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EBS 제6강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by 파장 2014. 5. 22.



제6강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최진석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 대학교 졸업

북경대학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 철학박사  학위

하버드 객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장자철학’ 과 ‘노자신록’ 등이 있다.


공자는 인간이 이 세계에 책임있는 주인으로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인간 내부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천명(天命)을 극복하는 바탕으로 사용했다. 천명(天命)은 당시의 시대를 담을 수 없는 모순이 있었다. 그것은 천명(天命)안에 모순의 비의성, 임의성, 주관성 들어 있었다. 도(道)는 객관성, 투명성, 보편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공자는 인간의 공통의 본질을 바탕으로 해서 보편적 기준을 만들수 밖에 없었고, 그 기준은 결국 폭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자는 이것을 비판하고 들어왔다. 노자는 공자가 천명론(天命論)을 극복 하려는 시도을 높게 생각하지 안았다. 공자가 극복하려는 방향이 노자가 보기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노자는 공자와 다른 방향으로 객관성, 투명성, 보편성을 확보 하려는 길로 나갈려고 했다.


제1장


공자는 천명론(天命論)을 극복하고 도(道)를 건립하려는 인사이트(통찰력)를 인간 세계의 내면성에서 구했다. 인간의 내면성으로 부터 구했다면 주관성을 완벽하게 극복해서 객관성으로 나갈 수 있을까? 공자 사상에는 주관성을 완벽하게 벗어나기 힘든 구조를 같고 이었다. 공자의 사상에서 인간의 내면성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난다. 그래서 자연에서 인사이트(통찰력)를 구했다.


노자가 볼 때 자연에는 가치가 대입되지 않기 때문에 천도는 무친(天道無親)이다. “하늘의 도(道)는 더친하고 덜 친하게 여기는 것이 없다.” 고 말한다. 노자가 볼 때 자연에는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객관적인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춘추 전국시대 중국인들의 철학적 사명은 천명론(天命論)을 극복해서 도(道)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천명론(天命論)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대의 사명에 맞게 제대로 극복한 사람은 노자였다. 그래서 공자는 천명론(天命論) 극복의 노력을 인간의 내면성에서 찾다보니까 주관성을 완전히 벗어날수 없고 그래서 항상 가치론으로 나갈수 밖에 없었다.


노자는 인간이 만들려고 하는 질서를 인간의 내면성을 근거로 도(道)를 건립하면 주관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주관성은 완전히 극복할 수 없으면 가치론으로 나갈수 밖에 없다. 가치론으로 나갈수 밖에 없으면 기준이 설정될 수 밖에 없다. 기준이 설정되면 구분이 시작되고, 구분한 다음에는 다른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배제하게 된다. 결국 억압한다. 이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서 결국은 인간이 누리려고 했던 평화는 멀어지게 된다.


노자는 인간의 주관성을 완전히 벗어나서 자연의 객관성으로 나간다. 자연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본따서 인간이 그것을 따라서 움직여 보자.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만들려고 하는 꿈이 바로 노자의 꿈이었다. 이 자연의 질서는 누구에게나 관찰이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보편성, 투명성, 객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의 주관성이 잘 발휘되는 것을 부모와 자식간에서 발견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 공존하는 것을 가정이라 한다. 가정의 윤리를 사회의 윤리로 만들자는 것이다. 가정의 윤리는 사회 윤리로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 사상의 약점은 가정 윤리와 사회윤리가 다르다고 한다면 공자 사상은 힘을 일게된다. 노자는 자연의 질서는 인간의 질서로 만들려고 했다.


노자 사상의 약점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만든다고 하는데’ 자연과 인간은 다르다. 라고 하면 노자 사상을 취약해 진다. 


공자는 인간의 길은 갔고, 노자는 자연의 길은 갔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왜 그런가 하면 공자나 노자는 도(道)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천명(天命)을 극복하기 위해 도(道)를 추구했다. 천명(天命)을 극복 할려고 했다는 것은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넘어 갔다는 것이다. 공자와 노자는 인간의 길은 같다.


