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제7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20.




제7강 EBS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최진석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 대학교 졸업

북경대학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 철학박사  학위

하버드 객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장자철학’ 과 ‘노자신록’ 등이 있다.


노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노자는 자연의 질서를 도道 라고 표현했다. 도道 라고 표현한 자연의 질서는 이 세계는 무無 로 표현될 수 있는 한 부분과 유有 로 표현될 수 있는 한 부분이 있다. 주역(周易)은 자연 현상의 원리를 풀이한 유교 경전으로 이 세계를 음(陰) 과 양(陽)의 세계로 나누어서 음과 양의 관계로 이 세계의 모든 문제를 풀이하고 있듯이, 서양의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이 세계를 정신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으로 나눈 다음에 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로 이 세계를 설명했다. 노자는 이 세계를 무(無)의 영역과 유(有)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유, 무의 관계로써 이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것이 노자의 도덕경 1장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노자사상에서 무(無)가 먼저일까? 유(有)가 먼저 일까? 無와 有는 존재적론적으로,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아무런 선, 후의 차이가 없고 공존하는 것이다. 똑 같은 상태에서 똑 같은 존재적 위상을 같는다. 無와 有가 공존 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노자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동양철학은 신흥학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양철학이라 하면은 다루는 텍스트가 굉장히 오래 되었기 때문에 오래된 학문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동양철학은 ‘신흥학문’이다. 철학 이라는 번역어가 들어와서 동양 사회에 본격적으로 철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1847년에에 니시아마네(1829~1897)라는 일본 학자가 처음으로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Philosophy, 철학(哲學)’을 번역했다. 그래서 철학(哲學)이라는 번역어가 동양 사회의 학술계나 사상계로 진입하게 됬다.

동양 철학이라고 하면은 동양에 있는 오래된 사상적 자료들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을 동양철학 이라고 한다. 그 전에 동양에서는 ‘學’이 있었지,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철학(哲學)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철학(哲學)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을 먼저 말하기 전에 동양이 철학(哲學)을 받아들였던 그 때의 모습을 알아보고 나서 철학(哲學)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그것이 노자를 이해하는데 왜 필요한가를 알아보자.


중국 철학의 태동

나는 중국의 5천년 역사속에서 중국에는 두 번의 축복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한번의 축복은 한(漢)나라말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사건이다. 춘추 전국시대 부터 일어난 중국 고유의 사상은 발전을 거듭해서 철학(哲學)이 발전 했다는 것은 그 철학이 제공하는 세계관으로 중국 사회가 실질적으로 잘 작동 되었다는 것이다. 이 철학과 현실 철학이 유기적으로 잘 작동 되서 이것이 동진(東晉 317~420)시기에 중국철학은 극에 이르게 된다. 중국 철학을 최극까지 중국 교유의 전통 사상으로 끝까지 발전시킨 철학자 ‘장자’ 라는 책에 주(註)를 단 곽상(郭象 252?~312)이란 철학자다. 곽상(郭象)은 독화론(獨化論)을 주장한다. 이 독화론은 “모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들은 완결된 존재들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으로 춘추 전국시대 때 부터 발전한 중국 고유의 사상은 정점을 찍고 막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중국 철학이 한계에 이르게 되고, 철학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새로 전개되는 사회 경제적 변화을 세계관이 담아 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계에 이르러 중국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 때 한(漢)나라 말에 들어온 불교가 중국의 사상에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올때는 불교는 완벽한 철학으로 들어온다. 이 완벽한 철학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지 못하고 있던 어정쩡한 중국의 철학계가 긴 시간동안 대립과 갈등을 한 다음에 갈등하고, 투쟁하고, 융합하는 이런 과정이 몇 백년동안 이루어진 다음에 철학이 중국 특색으로 불교를 완전히 흡수해서 다시 중국의 고유의 사상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불교 사유가 들어와서 새로워진 현상과 내용을 가지고 중국 고유의 사상에다가 다시 접목 시킨다. 이것이 ‘신유학(新儒學)’ 이라는 철학이고 이것을 잘 해냈던 철학자을 중국 남송(南宋)시대의 유학자인 주자(朱子 1130~1120)라는 큰 철학자가 있었다.  주자(朱子)라는 거목이 나타났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주자(朱子)라는 철학도 형성될 수 없었다. 그렇게 주자학이 생기고, 양명학으로 바뀌고 청나라때 고증학으로 넘어간다. 이런 변화 과정을 겪으면서 중국은 계속 사회 변화와 사상 변화가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면서 잘 나가게 된다. 그러다가 또 다시 중국 철학은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중국이 철학적 한계에 도달했던 청나라 말엽은 초기 까지만 해도 서양과 동양 사이에 경제적 격차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중국이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양(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산업혁명은 토인비(Toynbee1889~1975)라는 역사학자가  1760년 부터 1840년 까지 영국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면서 토인비가 처음으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서양 사회에서는 하나의 커다란 혁신이었고 영국 사람들은 이 혁신 방향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혁신을 합십해서 새로운 발전 단계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런 혁신이 동양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부(富) 쌓이게 되고, 이런 부(富)는 힘을 감당하기 힘들때 그 힘은 옆으로 퍼질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영국의 제국주위를 만들에 내게된다. 

