은 파열되어 버릴 것이다.


地無已寧 將恐發 지무이영 장공발

地땅지,無없을무,已이미영,寧안녕영  將장차장,恐두려울공,發필발

“땅이 끊임없이 안정을 유지하려고만 하면 장차 쪼개질 것이다.”


神無已靈 將恐歇 신무이령 장공헐

神귀신신,無없을무,已이미영,靈신령령  將장차장,恐두려울공,歇쉴헐

“신이 끊임없이 영험하려고만 하면 장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신이 계속해서 영험 하려고 하거나 신령스럽게 하면은 장차 신은 믿음이 약해지고, 신통력이 고갈되어 버릴것이다. 


谷無已盈 將恐竭 곡무이영 장공갈

谷계곡곡,無없을무,已이미영,盈찰영  將장차장,恐두려울공,竭다할갈

“계곡이 끊임 없이 가득 채우려고만 들면 장차 사라질 것이다.” 계곡이 끊임 없이 가득 채우려고만 들면 장차 사라질것이다. 계곡이 끊임없이 텅빈 계곡은 채우는 것이 좋다고 해서 계속 채우기만 하면 종래는 말라버릴 것이다.


萬物無已生 將恐滅 만물무이생 장공멸

萬일만만,物만물물,無없을무,已이미영,生날생  將장차장,恐두려울공,滅멸망할명

“만물이 끊임 없이 살려고만 하면 장차 소멸(멸종)하게 될 것이다.”


侯王無已貴高 將恐蹶 후왕무이귀고 장공궐

侯제후후,王임금왕,無없을무,已이미영,貴귀할고,高높을고  將장차장,恐두려울공,蹶넘어질궐

“통치자는 끊임없이 고귀하고 높게만 행세하려 들면 장차 실각하게 될 것이다.” 통치자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다고 계속 자기를 고이하게 유지하려고 하면, 장차 물러나게 될 것이다. 이세계는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 대립면의 긴장을 무시하고 한쪽 방향으로만 나갈려고 하면 모든것이 다 잘못될 것이다. 최고 지위에 있는 통치자 마저도 자기가 높다고 해서 자기를 계속 고귀하게 유지 할려고 한다면 장차 통치자도 쫓겨날것이다.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고귀이천위본 고이하위기

故고향고,貴귀할귀,以써이,賤천할천,本근본본  高높을고,以써이,下아래하,爲할위,基터기

“그러므로 고귀함은 비천함을 뿌리로 하고 높음을 낮음을 기초로 한다.” 고(故), 그러므로 귀함은(고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하고 높은것은 밑의 기초를 근거로 한다.


是以後王自謂孤寡不穀 시이후왕자위고과불곡

是옳을시,以써이,侯제후후,王임금왕,自스스로자,謂이를위,孤고아고,寡적을과,不아니부,穀곡식곡

“통치자는 자신을 고, 과, 그리고 불곡 등으로 낮춰 부르는 것이다.” 시이(是以), 그래서 통치자는 스스로 자신을 일러 고인(孤人), 과인(寡人), 불곡인(不穀人) 으로 낮추어 부르는 것이다. 고(孤)는 부모가 없거나 늙어서 자식이 없어 외로운 사람을 ‘고’ 라고 했다. 과인(寡人)에서 과(寡)는 남편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 있고, 불곡(不穀)은 곡식이 번창하지 못한다. 라는 뜻이다. 


