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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EBS 제5강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17.



EBS인문학특강 강의노트

제5강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최진석

서강 대학교 졸업, 現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

북경대학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 철학박사  학위

하버드 객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장자철학’ 과 ‘노자신록’ 등이 있다



우리가 4강에서 도(道)가 출연하는 과정을 알아봤다. 이제 도(道)가 출연했다. 노자 사상을 이야기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도(道)이다. 도(道)의 출연으로 중국의 사유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넘어 왔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속에 도(道)의 출현은 인간의 역사속에서 인간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1장 道의 개념과 질서의 확립


신뢰를 잃은 하늘(天)의 자리를 道가 대체

은나라 때까지 인간은 신의 그림자로만 존재했다. 모든 것이 신(神)의 결정에 의한 것이고, 인간은 신의 음성을 찾아서 듣고, 움직이기만 하면됐다. 그런데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국과 함께 덕(德)라는 개념이 출연한다. 덕(德)라는 개념이 출연 했다는 것은 인간이 이 세계를 해석하고, 자기 존재를 해석하는데 자기 내부에 어떤 코드를 같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주 시대에는 천(天)과 덕(德)이라는 두 개의 중심 범주가 생기게 된다. 춘추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특히 춘추말 전국 초 사이에는 천(天)의 개념이 약화되어 인간에 의해 제거되고, 그 자리를 도(道)가 차지하게 된다. 


 道의 개념과 질서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이 때 공자와 노자는 어떻게 하면 도(道)의 개념과 질서를 확립하고 만들어낼 것인가? 에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을 하게 된다. 인간은 천명(天命)을 극복하고, 도(道)를 중심으로 이 세계를 해석하고 자기의 삶의 의미를 거기에서 확보 할려고 했다. 그러면 천명(天命)을 극복하고 도(道)로 가는 과정에서 도(道)는 천명(天命)이 같고 있었던 모순들을 극복한 상태에서 도의 개념이 만들어져야 했다. 


천명(天命)이 모순된 개념을 같고 있다는 것은 천명(天命)이 중심이되서 세계를 관리할 정도가 더 이상 아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 경제적 조건은 천명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천명(天命)에는 어떤 모순의 노정이 되서 새로 전개된 사회 경제적 조건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까? 이런 모순을 극복해서 도(道)란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 수 있다.


(殷)나라는 모든 것은 하느님(上帝)가 결정한다고 믿었던 사회

상제(上帝), 즉 하느님이 지배하는 사회는 평화로운 사회일 수 있지만 역사속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서양의 중세가 그랬고, 중국의 은(殷)나라가 그랬다. 은(殷)나라 (BC1600~BC1046)는 상제(上帝)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굉장히 거친 사회였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고 말한다.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이유는 주나라는 인문적 분위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하면 주나라는 젊잖다. 그러나 은나라는 점잖지 못하고 굉장히 거친 사회였다.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이 ‘주지육림(酒池肉林)’ 했다. 이말은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은 이룬다는 뜻으로 은(殷)나라 주왕의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다.


하느님(上帝)이 다스리는 사회, 감춰진 주관성에서 나온다.

하느님이 지배하는 사회는 평화로운 사회일 것 같지만, 역사속에서는 그것이 항상 평화롭게 전개되지 못했다. 왜 그런가 하면, 천명(天命)이 지배를 한다, 인간을 초월한 최고 권위가 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할 때, 이 지배력은 주관적이다. 하느님(上帝)이 세상을 다스릴때는 상제(上帝)는 주관적으로 마음대로 다스렸고, 상제(上帝)의 권위를 받은 천자(天子)는 천자 마음대로 주관적으로 다스렸다.  주관적으로 다스렸다는 말은 이랬다 저랬다, 일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주관성이 권위를 같으려면 다스려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上帝)이 다스리는 사회에서는 감춰진 주관성에서 권위가 나온다. 감춰진 힘은 주관적으로 움직이고, 소수들에게만 권위가 허용된다. 그 소수들이 신의 대행자로 행세하게 된다. 그리고 소수들은 힘을 주관적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 힘을 감춰서 사용한다.