노자를 이야기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미지(형상)은 같게 된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긴 도포 자락을 날리며 유랑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천하를 장악하고 방식이 쓰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도덕경(道德經)을 생각할 때 공자는 문명적이고 노자는 반문명적이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공자나 노자는 문명적이다. 공자는 이런 문명을 지향했고, 노자는 저런 문명을 지향했다. 공자와 노자는 둘 다 교육의 방법은 달랐지만 적극적으로 교육을 주장 했다. 공자는 입세적(세상에 들어 갔고) 노자는 초월적이다. 는 더 큰 거짓말이다. 공자와 노자는 둘 다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노자가 어떤 방식의 문명을 지향했는가? 노자가 어떤 방식의 교육을 지향했는가? 노자는 어떤 방식의 꿈을 꿨는가?


제2장


노자의 사상을 이해할 때는 제일 중요한 것이 도덕경(道德經)의 제1장 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 고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
此兩者, 同出而異名 차양자, 동출이리명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동이지현, 현지우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名可名 非常道 명가명 비상도


“어떤 이름을 정의 내리거나 개념화 할 수 있으면 그 이름이 보여 주려고 하는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道)에서 명(名)은 이름, 가명(可名), 이름을 정의 내릴 수 있으면, 개념화할 수 있으면 그 이름의 의미를 채워줄 수 있으면 그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다. 명(名)이 왜? 철학적으로 중요 했을까? 중국 선진 철학에서 명실(名實) 實 실체할때, 실(實)은 실(實)과 명(名)의 관계 문제가 중요한 철학적 주제이다. 원래 붙어 있던 이름과 세상이 다르게 전개 되 버렸다. 소인(小人)인 의미 안에 피지배 계급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농사를 짓는 계급이 의미다. 군자(君子)는 지배 계급의 의미, 글 읽는 계급의 의미다.


그런데 이것이 역전되는 현상이 발생된다. 땅에서 일하지 않고 지배 계급이 된 소인이 생겨나고, 군자의 위치로 올라간 소인이 등장했다. 자기가 원래 같고 있던 이름과 자기의 실제 모습이 역전된 원인은 철기였다. 명(名)과 실(實)의 관계가 흐트러진 것이 바로 춘추 전국시대의 계급의 혼란이고, 정치 구조의 혼란이고, 세계관의 혼란이다.  춘추 전국시대 사람들에게는 명(名)과 실(實)이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다. 명(名)이, 이름(명칭)이 개념화 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사랑을 예를 들어 이야기 해보자.


아름다운 단어인 사랑으로 명(名), 이름을 설명해 보자. 나훈아의 ‘사랑’ 노래 가사에서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근대 언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이 뭐냐고? 의문사 What를 사용했다.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 이라고’ 정의을 내린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했는데 계속 웃음 씨앗만 남기고 있다면, 노래의 가사말과 비교하면 그것은 부족한 사랑이 된다. 여기서 나훈아의 ‘사랑’은 슬퍼야 된다. 눈물의 씨앗이어야 된다. 나는 눈물의 씨앗이라고 정의 하겠다는 것이다.나는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고 개념화 하겠다는 것이다. 


정의를 내린다. ‘define’ 이 말은 울타리를 친다는 말이다. 사랑이란 단어를 다른 단어와 격리시켜서 울타리를 쳐가지고 그것만 딱 들어 내는 것이 개념화 하는 일이고, 정의 내리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다른 것과 구분짓는 것이고, 울타리를 치는 것과 같다.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의미안으로 울타리를 쳐서 가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고 개념화 하면, 정의 내린다면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심수봉의 ‘사랑보다 더 슬픈것은 정(情) 이라고’ 는 문장 안에 사랑은 정의되어 있지 않는다. 이 말에는 ‘사랑이 슬프다는 전제를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슬프다고 정의내릴 수 도 있지만, 이 문장의 형식은 정의 내릴때의 문장은 아니다. 심수봉은 ‘사랑보다 더 슬픈것은 정(情)’ 이라고’ 이것은 사랑이 어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어떤 정의도 개입되어 있지 않는다. 사랑의 상태만 설명하고 있다.  그런 어떤 것이 사랑에 대해 더 절절한 느낌을 전해줄 수 있을까? 노자의 사상에 가까운 것은 심수봉의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서 나훈아는 정의를 내려서 접근 하려고 하고, 심수봉은 정의 내리지 않고 열린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를 놓고 거기서 사랑의 절절함을 느끼고 공유한다.