그때 동양 철학은 철학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은 영국의 힘 앞에 처절하게 굴복하게 된다. 중국은 동양에서만 주도권을 같고 있는게 아니라 세계에서도 주도권을 같고 있었던 제국 이었다. 그런데 이 중국을 중심으로 해서 유지되던 아시아의 주도권이 어느 순간에 서양에 짓밟혀서 역전되는 사건이 발생된다. 그것은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阿片戰爭)이다.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阿片戰爭)을 계기로 해서 서양은 동양보다 현실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고, 동양은 굴욕적인 사건을 계기로해서 서양에 완전히 짓밣히게 된다.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군사적으로, 산업생산 등 모든 방면에서 서양에 우위를 빼앗기게 된다. 동양는 그때부터 서양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 속에 빠져든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은 아편전쟁 이후로는 계속 서양을 어떻게 하면 따라 잡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서양을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주제였다. 서양에서 빨이 배우는 것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었고,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구국의 길이었다. 서양을 따라 배울때 제일 먼저 배운것이 중국의 근대사를 일별해 보면 서양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중국이 서양에 머가 무서워서 이렇게 짓밣혔나? 

제일 먼저 서양을 따라 배울려고 했던것이 군사기술이었다. 그런데 군사기술을 열심히 따라서 해 봐도  서양을 잘 따라 배울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본 것이 제도였다. 의회제도,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들 이런것들이 서양의 힘을 증강 시킨것이 아니였을까? 해서 제도를 배웠다. 제도를 따라서 해 볼려고 해도 잘 안되었는데, 그 제도의 배후에 사상,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부터 서양의 사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양 사상을 배우면서 중국 사람들은 특히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열등감을 ‘서양 철학에 어떤 것이 있으면’ “야! 그거 우리에게도 있어” 또 서양 사람들이 저런 철학을 이야기하면 “원래 우리에게 있어” 라고 열등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서양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계속 서양의 철학의 모델을 그대로 중국에 이식 하는데 굉장히 심혈을 기울렸다. 그 이식이 정치적인 것과 혼합해서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은 막스레린주의로 무장해서 중국을 통일한 일이다.

중국이 막스레린을 수용한 것이 마치 완벽한 사상 체계로 이루워졌던 인도의 철학을 받아드려서 중국이 다시 사상적으로 재무장하고 사회를 재편하고 통일을 이루웠듯이, 중국에서도 당시까지 서양 철학중에서 대표적인 최첨단 철학중의 하나인 막스레린니즘을 그대로 수용해서 중국을 통일하고 발전 시킨다. 막스레린을 수용한것이 여러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전통을 단절 시키고 하는 여러 부정적인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중국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들이 독립적으로 사상 투쟁을 이겨서 자기들이 과거를 단절해야 되겠다고 결정을 하고 자기가 판단해서 과거를 단절한 것이다. 중국의 독립적인 사고를 통해서 과거를 단절하려고 결정 했던 힘이 앞으로 중국 발전을 이끄는 힘으로 발전할 것이다.