천명(天命)의 모순은 비의성, 주관성, 임의성을 같는다.

‘천명(天命)이 지배한다.’ 인간을 초월한 최고 권위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할 때 이 지배력은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으로 행사된다. 하느님(上帝)이 세상을 다스릴때는 상제(上帝) 마음대로 다스렸고, 상제(上帝)의 권위를 받은 천자(天子)는 천자 마음대로 다스렸다. 주관적으로 다스렸다는 말은 일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이 주관성이 권위를 갇으려면 다스려지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인간을 초월한 힘, 상제(하느님)가 세상을 다스릴때 권위는 감추어진데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감춰진 이 힘은 주관적으로 움직이고 소수들에게만 권위가 허용됬다. 그 소수들이 힘의 대행자로 행사하게 된다. 신(神)의 대행자로 행세하는 이 소수들은 객관성을 배제하고 주관적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감춰서 사용했다. 그러니까 인간을 초월한 최고 권위가 지배할 때는 주관성, 비의성, 임의성을 같고 행사된다. 그 시대의 천명에 모순을 노정(路程)했다면 그 모순의 노정(路程)은 비의성, 임의성,주관성을 같고 있다. 


시경(詩經)등과 같이 그 시대를 기록한 많은 경전들 속에서는 무엇을 한탄 했는가 하면, 왜! 상제(하느님)는 은혜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하는가? 왜! 하느님은 일관적이지 않는가? 왜! 하느님은 미덥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한탄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도(道)의 전개 방향은 보편성, 투명성, 객관성 확보

이 모순이 극복이 되서 새로운 세계로 나가야 할 때 중심이 되는 개념(범주)는 도(道)이다. 이 도(道)는 객관성, 비의성, 주관성을 극복해서 보편성, 투명성,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도(道)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이떻게 지배 질서를 투명한 지배 질서로 만들 것인가?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만들 것인가? 보편적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고민 이었다. 이런 고민들을 그 시대의 최전선에서 예민하게 반응해서 해결 할려고 했던 사람들을 철학자라고 했고,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는 공자와 노자의 이야기를 할려고 한다.




2장 공자의 철학적 혁명은 인(仁), 씨앗이다.


노자가 공자보다 20살 정도 많다. 공자와 노자는 같은 시대를 살았고, 사유의 대상도 같았다. 그리고 공자와 노자가 대면한 셰계도 같은 세계였다. 공자와 노자는 같은 문제를 다른 문제 해결 방식으로 논쟁했다.  정반합의 방법으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공자의 논어(論語)의 내용을 축약적으로 압축 해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자가 깨달은 것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이다. 그러면 공자 이전 시대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신(神)에 있다고 했다. 공자의 혁명성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신의 명령에 있지 않고, 인간 자체에게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게 공자의 철학적 혁명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 사람이 인간인 이유가 그 사람 자체에 있다고 본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자기 내부에 있다고’ 할 때 인간이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공자는 인(仁)이라고 했다.


우리가 논어를 읽을때 일반적으로 인(仁)을 ‘어질 인’ 이라고 해석한다. 인(仁)을 ‘어질 인’ 으로 해석한다면 논어의 내용 자체가 완전히 어지러워진다. 인(仁)이라는 말은 원래의 의미는 ‘씨앗’ 이라는 말이다. 살구씨를 한자로 행인(杏仁)이라고 쓴다. 그래서 인(仁) 이 ‘씨앗’ 이라는 말이고 ‘핵’ 이라는 말과 같다.


인간에게는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씨앗’ 이 있고, 그것이 인(仁)이다. 모든 인간에게 씨앗이 있다면, 이 씨앗은 줄이지말고 키워야한다. 이 인(仁)을 어떻게 키울것인가? 하는 것이 논어에 나오는 모든 내용에 촛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안에 들어있는 인간으로써 ‘씨앗’ 인(仁)을 끼울 것인가? 이것이 제일 잘 키워진 상태를 우리는 성인의 상태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씨앗’을 잘 끼우겠습니까? 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성숙한 인간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인간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공자는 이것만 실천하면 된다고 대답해 준다.    


