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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제8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16.



제8강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최진석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 대학교 졸업

북경대학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 철학박사  학위

하버드 객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장자철학’ 과 ‘노자신록’ 등이 있다.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고 근대와 현대를 비교한 이유는 노자 철학의 특색이 무엇인가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노자처럼 다양한 해석 앞에 무방비 상태인 철학자도 드물것이다. 되도록이면 노자 철학이 어떤 맥락속에 있는가? 어떤 구조에 있는가? 을 분명히 드러내고 싶어서 BC 50만년 전부터 지금 까지 이야기했고, 동.서양을 장황하게 이야기 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동양 철학이란 신흥학문이다. 동양에서 동양학의 붐이 일어난 것은 사실 동양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시작했다. 이전에 ‘라이프이치나 헤겔’이 살던 당시에도 동양에 대한, 특히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서양과 너무 다른 신비스러운 이질적인 타자(他者)로써의 동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일어난 붐은 철저하게 서양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나 새로운 돌파구와 관련되서 지혜를 동양에서 찾아보자 하는 성격이 강해 졌기 때문에 라이프이치나 헤겔의 시대에 같였던 관심과는 질적으로 다르게 전개 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최근까지 자본주의라는 것이 상당히 합리적인 제도고, 합리성의 절정에 있다고 봤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자본주의 발달 여부로 한 사회의 합리성 성숙도을 판단 했다. 막스베버(Max Weber 1864~1920)라는 사회 학자는 “중국이나, 인도, 유대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 윤리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의 최고 척도인 자본주의를 잘 발달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상당히 합리적인 사회이고, 합리적인 철학을 갇고 있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을 위시한 아시아에 네 마리 용이 생겨났다. 아시아의 경제 발전이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상당히 생소하게 보였다. 어떻게 기독교 윤리가 없는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이렇게 빨리 나타나는가? 놀라게 되고, 단순히 자본주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에서는 이미 근대 철학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강해졌다. 철학적 한계에 이르렀다는 상황 속에서 그 사람들과 다른 철학을 가진 동양에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서양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실 서양 사람들 마음 속에는 어떤 새로운 경쟁 상대가 대도(大道)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서양이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던 기간은 길지 않다.  그런 길지 않는 기간을 잘 구과(舊窠)하고 있었는데 동양에서 갑자기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서양 사람들은 동양에 관심을 같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서양 사람들은 중점적으로 유교(儒敎)에 관심을 같게 된다. 서양 사람들에게 잡힌 유교의 시각은 상당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이질성을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유교철학 하고 서양의 모던니즘(modernism)이 굉장히 닮아 있었다. 동양에서 서양의 사유를 그대로 잘 수용하고 있지 못하듯이 서양에서도 동양에서 어떤 지적 자산이나 새로운 철학에 대한 인사이트(통찰력)을 얻으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철저하고, 정확한 인식은 상호 부족한 상태가 아닌가 생각했다.


지금까지 동양 사람들이 서양 배우기를 통해서 만들어낸 동양 철학의 새로운 구축의 모습은 아직까지는 대개 서양 철학은 그대로 이식하거나 서양 철학적인 시각으로 동양 철학을 해석한 것에 머물고 있는 단계다. 여기서 우리가 중국 철학을 공부할 때 중국 철학사 중에서 제일 잘된 책으로 보고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큰 학자, 풍우란(馮友蘭 1894~1990)의 철학사도 사실은 신실재론(新實在論)이라는 서양 철학의 모델을 적용한 요소가 굉장히 많다. 또 모종삼(牟宗三1909~1995)이라는 대만의 큰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칸트 철학을 기반으로 중국 철학으로 해석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만한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철학은 서양 철학의 한 조류를 받아서 그시각으로 중국 철학으로 해석한 요소가 굉장히 많았다. 이런 과정속에서 중국에 있는 중국만의 고유한 사상, 동양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적 사유의 특질, 이것이 오히려 발굴 되지 못하고 질식되고 있는 면이 있다.


공자와 노자의 철학

서양의 근대까지의 서양 철학의 주류는 본질을 근간으로한 실체관(實體觀)이고, 이 실체관의 확산은 이성을 통해서 확산된다. 서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사유의 구조물이다. 서양 사람들이 경험의 세계, 현상의 세계, 존재의 세계, 감각의 세계를 수준이 낮은 세계로 보는 이유는? 여기가 변하고, 운동하고,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한하고,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사유의 세계, 이성의 세계, 관념의 세계에 비해서는 수준이 낮다고 보는 것이다. 경험의 세계, 현상의 세계, 사유의 세계,이성의 세계, 관념이 세계에 비해서는 수준이 낮다고 보는 것이다.