제3장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도(道)을 말할 수 있으면 진정한 도(道)가 아니다.”  도(道)는 공자나 노자나 당시 철학자들이 모두 건립하려 했던 사회질서이다. 도(道)는 현대에서 쓰이는 또 다른 의미는 ‘말하다’ 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가 태어나기 150~200년 정도 후에 쓰여진 책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중국 철학을 하거나 중국학을 할 때는 주장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주장을 했는데 어느날 유물이 발견되서 자기 주장과 다른 내용이 나올수 있다. 도덕경(道德經)의 판본은 제일 오래된것으로 같고 있는 것이 백서본(帛書本)이라는 판본이 있다. 1973년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마왕퇴라는 퇴적묘가 발굴이 되는데 거기에서 비단에 쓰여져 있는 도덕경 두 질이 발견된다. 그래서 이것을 노자의 백서본이라고 하고, 위에 언혀 있던 것은 백서갑본 및에 언쳐 있던 것을 백서 을본이라고 했다. 이 백서본은 진나라 말엽(진시왕 때), 한나라 초엽에 쓰여진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발굴인가 싶었는데, 20년 후인 1993년 중국 호북성 곽점촌(郭店村)에서 왕묘가 발견되었다. 왕묘 발굴당시 그 안에서 백서본보다 200년 앞선 도덕경(道德經)의 죽간본(竹簡本)이 발견된다. 죽간(竹簡)이란 대나무 조각을 앏게 쪼개서 청색을 제거한 다음에 기름칠을 하고 글자를 쓰고 다시 입힌것이다.


죽간본중에 도덕경의 일부가 발견됬다. 도덕경이 발결될 때 그 주의에서 유교에 관련된 죽간본들도 함께 발견이 된다. 거기에 존덕의(尊德義)라는 책이 발견된다. 존덕의(尊德義)라는 책안 귀절에 시이군자 인도지취선(是以君子 人道之取先) ‘그래서 군자는 인도를 우선시 한다.’ 라고 쓰여 있었다. 또 함께 발굴된 성자명출(性自命出)이란 유교경전안에 ‘유인도위가도야(唯人道爲可道也)’ 오직 인도(人道)만이 가도(可道)가 된다고 쓰여져 있었다. 


가도(可道)란 당시에 명사로 쓰였기 때문에 하나의 용어로 쓰였던 것 같고, 가도(可道)을 중심으로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공자를 따르는 유가(儒家)에서는 인도(人道)를 우선시 했고, 천도(天道)는 도가(道家) 쪽에서 우선시 했다. 인간의 질서를 우선시 했다. 인도(人道)을 우선시 한다. 이 인도(人道)는 가도(可道)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귀절을 해석할 때는 글자 자체로 해석하면 않되고, 당시 철학적 논쟁이 어떻게 이루워져 있는가?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 하면 쉽게 된다. 


죽간본(竹簡本)의 성자명출(性自命出)과 존덕의(尊德義) 이 두책을 근거로 볼때 유가사상을 주장하는 군자들은 천도(天道), 즉 자연의 도(道)가 아니라 인도(人道)를 우선시 했고 그 인도(人道)는 가도(可道)의 형식으로 이루워져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들어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에서 도(道)가 가도(可道)의 형식을 띠면 진짜 도(道)가 아니다. 도(道)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


당시 도(道)를 거립할 때 노자는 천도(天道), 즉 자연의 입장으로 갈려고 했고, 공자는 인간의 내면성에서 발굴한 근거를 가지고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인도(人道) 방향으로 간다.