과거의 단절을 피동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외세에 의해서 한것도 아니고 자기들의 역사적 투쟁 과정속에서 결정했다. 과거를 단절한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과거를 단절하려고 했던 철학적 결단, 이것이 중국 자체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발전하겠는가를 보려면 중국 사람들이 불교를 어떻게 수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을 보면, 중국 사람들이 막스레린니즘을 수용해서 어떻게 중국화 해서 다시 역사를 추정해 나가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 철학의 사유

1840년에 아편전쟁이 일어나서 서양에 완전히 짓밣힌 다음에 중국 사람들은 활로를 모색한다. 그때 서양 철학을 수용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서양 철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서양 철학이 중국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지 못했다. 인도 철학, 불교가 막 들어왔을때 중국 사람들은 인도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불교의 핵심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가상(假想)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짜다.’  인연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래고 ‘본무자성’(本無自性) 본성을 가진 존재는 없다. 그런데 중국 동진 시기에 ‘곽상철학’의 완결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다 자기의 완결성을 지탱하는 본성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본성이 없다는 불교가 들어와서 본성(本性)이 있다고 주장하는 중국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개별적인 존재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본성을 가지고 완결된 존재라고 중국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한계에 이르고 나서 다시 들어온 새로운 철학은 이 세계에 본성을 가진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불교가 들어왔다. 그래서 불교와 중국 전통 사상사이에는 서로 해석상에 부자연스러움이 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고유한 개념으로 불교를 해석한다. 그때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격의불교는 중국 사상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다.

지금 서양에 있는 철학이 동양에 그대로 수용되는 것, 특히 중국에 그대로 수용되는데에는 지금 많은 한계가 있다. 그 어떤 한계가 있는가 하는 것들이 노자 찰학을 해석 하는데도 개입되어 있다. 노자 철학을 해석하는 개입을 통해서 이때 사성적 흐름을 보는것도 좋다. 서양 철학이라는 것은 크게 보면 어떤 모습인가?

화이트 헤드(Whitehead1861~1947)라는 서양의 철학자가 있다. 영국에서 수학과 교수였다가 미국 하버드로 가서 철학 교수가 되었다. 화이트 헤드는 서양 철학사을 일별해서 보고 “서양 철학자는 프라톤의 가주에 불과하다.” 고 이야기 한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을 이리저리 풀어 쓴 것이다고 말한다. 화이트 헤드가 한 이 말이 많은 인구에 회자가 된다. 

플라톤 철학이란?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는 “이 세계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 고 말한다. ‘있는 것은 쪼개지는 않은 하나로 있다.’ 이 철학을 받아서 플라톤이라는 사람은 이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 이 세계는 완벽한 세계와 완복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 완벽한 세계와 완벽하지 않는 세계로 나뉜다.

완벽한 세계란? 개념의 세계이다. 그리고 완벽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를 플라톤은 Idea(이데아)라고 했다. 완벽한 세계, 진실의 세계, 진리의 세계, 참의 세계는 변하지 않는 세계이어야 한다. 그것은 생각, 사유(思惟) 속에만 있다. 서양의 주류 철학이 생각할 때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모두 다 변한다. 그리고 모두 다 유한하다. 변하고 유한하기 때문에 완벽한 세계가 아니다. 진리의 세계가 아니다. 개념에 비교해서 부족한 세계다.

서양 사유(思惟)의 기본 구조는 완벽한 세계, 이것을 본체의 세계라 한다. 완벽하지 않는 세계, 현상의 세계, 이 세계를 이 두개로 나누어서 완벽한 세계와 완벽하지 않는 세계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서양 철학의 특징이고, 눈에 보이는 경험세계,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경험에 비해, 결함이 있기 때문에 항상 부족한 세계다. 그러면은 서양 사유(思惟)속에서 진리는 항상 저곳에 있다. 이곳은 어떤 세계인가? 부족한 세계다. 