경험, 현상 세계의 기본적인 특징은 변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현상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세계는 변한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유의 세계를 놓고 보면 이 변하는 것은 지배하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변하고 유한한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세계가 있는 것이다 하는 사유의 이 생각이 서양 사유의 기본적인 출발이다. 


공자와  노자는 철학을 구축하는 인사이트(통찰력)을 경험에서 만들어 냈다. 경험에서 만들었다는 것은 현상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경험한 것이 실제의 세계라고 바라봤다. 현상이 진실이다. 있는 것이 진실 이다. 도교(道敎)는 중국에서 탄생하고 발생한 종교다. 도교(道敎)는 다른 종교와 다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는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을 다 떠나야할 것 으로 본다. 이 세상은 항상 떠나야 할 될 것, 이 세상을 떠나서 진리가 있는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거의 모든 종교의 모습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죽고나면 건너는 것을 레테강을 건너는 거라고 한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단절, 초월이 있다. 그런데 도교(道敎)에는 현실 세계에 있는 제도가 천상의 세계에 그대로 있다. 그래서 도교(道敎)는 현실 세계가 옮겨가는 것이지, 현실 세계가 끊기고 현실 세계와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종교 구조라면 이 사람들이 살고 싶은 세상은 이 세상일 수 밖에 없다. 중국 사람들이 실용주의와 실리주의가 있는 이유이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저 세상이 좋은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이 좋은 세상, 진실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진실을 그대로 연장해 가는 것이 도교(道敎)의 모습이다. 이 연장은 기(氣)을 매게로 연장된다. 이것은 도교(道敎)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사유의 정점 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람들만의 종교에서도 현실은 끊겨야 될 것, 부정해야 될 것, 초월해야 될 것이 아니라 현실은 끌고 연장해야 것으로 남는다. 이 사람들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바로 이 세계가 진실이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진실하다고 보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공자와 노자에게서 그 사람들이 구축한 사유의 원천, 철학의 원천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사유가 진실이 아니라, 경험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실제 현상에 있는 것이 진실이지, 개념이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구조속에서는 경험이 구조속에 있다. 실제 상황을 진실의 세계로 본다는 것은 변화를 긍정하는 것이다.


노자에게서 발굴해낸 것은 이 사람은 다른 중국 사람들과 똑같이 경험을 철학적 인사이트(통찰력)으로 삼았다. 이 경험을 인사이트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현상계, 여기가 진실의 세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양 철학에서 현대 철학을 이야기 했다. 서양 지성사회에서 현대를 이야기 할려면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 는 프로이드, 칼 마르크스, 니체을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니체의 철학을 알아야 한다. 이 세명의 서양 철학자는 완벽한 불안정한 운동을 긍정한다. 현대를 이렇게 열고 최근에 서양에서 태동하고 있는 철학이 있는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mism)이라고 한다. 모더니즘 다음의 철학을 말할때는 그 사람이 주장하는 텍스트 이론 이라고 하다. 텍스트는 텍스타일(Textile)의 줄임말로 ‘짜여있다. 조직되어 있다.’는 말이다.


최근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에서는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다 짜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짜여져 있다. 이런 말로 해석, 비교 하면, 마치 배(옷감)가 잘 짜여져 있듯이 짜여져 있다. 짜여져 있는 것 으로 본다면 이 세계를 어떤 근원적 토대위에서 보는 것 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본다는것 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이 세계를 본질주의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주의로 보는 것이다. 비본질 적으로 본다면 본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다.


이 세계는 관계로 되어 있다. 이걸 이해할 때는 양자 물리학을 염두해 두면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살던 당시에 이렇게 말 한 적이 있었다. “미래의 세대에 가장 잘 적응할 종교는 불교(佛敎)이다.” 아인슈타인이 왜 미래의 세대에 가장 잘 적응할 종교를 불교라 했을까? 불교가 지금까지 나와 있는 철학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관계론(關係論) 철학을 가지고 있다.