니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마라.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논어 위령공편) ‘니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마라’ 는 말이다. 니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게 하지 마라. 이것만 지키면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니가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도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있는 씨앗은 모든 인간에게 다함께 공통적으로 있다. 이것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 씨앗(仁)이 공통적으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공통의 씨앗(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원한다. 이것만 잘 지키면 완벽히 성숙한 인간이 될수 있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한다는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공통의 본질을 같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이 나에게 알려져 있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개관적인 공통의 씨앗(仁)이 있다. 


이것으로 공자가 도(道)의 방향으로, 도(道)의 질서를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음으로는 노자 사상과 비교하기 위해 공자의 사상의 구조가 무엇인가 알아봐야 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논어 1장 학이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다’ 라는 말이다. 공자는 모든 인간에게는 씨앗(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씨앗(仁)을 잘 키우는 방법으로 학(學)과 습(習)을 제시 했고,  논어 첫 구절에서 학(學)과 습(習)이 나오는 이유이다. 그래서 학(學), (習)의 목적은 씨앗(仁)을 사회의 보편적 가치, 이념, 이상, 질서와 일치되는 단계로 키우는 것 이다.



3장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그 사회에서 합의된 보편적 질서, 이데올로기, 가치, 기준들을 공자는 예(禮)라고 하였다. 논어의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하면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할 수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논어에 한 번 나오는데 송나라때 주자(朱子)라는 철학자가 “공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할 수 있겠다.” 라고 정리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란? 기(己)는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존재다. 씨앗(仁)만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자기를 단련시키고 이겨내서 가장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 내는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다. 인(仁)이 인간의 ‘씨앗’ 이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중용(中庸)를 통해서 볼 수 있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인자인야 친친위대 (중용), 인(仁) 이라는 것은 사람(人)이다. ‘친친위대’ 친친(親親)이란? 혈친으로서 더 가까운 사람을 더 가깝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혈열상 더 가깝게 있는 사람을 더 가깝게 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자는 효(孝)와 제(弟)가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

어떤 사람이 명절에 고향으로 내려갈때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선물을 사가지고 가야 하지만, 이 사람은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해서 아버지가 싫었다. 그 사람에게는 아버지에게 학대 당한 자기를 위로해주고 잘 키워준 삼촌이 있었다. 명절때 고향에 내려갈때 이 사람은 삼촌에게 소고기 10근을 사가지고 가고, 아버지에게는 닭 한 마리만 사가지고 갔다면, 공자가 이걸 보고 인간으로서 제대로 행동하지 않고 있다고 했을것이다. 삼춘과 아버지는 혈연상으로 거리가 있다. 때어나서 나중에 후천적으로 삼춘이 더 잘 대해줄 수는 있지만, 인간에게 있어 타고난 가장 기본적인 정서, 혈친(血親)으로서의 느낌이 더 근본적이다는 것이다. 삼춘이 아무리 고맙더라도 아버지에게 더 큰 선물을 했어야 했다. 후천적으로 나타나는 이 감정을 이겨서 원래 혈연으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심성을 지키는 것 부터 인간은 시작된다고 공자는 보는 것이다. 그래서 친친(親親)이 중요하다.  


왜? 그런가 하면, 공자는 인간으로서 ‘씨앗’ 이 부모와 자식간에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며, 그 다음에 형과 동생사이에서 느껴진다고 했다. 가족 관계속에서 느껴지는 이 감정이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인 이유라고 하였고, 이것이 인간의 ‘씨앗’ 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을 깨뜨리면 인간이 아니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간에 있는 정서와 형과 동생 사이에 흐르는 이 정서를 공자는 효제야(孝弟也), 효(孝)와 제(弟)가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 이라고 했다.