이런 구분이 왜 일어나는가 하면, 진리의 참의 세계가 서양의 주류 철학에 의하면 항상 사유(思惟)의 세계속에 있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사유(思惟)의 구조물이다. 사유(思惟)의 완결된 조직로 되어 있는것, 이것을 서양에서는 철학이라고 한다. 사유(思惟)의 세계는 저곳(멀리)에 있다. 이곳은 저곳에 비해 항상 부족하다. 서양 사람들에게 ‘현상’이란 부정적인 느낌을 같는다.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믿지 못할 것이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경험, 현상 이것은 항상 부족한 느낌,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서양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은 본체, 사유, 개념 등이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동양 철학의 사유

공자와 노자는 ‘道’ 의 질서를 확립(극복)하려고 했다.  道의 질서는 천명(天命)을 극복한 것이다. 道의 질서를 극복할때 이 道의 질서를 극복하는 철학적 통찰력을 공자는 인간의 본성(仁)에서 구했고, 노자는 자연에서 구했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인간만의 씨앗, 본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본질은 공자에게서 인간의 씨앗이란 것은, 인간이 씨앗이 있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서 확인된다. 경험에 의해 확인되는 가장 근본적이고 진실한 곳은 부모와 자식간이었다. 부모 자식간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 그 정서를 공자는 인간의 본성이 잘 드러나는 것으로  파악했다.

공자보다 유학의 철학을 치밀하게 구조화한 철학자가 맹자 였다. 맹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으로꺼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의 본성이란?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의 네 가지지 심리현상 이라고 했다. 이것은 ‘맹자의 사단(四端)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시비지심(匙非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이라고 한다.

사슴은 착해 보인다. 사슴에게는 측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없다. 만약 사슴에게 ‘측은지심’이 있으면 인간의 본성일 수 없다. 있다면 우리와 같이 살아야 한다. 이 네가지 심리현상은 어떤 동물, 식물에게도 없는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그런데 이 네가지 심리현상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다.  맹자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일 수 밖에 없는 본질은 네가지 심리 현상이다. 심리현상은 철저히 경험의 대상이다. 그래서 공자든 맹자든 철학을 구성하는 철학적 통찰력의 기반은 경험에서 온다.

노자는 ‘道’의 질서를 건립하면서,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응용하고자 했다. 자연의 질서는 有와 無의 꼬임으로 되어 있고, 상생한다. 이 주장은 노자가 관찰해서 발견한 것이다. 관찰은 경험이다. 동양철학이 기본적으로 경험에서 출발한다. 

흔이들 동양 철학에는 ‘논리학’ 없다고 주장 하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논리학이 발달했다. 동양 사람들이 지능이 낮거나 모자라서 없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논리학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는 철학이었다. 사유의 구조물인 서양 철학에는 존재하지 않는것, 만져지지 않는것, 실제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직은 치밀하게 조작하지 않으면 이것이 진짜인지 검증이 되지 않는다. 서양에서 논리학이 발전한 이유는? 없는것을 가지고 사유를 해야 하니까, 논리학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다. 철학 자체가 사유의 구조물이기 때문에 사유 전계의 치밀성이 항상 보장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동양의 사유는 사유의 치밀성 보다는 경험의 확실성, 경험의 소통 이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논리학이 필요하지 않는다. 동양과 서양을 비교 했을때 서양의 철학은 사유의 구조물이다. 사유가 경험위에 있다. 관념이 현상위에 있다. 이렇게 공자와 노자를 비교하는 이유는 노자나 공자를 모두다 경험의 철학자로 발굴했다.


서양 철학의 발전

서양 철학은 계속 발전을 거듭한다. 서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본질주의 철학이고, 실체관의 철학이다. 실체관 이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15?~BC 445?)는“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라고 말했다. 있는 것은 쪼개어지지 않는 하나로 있다. 서양 사람들이 생각할 때 ‘무엇이 존재한다.’ 는 것은 그것이 하나로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단일성으로 존재하고 이 단일성을 지탱해 주는 성질을 서양 사람들은 본질(本質)이라고 불렀다. 나에게 본질이 있다면 내 본질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면 않된다. 동물중에 영리한 동물이 원숭이라면 원숭에게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으면 않된다.