불교안의 용어로 “인연(因緣)” 이 세계는 인연으로 되어 있다. 관계로 되어 있다. 그러면 이 세계는 뿌리가 있는 것인가? 뿌리가 없는 것인가? 뿌리가 없다는 것 이다. 등기된 정식의 건물이 아니라 가건물 이라는 것이다. 관계성을 인정 한다는 것은 다 뿌리가 없는 것이고, 다 가건물이라는 것 이다. 이런 철학은 아버지 보다 어머니에 더 가깝게 된다. 관계론 철학이다, 뿌리가 없다. 비본질적이고, 가건물이라고 한다면 어머니에 가깝고, 여자에 가깝고, 물에 가깝다. 철학은 감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노자와 현대성이 연결되는 지점을 조금씩 좁힐수 있다.


노자의 도(道)는 관계다

이 세계를 관계론으로 본다는 것은 토대가 허물어 졌다는 것이다.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비로서 불보다 물을 긍정하고, 남자보다 여자를 긍정하고, 어버지보다 어머니를 긍정하고, 부성(父性)보다 모성(母性)을 긍정하게 된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파악과 어떤 윤리적 태도를 같는가, 그리고 윤리적 태도 까지 가는 이식론적 단계,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서 볼 수 있는 것, 이것이 철학적으로 읽는 것이다.


노자 안에서는 아버지보다 어머니, 채움보다 비움, 높은것 보다 낮은것, 불 보다는 물,  태양보다는 달, 부성(父性)보다는 모성(母性)이 긍정되고 있다. 노자의 도(道)는 관계다. 실체론을 주장하면서 노자가 텅 빈것을 주장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을 주장 한다면 이것은 철학안에서 엇갈리게 된다.


노자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有.無 의 두 대립면의 관계로 되어 있다고 바라본다. 그것을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표현했다.  유무상생(有無相生)이란 도덕경 제2장에 나오는 구절로 有와 無가 서로 살게 해준다. 는 말이다. 有와 無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이 세계는 有, 無 의 상호의존 관계로 되어 있다는 이 말을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표현했다. 노자에서도 도(道)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현상은 유무상생(有無相生) 만 있는데 유무상생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이 세계는 말이야 ‘有’ 로 대표되는 한 계열과 ‘無’ 로 대표되는 한 계열, 이 두 대립면이 상호의존 관계로 이 세계가 이루워 져” 라고 이야기 하다가 그 다음 말 할때 또 그렇게 이야기 하고, 그러면 힘드니까 그냥 ‘道’ 라고 이름 붙여서 이야기 하자.” 그것이 바로 ‘道’ 라는 거다.


도덕경 25장에 유물혼성(有物混成)이란 구절이 있다. 有, 無 라는 것은 ‘어떤 것이 있다.’ 이고 혼성(混成), 뒤섞여 있다. 노자는 이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이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뒤 섞여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有와 無의 뒤 섞임이다. 그러면 노자는 잡종 철학인가? 순수 철학인가? 노자의 철학은 잡종 철학이다. 노자의 철학에서는 순수라는 결정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것은 다 잡종이다. 대립면의 잡종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이름 붙힐줄 모르겠다. 이름 이라는 것은 제한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은 제한 하는 것이다. 이름 붙일줄 모르겠다. 그러니까 거기에 억지로 글자를 붙혀서 ‘강위지명왈대’


[도덕경 제25장]

吾不知其名 强子之曰道 强爲之名曰大 오부지기명  강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억지로 글자를 붙여 도(道)라고 하고, 억지로 거기에 이름 붙여 크다고 말할 뿐이다.

强爲之名曰大(강위지명왈대), 억지로 그것을 개념으로 묘사해서 본다면 크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두번째 爲(위)글자가 중요하다. 억지로 거기에 글자를 붙혔다. 붙힐수 없는 억지로 거기에 ‘道’ 라고 붙인다. 그래서 그것은 ‘道’ 라고 부른다. 어디에 억지로 이름을 붙일까? 유무상생(有無相生)에다가 붙인다. 


[도덕경 4장]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충이용지혹불영

“도(道)는 텅 비어 있다. 그러나 그 작용은 끝이 없다.” 이 말은 도(道)는 충(沖)은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사용하여도 다 채울수 없다.’ 는 말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도(道)는 텅 비어 있다. 도(道)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실제관은 같으면서 본질로 채워야 한다. 공자와 맹자는 본질이라는 것을 긍정한다. 그 본성(본질)은 맹자에게는 사단(四端)이였고, 공자에게는 인(仁)이었다. 맹자에게서 수양의 중요한 것은 확충(擴充)이란 개념이다. 키우고 채운다. 본질을 채운다. 본질을 긍정하면 실체론자일 수 밖에 없다. 본질을 긍정하면 채우는 것은 긍정할 수 밖에 없다.