통치자가 항상 자기를 낮추는 말로 부르는 것은 나의 고귀함이 낮은것, 천한것을 기초로해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항상 자각 한다는 의미가 있고, 통치자는 이 세상에 있는 죄를 자기가 다 대신 지는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가 자기의 개인적 도덕적 명문과 이익을 위해서 ‘나는 그것을 못하겠다.’ 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자기 이외의 모든 백성들을 살릴려고 하다보면, 가끔 비도덕적인 전쟁과 어떤 행위(일)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통지자는 항상 자기를 낮은 말로 자기를 불렀다. 통치자는 통치를 잘하고 싶으면 이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반대되는 것들의 조합으로 이루워져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해라. 그런 철학적 인식만이 너의 고귀함 그것이 유지될 것이다. 통치가 잘 될 것이다. 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당신의 호칭부터 가장 낮은 단어로 부르자.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차비이천위본사? 비호

此이차,非아닐비,以써이,賤천할천,爲할위,本근본본,非아닐비,乎어조호

“이것이 비천함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此), 이것이 통치자가 이렇게 하는것이 천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호(非乎) 그렇지 않는가?


故致數譽無譽 고치수예무예

故고향고,致이를치,數셀수,譽기릴예,無없을무,譽기릴예

“그러므로 몇가지 명예를 지키려 하다가는 명예 자체가 없어져버린다.” 고(故), 그러므로 수예(數譽), 별것도 아닌 명예, 어느 정해진 시간에서 보면은 대단한 명예 같지만, 조금만 넓혀서 보면 별것도 아닌거다. 그러니까 몇 줌 되지도 않는 명예를 지킬려다가, 무예(無譽) 명예 자체를 잃어 버리게 된다.


不欲 琭琭如玉 珞珞如石 불욕 록록여옥 락락여석

不아니불,慾욕심욕,琭옥록,琭옥록,如같을여,玉구슬옥,珞구슬락,珞구슬락,如같을여,石돌석 

“옥 처럼 고귀해 지려고 하지 말고 돌처럼 소박하라.” 불욕(不欲), 하지마라! 록록여옥(琭琭如玉), 구슬처럼 옥처럼 빛나려 하지 마라. 락락여석(珞珞如石)돌처럼 소박하자. 돌처럼 소박하라는 이 말은 도가(道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광이불요(光而不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다. 광이불요란? 빛이 나지만 눈부시지 않는 것이다. 빛은 있지만 빛이 나지 않는 것이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은 자기 빛을 다른 흙먼지들과 함께 펼쳐서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돌처럼 소박하라 하는 것은 그냥 초라하게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소박함이  빛이난다는 것은 하나의 방향으로 무엇인가 드러 나고 있는 것이다.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대립면의 긴장을 자기 마음속에 품은 사람은 어떤 하나의 빛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돌 처럼 소박하다. 광이불요(光而不曜)하다. 빛이나되 눈부시지 않는다. 빛이 나되 그 빛이 다른 하찮은 먼지들과 조화를 이루어서 같아진다.


39장에서 우리는 이 세계가 대립면 긴장, 조합으로 이루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저 높은 곳에서 푸른 이유는 대립면의 긴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에 집을 짓고 오랜 시간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튼튼한 것은 이것이 대립면의 긴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이 튼튼하기만 할려고 한다면 결국 쪼개져 버릴 것이다.하늘이 맑아지려고 하면은 장차 쪼개져 버릴 것이다, ‘이 세계는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노자의 기본적인 존재론이다.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 일(一), 도(道) 이라고 하고, 일(一)은 새끼줄 처럼 꼬여있는 일이다. 이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고 마음 속으로 품은 사람을 옥 처럼 빛나지 않고 돌 처럼 소박하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 3장에서 사부지자불감위야(使夫智者不敢爲也)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과감하게 무엇인가를 못하게 해라. 똑똑한 사람들로 하여금 과감한 행동을 하기 어려운 시스템을 만들어라. 이런 말이다.


흔히들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야기할 때 ‘알면 바로 행하는 것’ 을 좋은 거라고 알고있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다 공통되는 하나의 것이 있다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자기 의견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지적인 토대가 좁고, 자기의 의견이 과감한 사람일수록 지적인 넓이가 좁다. 경계를 품은 사람은 과감하지 않고 진리라는 확신을 함부로 갇지 않는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것이다. 여기서 무식하다는  말은 대립 면을 함께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 흔히들 사랑은 서로 감정이 좋고,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사랑은 이별까지 포함해서 사랑이라고 하고 이것이 한 세트다. 물론 이것이 이별의 한 세트이기도 한다. 이별과 사랑을 개념으로 만들어 놓으면 사랑은 사랑대로 있고, 이별은 이별대로 있는것 같지만 세계의 진상(塵想)은 사랑과 이별이 한 세트이다. 


