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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그림・전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또 다른 모습

by 파장 2020. 12. 8.

그림으로 세상읽기

미술 에세이스트 선동기 씨는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카페’의 주인장으로 잘 알려져 있고, 『처음 만나는 그림』 『나를 위한 하루 그림』 『그림 속 소녀의 웃음이 내 마음에』 등의 미술 관련 대중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또 다른 모습

가장 뜨겁게 살았을 세상은 차가웠고 그가 차가운 몸이 되었을 세상은 그로 인해 뜨거웠던 사람, 고흐의 이런 모습을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고흐는 경보 선수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고흐가 구필 화랑의 영국 지점에서 근무할 이야기입니다. 훗날 동생 테오의 아내 요한나가 증언한 바로는 고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였지요. 가끔 영국에 있는 여동생을 만나러 가곤 했는데, 런던에서 여동생이 살고 있는 람스게이트까지는 160km 넘는 거리였습니다. 길을 고흐는 3일만에 주파합니다. 하루에 50km 이상 걸은 셈입니다. 걸을 것도 아니지만 정말 빠른 걸음 아닌가요?

런던 하숙집이 있는 브릭스톤에서 사무실이 있는 코벤트가든까지도 걸어 다녔는데 거리가 6.4km 정도입니다.  정도 거리를 걷는다면 얼마 정도 걸리시는지요? 고흐는 45 걸렸습니다. 고흐는 신발을 주제로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강의 별의 빛나는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그는 죽음의 관문으로 향했습니다.

런던 하숙집이 있는 브릭스톤에서 사무실이 있는 코벤트가든까지도 걸어 다녔는데 거리가 6.4km 정도입니다.  정도 거리를 걷는다면 얼마 정도 걸리시는지요? 고흐는 45 걸렸습니다. 고흐는 신발을 주제로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강의 별의 빛나는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그는 죽음의 관문으로 향했습니다.

신발 Shoes 1888 onc 45.7x55.2ⓒMetropolitan Museum of Art

1877, 영국에서 교회 일을 하고 있던 고흐는 부모님과 센트 숙부의 노력으로 도르트레히트에 있는 서점의 직원으로 취직합니다. 그런데 무렵 고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합니다.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때로는 새벽까지 서점에 머물며 네덜란드 성경을 독일어와 불어 그리고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손님이 오던말던 구석에 앉아 번역을 하고 있는 그를 주인이 좋아할 없었습니다. 당시 룸메이트는고흐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음식도 아주 검소하게 먹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수도자 같았고 종교에 독실해진 그는 암스테르담 대학교 신학과 입학을 목표로 암스테르담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물론 대학 시험에 실패했는데, 그가 원했던 대로 신학과에 입학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까요?

1885년 4월 9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20.7cm x 26.4cmⓒVan Gogh Museum

편지 쓰기 대왕고흐가 남긴 편지는 대략 770통입니다. 668통의 편지를 테오에게, 여동생과 친구들에게 102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동생 테오는 형의 편지를 대부분 보관했습니다. 테오가 죽고 나서 그의 아내 요안나가 1906년과 1913년에 편지 일부를 책으로 펴냈고 1914년에 대부분의 편지를 책으로 출간해서 우리는 고흐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편지에는 날짜가 없지만, 미술사학자들은 그가 남긴 편지를 어려움 없이 그의 연대기에 넣을 있었습니다. 테오가 고흐에게 보낸 편지는 40통이 남아 있습니다.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는 고흐의 편지들을 읽다 보면 문학을 했어도 성공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슬픔 Sorrow 1882 pencil and wash on paper 46.7cm x 30.2cmⓒ개인소장

고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4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번째 여인은 외젠 로이어인데 구필 화랑의 런던 지점에서 근무할  고흐는 목사의 미망인 집에서 살고 있었고    외젠은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스무  고흐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고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숨겨둔 약혼자가 있다면서 고흐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때까지 수입도 좋았고 일도 잘했던 고흐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이후 직장 일에도 관심이 없어진 그는 종교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번째 여인은 고흐의 스트리커 이모부의 케이였습니다. 고흐보다 일곱 살이 많은 그녀는 여덟 살짜리 아들을 과부였습니다. 고흐의 집에 놀러 머물고 있는 그녀를 사랑하게 고흐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에게서 돌아 것은 차가운 거절이었습니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 케이에게 고흐는 계속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고흐는 직접 암스테르담에 있는 이모부 집으로 찾아 갑니다. 식구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 나타난 고흐는 그녀를 불러 것을 요구했지만 식구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고흐는 호롱불에 자신의 손을 집어 넣고 케이가 때까지 손을 빼지 않겠다고 외칩니다. 결과는? 케이를 부르러 가기도 전에 고흐는 졸도하고 말았습니다. 일이 있고 나서 고흐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겪게 됩니다.

벽난로 옆 바닥에 앉아 시가를 들고 있는 시엔 Sien with a cigar, sitting on the floor beside the fireplace 1882 pencil, black chalk, pen and brush 45.5cm x 47cm ⓒ크뢸러뮐러 미술관

세 번째 여인은 시엔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매춘부,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입니다. 고흐는 그녀를 크리스틴이라고 불렀는데, 고흐보다는 세 살이 많았고 고흐를 만날 당시 임신 중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매독 환자였던 그녀에게는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고흐는 그 사실을 몰랐지요, ​고흐는 시엔이라는 여인을 사랑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매춘부를 사랑한다고 봤습니다. 시엔과 살림을 차렸지만 고흐의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시엔이 다시 몸을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됐고 1883년 9월, 고흐는 시엔과 아이들을 놔두고 후커벤으로 떠납니다. 이후 한동안 고흐는 그녀와 아이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시엔은 훗날 재봉사와 세탁부로 일을 하다가 1904년, 스켈트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합니다. 

마지막 여인은 마고 베게만입니다. 고흐가 뉘넨의 부모님 댁에 있을 이웃집 여인 마고는 다리를 다쳐 병석에 있는 어머니에게 바느질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고는 고흐보다 살이 많았지만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양쪽 집안의 반대가 있자 마고는 음독 자살을 시도합니다. 고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동네에 소문 나는 것을 막고자 그녀는 유트레히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뒤로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훗날 고흐는 조금 일찍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조금 일찍 그녀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면, 고흐의 정신병이 깊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요. 고흐가 가정을 이루었다면 그의 작품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화가가 되기는 하였을까요? 이런 상상은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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