노자는 본질을 긍정하지 않는다. 비본질주의자이고, 관계론자이다.  有.無의 관계론자이다. 有.無의 관계을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도(道)는 텅 비어 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은 본질이 없다는 것이다. 텅 비어 있는데, 그것이 작용을 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는 대립면이 만들어 내는 이 긴장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그 작용은 끝이 없다. 본질주의에는 끝이 있다. 목표, 이상이 있다. 최고 단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없다.


淵兮! 似萬物之宗 연혜! 사만물지종

깊기고 하구나 마치 만물의 근원 같다.” 연혜(淵兮)! 참 깊기도 하구나. 만물의 ‘종(宗)’ 우두머리, 이것을 만물의 기원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동양 철학을 공부을 하다 보면,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문법을 몰라서 만들어 낸 차이가 너무 많다. 그리고 글자를 잘못 읽어서 만들어낸 차이가 너무 많다. 여기서 ‘~같구나’ 하는 것이 ‘萬物之宗(만물지종)’ 만물의 근원 같구나.


[도덕경 4장]

湛兮! 似或存 담혜! 사혹존

“신비롭기도 하구나 마치 진짜로 있는 것 같다.”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줄 모르겠다.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던 듯하다.”

상제지선(象帝之先) 상제(하느님) 보다 앞서 있는것 같구나. 여기 ~ 같구나 하는 글자가 두번 나왔다. 사(似)와 상(象) 이 나왔다. 사(似)는 뭐냐면 보통 사이비하고 말한다. ~ 처럼 보이는데 진짜는 아닌것 이것은 묘사할 때 사(似)라는 글자를 쓴다. 사만물지종(似萬物之宗)이란 말은 ‘만물처럼 보이는구나’ 그런데 노자가 소근거리듯 조용하게 “그런데 아니야!” 라고 말한다. 사혹혼(似或存) 진짜 존재 하는것 같구나. “그런데 아니야”


상제지선(象帝之先) ‘상제보다 앞서 있는 것 같구나.’ 진짜로 그래! 이럴때 상(象)이라는 글자를 쓴다. 상제보다 앞서 있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도(道) 라는 질서를 건립했다고 하는 것은 천명론(天命論)를 극복 했다는 것이다. 천명론을 극복했다는 것은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왔다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철학의 세계로 왔다는 것이다.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시대로 왔다는 의미이다. ‘상제지선(象帝之先)’ 이라고 노자가 말하는 것은 천명을 완전히 극복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道) 라는 것이 천명(天命)을 지배하는 상제(上帝)보다 우선 한다고 보는 것이다. “상제(上帝) 라는 것도 말이야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어” 라고 노자는 말했을 것이다. 이것은 천명론(天命論)을 완벽하게 극복한 모습이다.


노자의 도(道) 

노자는 도(道)를 실체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이런 글자 해석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고,  또 하나는 철학적 읽기를 한다면 도(道)를 실체로 해석하면서 노자 안에서 모성을 긍정하거나 계곡을 긍정하거나 텅비움을 긍정하거나 無 을 긍정하거나 할 수는 없다.


그것을 긍정 했다는 것을 보면은 철학 구조상 도(道)는 실체나 본체가 아니다. 노자의 주장은 뭐냐? 이 세계는 有, 無 두 대립면의 꼬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노자는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그 말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어떤 것이어야 이름을 붙일수 있지만 노자가 이름을 개념화할 수 없다. 정의 내릴수 없다. 실체와 본체로 해석한 다음에 노자의 도(道)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논증할 수 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세상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설명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알 수 있다. 왜? 우리에게는 언어와 감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노자의 도(道)를 실체나 본체로 설명한 다음에 노자가 이름 붙일수 없다고 한 이 말을 대게는 노자는 너무 크고 초월 적이어서 정의 내릴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개념화 한다. 정의 내린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정의(define)한다는 것은 울타리를 친다고 했다. 울타리를 치고 고정 시킬 수 없다. 왜? 울타리를 치고 고정 시킬수 없을까? 관계로 되어 있고, 항상 운동하고 있으니까 고정 시킬수 없다. 이 세계는 한번도 정지해 있지 않고 항상 운동하니까 하나의 이름으로 정지 시킬 수 없다.