애완 동물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과도한 애정을 표현하게 되면 그 애완동물은 손을 타서 쉽게 죽게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랑은 사랑하지 않아서 깨진것이 아니라 사실은 너무 사랑해서 깨진다. 사랑이 사랑이려고만 하면 깨지는 것이다. 어떤 동작도 대립면의 긴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다 깨지게 된다.


[도덕경 3장]

使夫智者不敢爲也 사부지자불감위야

使부릴사,夫사내부,智지혜지,者놈자,不아니불,敢어찌감,爲할위,也이끼야

지(智)라는 글자는 보통 ‘지혜’ 라고 한다. ‘지식’ 할때 와 다른 조금 더 높은 깨달음이 있는 ‘앎’ 을 우리가 지혜라고 한다. 그런데 원래 저 글자는 고대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다. 이아(爾雅)책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으로 당시의 개념, 물건, 땅 등을 다양하게 설명하는 고대 사전이다.  그 사전에 단혈지인지(丹穴之人智), 구멍이 있는 사람을 지(智)라고 했다. 요즘 말로하면은 전문가라고 한다.


[爾雅 釋地 이아석지]

丹穴之人 知 단혈지인 지

丹붉은단,穴구멍혈,之갈지,人사람인,知알지

“구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 아는 사람이다.”


[爾雅 釋訓 이아석훈]

條條 秩秩 知也 조조 질질 지야 

條가지조,條가지조, 秩차례질,秩차례질,知알지,也이끼야 

“흐트러짐 없이 질서 정연하고 조리에 맞는 것이 잘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연하고 조리가 잘 갇추어 진 것을 지(知) 라고 했다. 그런데 노자는 지(智)적인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과감한 행동을 못하게 하라고 하고 있다. 왜냐면 노자가 볼 때 지(智)라는 것은 제한적인 ‘앎’ 이고, 구분해서 아는 ‘앎’ 이다. 구분해서 안다는 것을 노자는 도덕경 33장에서


[도덕경 3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 지인자지 자지자명

知알지,人사람인,者놈자,智지혜지  自스스로자,知알지,者놈자明밝을명

“타인을 아는 자는 잘 안다고 할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한다.”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을 지(知), 좁게 아는 거라 하고, ‘자지지명(自知者明명)’ 자기를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했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때는 개념이 작동된다. 그런데 자기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자기는 구체적인 느낌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 자기가 자기에게 구체적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기이다.


자기에 대한 앎은 실체적인 앎 이다. 그런데 타인을 아는 앎은 항상 관념, 이념,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그냥 좁게 아는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 아는 것을 노자는 지(知)라고 하지 않고 명(明)이라고 정의 했다. 


도가(道家)에서는 지(知)는 항상 부정한다. 그 대신에 명(明)의 단계로 가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명(明)은 해와 달로 이루어져 있다. 해(日)를 해로만 알고 있는 것은 지(智)라고 하고, 달(月)을 달로만 알고 있는 것도 지(智)라고 한다. 해와 달을 같이 알고 있는 것 을 명(明)이라고 한다.


사랑을 사랑으로만 아는 것은 지(智)다. 이별을 이별로만 아는것도 지(智)다. 사랑과 이별을 같이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한다. 사랑과 이별이 같이 있다는 것을 개념으로 만들수 없다. 모든 개념으로 만든 것들은 단일한 의미속에 같히게 된다. 그렇지만 이 세계는 단일한 의미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립면이 항상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개념화 하는데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道)를 말할 수 없다. 도(道)는 개념화할 수 없다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도(道)가 너무 초월적이어서 말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 세계는 대립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대립면의 공존 자체는 개념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립 면의 공존으로 이 세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대립면의 공존을 자기가 수용해야 되고 대립 면이 공존되는 이 긴장을 내면적으로 유지하고 정신을 그렇게 확고히 해야된다.


