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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국정원 스캔들의 역사

by 파장 2013. 8. 6.





국정원 스캔들의 역사 


한성훈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정치조직, 중앙정보부


1969년 연초부터 3선 개헌이 정치쟁점으로 떠올랐다. 그해 2월말 임문준은 부친과 친척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에 엮였다. 그의 아버지 임명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재판 도중 옥사했고 그는 21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은 몸에 국한하지 않으며 피해자가 살아있는 시간 동안 정신을 말살해 간다. 이것으로부터 몸과 마음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할 수 있다거나 고통이 덜해지는 것이 아니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들은 김종필이 주동이 되어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 5월 28일 국가재건최고회 내무위원회 제1호 안건이 중앙정보부설치안임을 감안하면 이 조직이 어떤 정치적인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61년 민간인을 사찰하는 ‘요시찰인업무조정규정’이 제정되어 중앙정보부가 요시찰인 사찰업무를 기획조정·감독했다. 정권을 위한 보위조직이었고, 평범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기술은 고문이었다. 흔히 중정, 안기부, 국정원으로 불리는 이 조직은 정통성이 약한 정부에서 또는 민주주의가 취약한 시기에 가장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정치과정을 좌우하는 정보기관이었던 셈이다. 



2007년 10월 24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대표적 조작 의혹 사건인 동베를린(동백림)사건,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왼쪽부터)등에 대한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주 민주화운동이 막을 내린 1980년 7월 초순(음력) 한화자는 시어머니, 남편(김정인), 시동생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진도간첩단사건’이 조작되는 순간이었다. 김정인은 1985년 10월 31일 “한 10년 지나면 나갈 수 있을 거”라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사형이 집행된 주검으로 아내에게 돌아왔다. 53일간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한화자는 “‘창자가 끊어지고 애간장이 녹아날 정도로 억울’했지만, 다섯 아이들에게 남편의 죽음을 도저히 설명할 방법도 능력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이후 그녀는 간첩으로 몰린 것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사촌 오빠가 입고 있는 까만 경찰복이나 우체부만 와도 몸을 떨었다. 


군사독재 시절 중앙정보부는 체제에 비판적인 인사들에 대한 테러·납치·고문을 직접적으로 자행했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본 도쿄에서 납치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외교문제를 일으켰고 ‘인혁당 재건위·민청학련 사건’과 같은 용공 조작도 일삼았다. 이 사건들은 박정희 정권이 1974년 유신체제 출범 직후 일어난 학생들의 거센 저항운동을 북한이나 조총련 등의 배후조정을 받는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 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검찰, 사법부까지 동원해 탄압했다. 검사와 판사까지 폭력행사에 동원된 이런 경우는 법의 미명 하에 불법을 판결하는 최악의 범죄이자 ‘정치재판’이었다. 군사정권은 정치권력의 유지와 안정을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등에 의존했고 이것을 굳건히 떠받친 것이 중앙정보부였다. 이 정권에서 장기적이고 빈번한 국민의 기본권 제한은 ‘법률적 불법’에 의한 것이었다. 

 

사과가 필요한 국가정보원

 

1982년 반미시위가 처음으로 대학에 등장했고 국가안전기획부는 간첩단 사건을 여러 건 발표했다. 그해 12월 김장호는 임신한 아내를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들이 그를 남산으로 데려가 50여 일 동안 온갖 고문을 가했고, 그는 간첩이 되어 16년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한 뒤 2005년까지 보안관찰자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아내는 “차라리 살인자 같으면 용서할 수 있지만, 간첩은 안된다”며 그의 곁을 떠났다. 1980년대 초반은 재일동포와 재일한인들에 대한 국가안전기획부의 간첩공작이 비일비재했다. 


1987년 4월 안기부가 개입한 대표적인 정치공작사건 일명 ‘용팔이 사건’. 폭력배들이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를 방해했다.

 

다양한 정치공작을 이어온 안기부는 1987년 폭력배를 동원해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한 ‘용팔이 사건’을 사주했다. 또한 동거남에게 살해당한 여성을 간첩으로 둔갑시킨 ‘수지 킴 사건’도 안기부 공작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문민정부 시절인 1997년 안기부는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막으려고 “김대중 후보가 김정일한테 돈을 받았다”라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북풍사건’을 일으켰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보수층 유권자를 자극할 목적으로 북한군에 총격을 유도한 ‘총풍사건’도 공작했다.


 선거와 정당정치에 개입한 것은 말 할 나위도 없고 정보기관이 망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개인은 물론이고 집안의 일가친척까지 그야말로 일족을 패가시킨 게 한국의 정보기관이었다. 지난 50여 년간의 국정원 역사를 돌아보면 위정자가 정보기관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성격이 달라졌다. 실제로 자행되었던 정치공작과 권력남용, 인권침해 사례들을 짚어보면 최고의 정보기관이 공작과 고문을 일삼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국민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국가 위의 국가’로 군림한 채 최고 정보기관으로서 국민과 국가에 봉사하기 보다는 독재정권의 안보를 위해 일했다고 고백했다.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정보기관은 정치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인력과 예산을 낭비했으며 정권유지를 위해 사회 각 분야에 위력을 행사했다. 이 뿐만 아니라 행정부·입법부·사법부 업무에 월권으로 개입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했다.

 

근대국가는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복지 차원에서 관리와 감시제도를 도입했다. 통제와 복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국가가 일상생활을 관통하는 ‘이면(other side)’에 개인과 공동체가 존재한다. 최근 과거에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국정원이 피해자에게 사과를 했다는 소식을 접해보지 못했다. 잘못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민을 사찰하고 고문하고, 정치적 의제에 개입하는 일들이 과거에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도 일어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19대 대통령 선거에 온라인 댓글을 달고 남북정상회담 회의록(NLL 관련)을 무단으로 공개했다. 한국의 최고 정보기관이 아주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아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사건의 피해자 증언은 진실의힘,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마이데이 맘풀이 자료집>에서 인용했습니다. 

 

한성훈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인권과 민주주의, 전쟁과 남북한 비교, 북한 사회사와 동아시아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 『전쟁과 인민』(돌베개, 2012), 논문 <‘사찰’국가의 인권침해와 생활세계의 식민화> 등이 있으며 한국전쟁과 중대한 인권침해에 관한 책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참여연대 발간 참여사회 2013년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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