(孝)는 가정안에서 윤리 아니라 국가의 기틀을 반든다.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논어) “부모에게 휴도하고 형제간에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공자의 사상속에서 효(孝)라는 것은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임을 확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이다. 그래서 효(孝)라는 것이 유교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인간인 최초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효(孝)는 단순히 가정안에서의 윤리가 아니라 국가의 기틀까지로 발전된다. 그런 인간다운 인간들이 모여 있어야 국가가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정서, 이것이 지켜지는 범위 안에서 모든 질서가 만들어여야 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인(仁)의 기준은 예(禮)이다.

예(禮)라는 것은 인(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상적인 단계다. 그래서 이것이 선(善)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적이고, 완벽한 것이고, 이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禮)를 기준으로 해야한다.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그래서 예(禮)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예(禮)에 맞지 않으면 듣지도 말고, 예(禮)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예(禮)에 맞지 않으면 움지이지도 말라.는 것이다.  당신이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으면, 완벽한 인간이 된 다음에 죽고 싶으면, 예(禮)를 지키라고 한다. 공자는 보편적인 기준을 인정하고, 인간의 이상적인 단계를 인정하고, 누구나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노자는 바로 이 점을 공격한다.



4장 인간 갈등의 대부분은 내 기준과 생각이 맞지 않아 발생


파격은 유행이 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미니스커트를 처음 입은 사람은 가수 윤복희였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모든 여성들이 월남치마라고 하는 긴 치마를 입고 다녔는데 누가 무릅 위까지 오는 짧은 치마를 입고 나타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긴 치마를 입고 있을때 짧은 치마가 등장한 현상을 파격(破格)이라고 한다. 긴 치마로 이루어진 질서를 격(格)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깬 것이다. 파격(破格)적인 현상은 일상적으로 수없이 일어난다.  그런데 어떤 파격(破格)은 유행이 되고 어떤 파격(破格)은 사라지게 된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사라지는 파격(破格)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사회가 그현상을 반영하면 따라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인간의 역사 발전은 항상 주변이 중심을 공격하는 역사이다. 소수가 다수를 전복하고, 다시 등장한 소수에게 전복당하는 역사, 윤복희는 소수로 등장했고, 같은 소수 주변적인적 동질감을 같은 사람들이 따라하게 한다. 이 따라서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 주류의 격(格)을 지키려고 만들어진 조직(공권력)이 이 파격(破格)자들이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게된다. 이 때 단속 효과가 없고, 따라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공권력이 물러나게 되고 미니스커트는 유형이 되게 된다. 파격(破格)이 중심으로 진입하면서 유형이 된다.


미니스커트가 유행이 되는 순간(합의 되는 순간) 유형은 패션으로 제한되지 않고 바로 권력으로 변질된다. 바로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데올리기란 것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으면 불편해지는 것이다. 미니스커트가 유행이다. 그래서 유행 한다고 합의되는 순간 이제는 미니스커트를 꼭 입어야 될 것 같은 조급함이 생긴다. 그래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과 입지 않은 여성으로 나뉘게 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은 우월감을 가지고, 입지 못한 여성은 열등감을 갇게된다.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 여성은 유행에서 배제가 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차등이 생긴다. 미니 스커트를 입어서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과 적당히 어울리는 사람, 안어울리는 사람, 입었기 때문에 불편한 사람등 으로 차등이 생긴다.


노자는 선의의 폭력은 합의된 기준이 만든다.