인도(人道)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도(可道) 이고 가명(可名) 이다.

천도(天道)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 상도(常道) 이고 상명(常名) 이다.


가도(可道)는 말할 수 있는 도(道)다. 언어화 할 수 있는 도(道)다. 공자의 사상은 본질을 긍정한다. 그 본질은 인(仁)이다. 본질을 긍정 한다는 것은 구분을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에서 구분은 긍정되는 행위이다. 개념, 이름은 명(名)이 맥락에서 어떤 것을 정의 내리는 기능을 한다. 정의 내린다는 것은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구분하는 것이다. 개념화 한다. 정의 내린다. 하면은 구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언어 친화적이고, 개념 친화적이고, 구분 친화적이다. 그러면 우리는 공자는 언어를 긍정하는 사람이구나! 구분을 긍정 하는구나! 정의 내리는 것을 아주 좋아 하겠구나! 라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본질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이든 그 철학이 본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구분하고, 정의 내리고, 긍정하고 그래서 당연히 언어 친화적이다. 군자는 人道를 우선시 하고 이 人道가 可道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 이 可道는 언어 친화적이다. 구분을 긍정하는 것이다. 


“도(道)을 말할 수 있으면 진정한 도(道)가 아니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 친화적이고 구분한다는 것이다.” 


아마 노자는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천명(天命)을 극복해서 도(道)을 건립하고 있는데 공자처럼 가도(可道)의 형식을 띠면은 진짜 도(道)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이름도 정의 내리거나 개념화 해버리면 그건 이름이 아니지 않습니까?”


노자는 여기에 ‘What’ 이라는 의문사를 쓸 이유가 없었다. 왜냐면 본질을 긍정하는 사람들에게만 ‘What’ 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자에게는 ‘How’ , 어떻게가 중요했다. 


제3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무(無)와 명(名), 이렇게 설명한다. ‘천지의 시작이다’ 노자의 도덕경을 대부분 사람들은 천지는 무(無)에서 부터 출발했다. 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노자의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철학도 그 안에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개념들은 그 시대의 사용법으로 읽어야 한다.


이때 시(始)라는 개념은 우리말로 비롯되다, 없던것이 생기는 것, 이 아니라, 의지해서 같이 간다.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시(始)는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한문사전에는 여(女)지(之)초(初)야(也)라고, 여자의 처음 상태로 풀이하고 있다. 여자의 처음 상태 초(初)자를 분해해서 다시보면 옷의(衣)와 칼도(刀)가 합져진 모양이다. 


옷감을 가위로 자른다고 할때 힘을 주어서 아주 조금 잘랐다면 이것은 시작이 지난것이 된다. 작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작의 시점을 만나기 위해서 가위에 힘을 주어 잘르려다가 옷감에 자국만 남았다면 이것은 이것은 시작이 된 것은 아니다. 옷감이 조금이라도 잘렸으면 이것은 시작을 지나 버린거고, 하나도 잘려지지 않았다면 시작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시작은 어디에 있을까? 시작은 없다. 이것이 무(無)이다. 


시작 이라는 것은 이세계에 구체적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느다. 그런데 이 시작이라는 사건이 없으면 이 자르기라는 운동은 일어날 수 도 없다. 이 세계에는 자기의 구체적인 모습은 없지만 이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영역이 공간, 빈 공간이다. 우리 몸 안에는 텅 빈 공간들이 존재한다. 그 공간들이 있어서 우리 몸은 활동하게 된다. 움직이게 된다. 공간 같은거, 출발 같은것, 시작 같은것, 자기 존재성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것들이 가능해지는 영역, 그것을 노자는 ‘무(無)’라고 했다.