[논어 안연 顔淵]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번지문인 자왈 애인, 문지 자왈 지인

지(知)라는 개념은 논어의 안연편에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물어본다. “인(仁)이란 무엇 입니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知)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


[논어 마지막 장]

不知言 無以知人也 부지언 무이지인야

不아니부,知알지,言말씀언  無없을무,以써이,知알지,人사람인,也이끼야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 이 말은 개념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공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보편적인 행위 원칙은 예(禮)다. 예(禮)에 맞추어서 행위를 해야 인간이 인간으로서 계속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禮)라는 것은 습(習), 반복해서 훈련을 해야 된다. 예(禮)를 반복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타인과 내가 무엇으로 구분되는 지를 알아야 한다. 그 구분의 정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구분의 정도를 표시하는 말이 ‘개념’이다. 구분의 내용을 표시하는것이 ‘말’ 이다. 공자는 사람이 어느 좌표에 있는가를 표시한다. 삼춘은 삼춘으로 대하고 사춘은 사춘으로 대하는 것을 반복해 가면서 자기가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언(知言)이란? 구분된 어떤 상태를 개념화 해낸것으로 그것을 모르면 어떻게 해서도 사람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논어에서 지(知)라는 것은 관계되는 앎이 아니라 구분되는 앎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기본적으로 구분을 긍정한다. 촌수와 직책을 구분해야 된다. 그 구분된 상태에서 자기가 처한 위치가 자기가 살아가야 하는 평생의 좌표가 된다. 그 좌표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예(禮)를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이 성숙해 간다는 것이 유가(儒家)의 믿음이다. 그런데 노자는 그런 구분된 앎으로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보편적인 기준을 피할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항상 대립면의 긴장으로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 이것이 세계와 순조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기초다.


[도덕경 15장]

渙兮若氷之將釋 환혜약빙지장석

渙녹을환,兮어조혜,若같을약,氷얼음빙,之갈지,將장차장,釋풀석

“풀어지기는 봄날 얼음이 녹는 듯 하다.” 노자는 ‘봄날 얼음이 풀리듯이하라’ 했다. 봄날 개울가에서 얼음이 풀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물도 얼음도 아닌것이 그 경계가 모호하게 보인다. 경계가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하지 말고 경계가 모호한 것 자체가 세계의 실상이다. 경계에 서 있는 그 모호함을 분명함으로 바꿀려고 말고 경계가 모호한 긴장 상태를 그대로 품어라. 이것이 유무상생(有無相生)이기 때문에 ‘봄날 얼음이 풀리듯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세계가 대립면으로 되여 있는 연결점이다. 도가(道家)에서 제일 긍정덕인 글자는 현(玄)이다. 우리는 검을 ‘현’ 이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 감을 ‘현’이다. 검다는말이 아니라 ‘가물가물’ 하다는 뜻이다. 경계가 ‘가물가물’ 하다는 것은 대립 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덕경 15장]

儼兮其若客 엄혜기약객

儼공경할엄,兮어조혜,其그기,若같을약,客손님객

이 말은 “손님처럼 행위 하라”는 것이다.  왜 ‘손님처럼 행위하라’ 했는가? 본질주의적 세계관 속에서는 본질을 가진 것은 항상 그 본질을 기반으로 해서 자기가 주인이다. 그런데 대립면의 공존으로된 세계관속에서는 有와 無의 대립면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것도 주인이라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손님이라고 할 수 있다. 有는 無에 대해서 손님이고, 無는 有에 대해서 손님이다. 이런 것이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의미다.