노자의 도(道)는 개념화 하지 못한다.이름 붙이지 못한다. 하는 것은 노자의 도(道)가 너무 크고 초월 해서가 아니라 노자의 도(道)라는 것은 이 세계에 대립면간의 상호의존 관계에 운동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지 시키고 제한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개념으로는 관계와 운동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자가 하는 말이 그 말 끼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제14장 에서


[도덕경14장]

繩繩兮不可名 승승혜불가명

끊임없이 이어져서 그 이름을 무어라 붙일 수가 없다.” 새끼처럼 꼬여있어서 이름을 개념화 할 수 없다. 정의 내릴 수 없다. 여기서 노자는 도(道)를 새끼줄로 묘사하고 있다. 새끼줄은 두 가닥이 꼬여 있는 것이다.  도덕경 안에 나오는 ‘일’ 이란 것은 근원으로써 ‘일’, 실체로서의 ‘일’ 이 아니라 잡종으로서 ‘일’, 有와 無의 대립면의 꼬임으로서의 ‘일’ 이다. 스테레이스 젓가락 같은 ‘일’ 이 아니라 새끼줄 같은 ‘일’ 이다.


노자의 꿈 구분 차별 없는 사회

공자는 부모 자식간에 흐르는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정서를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하고, 이 본성을 확대해서 모두 다 성숙한 인간이 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자의 이 꿈은 노자가 볼때 목적론과 가치론에 빠질수 밖에 없고, 그러면 사회가 그것을 구분하고 기준한다. 구분이 되고 차등이 되는 한 사회 갈등 요소는 피할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성에서 인사이트(통찰력)을 구하지 말고 자연에서 구하자. 그래서 자연의 생김새를 보고 자연이 생긴 모습대로 따라서 한 번 살아보자. 하는 것이 노자의 꿈이 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한 것은 노자는 이 세계가 有, 無의 대립면의 꼬임으로 되어 있다. 어떤 것도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은 有, 無의 대립면의 관계로 되어 있다. 대립면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이 관계성을 정치 영역에 응용하자, 삶의 영역에 응용하자, 윤리적인 삶에 응용하는 것이 노자의 꿈이었다.


[도덕경 21장]

孔德之用 惟道是從 공덕지용 유도시종

“큰 덕의 모습이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공(孔)은 크다는 의미이고, 덕(德)은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습이다. 가장 큰 덕의 모습은 ‘유도시종(惟道是從)’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 여기 덕(德) 안에는 정치행위, 윤리적, 인신적, 알음의 행위 등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 덕(德)이다. 가장 훌룡한 활동은 가장 훌룡한 삶은 가장 훌룡한 정치행위는 가장 훌룡한 지적활동 이라는 것은 도(道)를 따라서 하는 것이다.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지유물 유황유홀

도라는 것은 황홀하고 홀 하다는 것이다.” 황(恍)이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것, 홀(惚)은 어둑어둑해서 안보이는 것을 말한다. 관계성 철학을 같는다 하면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도덕경 1장]

同謂之玄 동위지현

“같이 있는것, 그것은 현묘하다”  도덕경 1장에서 노자는 有와 無가 함께 있는 것을 현(玄)이라고 표현했다. 현(玄)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할때 검을현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래는 ‘감을현’ 이라고 했다. ‘감을현’은 가물가물 하는 표현이다. 가물가물 하다는 것은 경계가 불분명 하다는 것이다.


노자는 有, 無의 대립면의 공존, 이 대립면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으로 세계가 이루어 졌다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따라서 해보자. 삶을 영위할 때 행위를 할 때 우리는 대립면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을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살아야 되겠다.  인문적 통찰, 세계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은 경계에 서는 것이다. 경계에 서면 두렵고, 불안하다. 모호하다. 그런데 인간은 경계에서 섰을때만 세계을 투철하게 바라보게 된다. 경계에 서지 않기 위해서 분명한 하나를 선택 한다면 그것은 개념, 지식, 이론으로 되어 있다. 그런 경계에 섰을때 나오는 두려움, 불안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분명한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세계에 같이게 된다.


모호함이나 애매함에서 오는 경계에서 오는 두려움을 두려워 하지 말자. 명료함으로 바꿀려고 하지 말자. 그것은 명료함으로 바꿔서 재단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품어야 한다. 품어야 되는 것은 받아 들이고, 모호함, 두려움이 있는 경계에 서서 양쪽 모두 품을 때, 그때 나오는 인식이 바로 지식이 아니라 통찰이다. 노자는 그것을 명(明) 맑을 ‘명’ 이라고 표현했다. 맑은 ’명’은 해와 달이 함께 있다. 해만 보는 것도 아니고, 달말 보는 것도 아니다.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명(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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