이성(理性)이라는 본질(本質)이 있다는 말은 인간에게만 있는 단일성의 기초이다. 단일성의 최초의 근원을 우리는 실체(實體)라고 한다. 서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가장 근원적인 어떤 토대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체, 실체, 기원 이런 단어들이 굉장히 긍정적인 단어가 되버린 것이다.  

실체관적 세계를 지탱해 주는 인간의 능력은 이성(理性) 이라고 한다. 서양의 사유(思惟)에서 정신과 육체를 본다면 우위는 정신에게 있다. 그것이 실체적 세계관을 지탱하는 지주의 이성(理性)이다. 이성과(理性) 감성(感性)을 비교 한다면 우위는 이성(理性)에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실체, 본질, 이성, 정신, 항상 위에 있다.

정신과 이성(理性)이라는 실체관이 극단적으로 끝까지 발전한 최고의 단계는 ‘헤겔’이란 사람이다. 정신의 왕국, 이성의 왕국으로 이 세계를 말한다. 헤겔에 의해 극을 이룬 다음에 하나의 저항이 일어난다. 포이에르바하(Feuerbach 1804~1872)는 헤겔을 향해서 직격탄을 날린다. “정신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우위에 있다.” 라고 말한다.

다윈(Darwin 1809~1882)이 진화론적 이론적 도식은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이성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이성은 인간에게만 있었고, 동물에게는 없었다. 동물과 인간은 해석하는 메카니즘이 다르다. 그런데 다윈이 진화론을 말하면서 인간과 동물을 하나의 틀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이성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같고 있던 사람들이 다윈은 죽일만큼 미운 존재였다. ‘어떻게 동물과 인간을 하나의 메카니즘 이라고 설명 하는가’ 분노했다. 동물과 인간을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인간의 육체성이 부각된다. 인간의 동물성이 부각된다. 그러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영역이 축소된다. 정신의 영역이 점점 축소된다. 포이에르바하의 다윈 이후의 서양 철학은 그렇게 된다. 이것이 현대가 열리는 모습이다.

우리가 서양 지성에서 현대가 열렸다. 하면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 프로이드, 칼 마르크스, 니체 가 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명료하고 관리 될 줄 알았는데 의식이라는 것이 사실 알고보니 및에 있는 성적 무의식이란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근원성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있다. “인간의 근원성은 이성이 아니라 욕망에 있다.” 프로이드 이전의 사람들은 이성이 잘못된 것이 욕망이라고 했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이 같고 있는 이성적 활동이라는 것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이 물질적으로 어느 조건속에 있는 것이 사람의 이성을 결정하드라.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라는 것이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결정하드라. “인간의 근원성은 그 사람의 물질적 조건에 있다.” 정치, 사상, 이성 이란 상부에 구조한 것들이 물질, 경제, 사회, 돈 등의 하부 구조에 의해 구축 되는 것이다. 질실은 물질에 있게 된다.

니체은 그 동안 서양 사람들은 이성이 우위에 있다고 보고 이성의 구조물을 지어놓고 거기에 신처럼 받들며 살았는데 니체가 볼 때 그것은 노예적 삶이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우주적 본질이란 것은 계산적인 이성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동물적 의지이다. “인간의 우주적 본성은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 의지다.” 


의지라는 것은 육체성이다. 현대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이 세계를 해석 하는데 현대는 사유를 통해서 보지 않고 경험의 세계로 내려 왔다는 것이다. “현대와 사유의 세계가 아닌 경험의 세계다.” 이성이 아니라고 욕망으로 내려 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에 있는 동물성을 회복해 냈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성, 물질성, 욕망, 동물성 이런 것들을 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라고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넘어오는 것이고, 정신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 오는 것이다. 집단이 아니라 개별로 넘어 온 것이고, 보편이 아니라 특수로 내려온 것이고, 본체가 아니라 현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현대는 외 이런가? 내가 볼때는 인간이 진화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믿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 개명(開明)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의 사조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 진화 단계가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