기준이 만들어진 순간 구분이 된다. 구분이 되는 순간 차등이 매겨진다. 그래서 기준이 만들어진 순간, 그것이 아무리 선(善)이라고 해도 보편적 기준이 확보되는 순간 그것은 바로 권력이 된다. 권력이 되면 나중에는 그것이 폭력이 된다. 지금 한국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갈등은 부모와 자식간에 일어난다. 이 부모 자식간의 갈등은 거의 부모의 선의(善意)에서 출발한다. 자식을 잘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선의(善意)을 가지고 하나의 기준을 가지는 순간,  “그래도 대학은 서울대로 가야 할 것 인데” 라고 기준을 가지는 순간 그 아름다운 선의(善意)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고귀한 선의(善意)는 폭력이 된다. 폭력은 악(惡)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노자는 “합의된 기준이 만들어 낸다고” 고 말한다.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내 기준에 안 맞아서, 내 생각과 달라서 생긴다고 보는것이다.



5장 기준을 학습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산하는 존재로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익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도덕경 2장),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한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하다고 알면 이는 선하지 않는 것이다.”


선(善)의 보편적 기준은 폭력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이 세계에는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있고, 악이 있기 때문에 선이 있다.’ 라고 해석 하는데  이런 주관적 상대주의는 중국에서 전국전기 이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다.  노자는 공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한다. “공자님 우리가 천명(天命)을 극복해서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질서는 보편적이고, 투명하고, 객관적인 질서이어야 합니다. 공자님은 보편성과 객관성과 투명성을 인간의 씨앗, 인간의 본질을 기본으로 만들었지만, 이 본질이 키워져서 이상적인 기준을 형성하고,  그 이상적인 기준을 모두 선(善)이라 합의 해서 누구나 지켜야 되는 것이라고 합의하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회에 다양한 폭력과 구분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큽니다.”  노자는 “아무리 그것이 선(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기능하는 한 이것은 폭력이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공자와 노자가 함께 만들려고 했던 보편적이고, 객관적이고, 투명한 질서는 다시 폭력의 시대로, 구분의 시대로 돌아가 버리게 된다. 그러지 말자고 하는 것이 이 문장의 의미이다.


보편적 기준은 개념의 구조물이다.

우리들은 어떻게 잘 살다 갈까? 어떻게 의미있는 인간으로 살다 갈까? 고민이 많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반성을 많이 한다. 대개 잘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한다. 우리가 반성을 한다는 것은 대게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은 자기가 생산한 것이 아니라 대개는 밖에서 만들어 진다. 우리가 반성을 하는 행위는 자주 자기는 참여한 적도 없는 이미 만들어진 기준을 진리인줄 알고 거기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다. 보편적 기준은 실재를 반영하지 못하는 대개는 개념의 구조물이다. 


자기를 외부의 보편적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해석

반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부적적으로 만들어진 기준에 자신을 같다 대기 때문에 이 기준에 맞는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 기준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으니 반성을 할 때 부터 자기 비하가 시작되는 것이다. 반성은 실재보다 큰 반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개는 상처를 남긴다. 잘살아 보려고 하는사람, 완벽한 인간이 되보려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큰 실수는 자기를 외부의 보편적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해석 한다는 것이다. 외부적 기준에 맞추어 자기를 해석하는 한 그런 사람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용하다.


이상의 보편적 기준으로 자신을 결함있는 존재로 만들지 말자 

모든 사람들이 합의한 기준(보편적 기준)은 자주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거기에 기준을 두고 자기를 생각하는 한 자기는 항상 비참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기준이 위에서 내려오면 않되고, 자기의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내면에서 생산이 되어야 한다. 기준을 학습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산하는 존재로 등장해야 되는다는 것이다. 저 멀리 있는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이상의 보편적 기준으로 보고 자기을 천한 존재로, 자기를 죄인으로, 자기를 부족한 존재로, 결합있는 존재로 말들지 말라.


자유, 행복, 창의성은 보편적 기준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자유, 행복, 창의성은 보편적 기준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자기 내면의 독립적 생명력에서 부터 나온다. 여기서 부터 출발해 보자는게 노자의 사상인 것이다. 노자의 뜻을 조금 강하게 나누어 같는다면 우리가 죽을때 까지 한번도 보려서는 않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와 두번째는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 여기에서 부터 지정한 삶의 의미,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 진정으로 부강한 국가가 형성될 수 있다. 하는것이 노자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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