유(有) 명만물지모(名萬物之母), 만물의 어머니를 가르킨다. 만물의 어머니란? 유(有)가 만물을 낳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잘못된 해석이다. 동양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낳은 사람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자식을 아버지가 낳는다고 보고, 어머니는 기른다고 본다. 아버지는 낳고 어머니는 기른다는 것이 동양 사람의 생각이다. 그래서 모(母)라는 글자는 원래 어머니가 자식을 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형상화 해 놓은 글자이다.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 구체적인 것들을 어머니가 자식을 안듯이 안아서 그것을 유(有)라고 이름 붙인다.


제4장


무(無)는 우리가 익숙한 세계관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 신체에 있는 빈 공간처럼 존재를 무(無)라고 본다. 눈에 보이는 모든것을 이름 붙여서 유(有)라고 한다.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 고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


“언제나 무(無) 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고 하고, 언제나 유(有) 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고 한다.”


고(故), 그러므로 상무(常無), 항상 무(無)는 욕(欲) ~을 하고 싶다, 는 말이다. 그것으로서 무(無)를 가지고서 관(觀) 보다, 보이다, 보여주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묘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묘(妙)라는 글자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알기 어려운게 여자의 마음이다. 그 여자들 중에서 더 알기 어려운 여자는 묘(妙), 여자인데 이것은 젊은 여자다.젊은 여자의 마음은 신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묘한 상태를 이렇게 만들었다.


무(無)는 자기는 없으면서 다른 것이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영역, 시작과 출발이라는 개념이 묘하다. 그래서 그 묘한 상태를 보여 줄려고 무(無)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유(有)는 그것으로써 그 묘(妙)한 상태를 보여주려고 한다. 묘(妙)는 경계, 실루엣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것은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꺼번에 보여주기 위해서 유(有)자로 사용한다. 노자는 이 세계를 설명하는데 有와 無 두가지의 창을 사용한다. 노자가 볼 때 우리 인간의 몸은 유(有)와 무(無)의 관계로 되어 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차양자 동출이리명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한다. 이 두가지는 유(有)와 무(無)이다. 동출이리명(同出而異名)는 이 두가지는 같이 나와있지만 유(有)와 무(無)는 우리가 머리속으로 생각할 때 유(有)와 무(無)가 나오지 않는다. 노자는 유(有)와 무(無)는 존재론 적으로 높이에 차이가 없다. 순차적으로 차이가 없다. 이 두가지는 같이 나와있다. 그런데 이름을 달리한다. 이 세계를 보여주는 영역을 달리한다.


同謂之玄, 玄之又玄 ,玄之又玄, 동이지현, 현지우현, 현지우현


같이 있다는 것은 현묘 하다고 한다. 참 이것은 신기한 일이다., 현모하고 현묘하다.(신기하고 신기하다.)


衆妙之門 중묘지문


‘모든 묘한 것들이 발생되어 나오는 문이다.’ 라고 해석 하면 틀린 말이다. 노자는 유(有)와 무(無)의 관계로 이 세계를 설명한다. 어떤것도 어디에서 무엇이 나오는 세계는 없다. 문(門)은 발생되어서 나온다. 문은 들고 나오는 공간이다. 들어가고 나오는 일이 교차하는 지점이 문(門)이다. 중묘지문(衆妙之門)이란? 모든 것이 다 죽고 나고 들락들락하는 문(門)이다. 


노자는 이렇게 본다. 무(無)계열과 유(有)계열의 두 대립면에 공존으로 되어 있다. 이 두 대립면의 긴장과 공존이 이 세계를 만들고 있다. 죽는것도 유(有)무(無) 관계이고, 태어나는 것도 유(有)무(無) 관계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다 대립되는 유(有)와 무(無)의 계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 이 긴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가? 그대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중묘(衆妙), 유(有)와 무(無)의 대립 긴장 위에서 벌어진다.


노자는 본질을 긍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본성이 있다는 말은 노자에게 틀린 말이다. 도덕경안에 성(性)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 두대립 면의 긴장과 상호의존 관계로 이세계가 이루워져 있다는 노자의 세계관이 도덕경안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설명하는 뿌리다. 여기에 노자의 현대성이 들어있는 부분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