내 키가 큰지, 작은지 아직은 모른다. 그런데 내 키를 손톱과 비교하면 내 키는 손톱과 비교했을때 비로서 커진다. 그런데 내가 마이클조던 옆에 서 있다고 하면 내 키는 비로서 작아진다. 내가 큰 이유도 손톱에 있고, 내가 작은 이유도 마이클조던에게 있다. 나는 키가 크다는 상황속에서도 손님이고 키가 작다는 상황속에서도 손님이다. 이 세계는 다 그렇게 되어 있다. 이런 대립 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는 이 상태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은 과감하지 않는다. 광신(狂信)하지 않는다.  대개 광신(狂信)은 협소한 믿음에서 온다.


[도덕경 3장]

使夫智者不敢爲也 사부지자불감위야

使부릴사,夫사내부,智지혜지,者놈자,不아니불,爲할위,也이끼야

이 말은 ‘사람을 광신(狂信)하게 하지 마라’ 는 말이다. 이 세계가 대립 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라. 그러면 그 사람은 진중해진다. 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진실이란 확신은 진실하지 않을수 있다는 배후에서 자기를 끌어 당기는 힘과 함께 작동하지 않으면 이 진실은 왕왕 광신(狂信)일 때가 있다. 자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진실이 아닐수 있다는 내공을 작동 시켜서 여기서 만들어 내는 긴장이 오히려 폭팔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게 진실의 힘이다는 것이다. 이 확신을 하지 않은 것은 내공이다. 쉽게 확신하지 않는 것은 내공이고. 대립 면의 긴장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것이다.


[도덕경 5장]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多많을다,言말씀언,數촘촘할삭,窮다할궁  不아니부,如같을여,守지킬수,中중간중

노자는 다언삭궁(多言數窮)이라고 했다. “말이 많으면 쉽게 궁색해진다.(한계에 봉착한다.) 그래서 중(中)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中)이란 것은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중간에 서 있는 것이다. 대립 면의 긴장위에 서 있는 칼날 위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란? 말이 많으면, 여기서 말이란? 개념이고 적게 말하는 것을 개념화 된것이다.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쉽게 한계에 봉착한다.

 

우리가 배움을 평생 동안 늦추면 않된다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우린는 가능한 늦춰여 한다. 배우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거나 배우는 것이 자기 DNA가 되버리면 평생 배우기만 하다가 죽게된다.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표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인생을 표현해도 되느냐? 표현하지 않아도 되느냐? 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은 세상에 태어났으면 무조건 자기 표현의 과정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과정들은 다 표현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면 표현하는 능력이 거세 되기쉽다. 그러니까 배울때도 항상 이것이 나의 표현을 위한 조그만한 수단이다고 생각해야 한다.


학생들이 죽어라고 배우는 과정을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기를 표현하려는 내적인 배짱이 점점 줄어든다. 자기를 표현하려는 내적인 충동이 점점 거세되고, 공부했던 내용으로 점점 채워지질수록 자기는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바보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남의 말을 쫓아다니며 듣고, 남의 글을 죽어라 읽는 것이 ‘자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고 착각하게 된다. 배움은 어느 순간에는 끊거나 줄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표현해야 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야수의 눈빛이 사라지고, 남에게 듣는 말이 많아 질수록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서 자기 눈에서는 짐승의 눈빛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던지 한쪽에는 긴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긴장은 ‘이것이 나를 표현하기 위한 한 수단이고, 이것이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이다.’ 이런 기본적인 자세를 노자는 자율(自律) “내가 나를 교육한다.” 라고 했다.


이념과 신념은 항상 한쪽이다. 대립 면의 긴장을 품지 못한다. 대립 면의 긴장을 받아 들어야 이념과 신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 때 드러난 자율적 주체는 무엇을 배우더라도 그것을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긴장을 잃지 않게 된다. 그래서 죽기전까지 내가 때어날때 짐승으로 태어났듯이 죽을때도 짐승의 눈빛으로 죽으리라, 야수의 눈빛을 한 순간도 잃지 않으리라는 하는 느낌을 같게 해야 된다.


<제9강 최진석 교수 현대 철학자 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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