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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사진으로 보는 해방의 순간

by 파장 2020. 12. 10.

사진으로 보는 8∙15 해방의 순간

1945년 8월 17일, 해방의 기쁨, 꿈에도 그리던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쏱아져 나왔다.

1945 8 15, 해방은 꿈같이 찾아왔지만, 해방된 모르는 한국인이 많았다. 15 오전, 서울 시내 여러 곳에본일 정오 중대 방송, 일억 국민 필청必聽이라고 쓰인 벽보가 붙었지만, 그것을 유심히 사람은 많지 않았다. 12 일왕의 방송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어려웠고, 당시 라디오를 가진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

해방을 맞이한 소년의 감격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 명을 넘었는데, 이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조선독립만세란 걸개그림을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다. 감추어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알고 후에 급조한 것인지는 몰라도 일왕 담화 시간 후에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없었다. 죽은 듯이 일제 정치를 인내해온, 바보스럽게만 조선인들에게 영원히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엄연히 살아 있다는 역사의 증언을 나는 순간 바로서 알아차리게 되었다. 나는 여러 날동안 잠을 잊은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었다.  -임명방, ‘내가 겪은 해방’ <황해문화> 1994 겨울

1945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진행된 항복 조인식에서 아베 노부유키 준장이 미군이 보는 앞에서 항복 서명을 하고 있다.

1945 9 9 오후 4, 조선 총독부 1회의실에서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24군단의 하지 중장과 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 제독 미군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다. 이미 1주일 동경만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이 있었지만, 이날 항복문서의 효력은 38 이남에만 적용된다는 것이 달랐다.

1945 9월, 미보병 7사단 32연대가 조선총독부 앞에 있는 국기 게양대에 성조기를 울리고 있다.
1945 9월, 미보병 7사단 32연대가 조선총독부 앞에 있는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있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 조인식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 총독부 앞뜰에서는 8 15 일왕의 항복 선언 뒤에도 23일간이나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한반도의 통치권이 일본 제국주의의 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1945 9 초부터 미군은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장갑차을 앞세운 미군이 서울 시내에 들어오고 있다.
1945년 9월, 한국 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한국에 진주한 미 보병7사단 32연대가 서울역에 도착해 서울로 들어오고 있다.

일제가 땅에서 사라진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민족은 충분히 기뻤을 뿐이다. 38 이북이든 이남이든 기쁨의 강도는 같았다. 우리 민족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고 일본군을 내몰고 대신 진주해 해방군인 미군을 환영했다.

1945년, 서울역앞 미군 환영 시민 인파의 모습
1945년 9월, 부녀자들이 성조기를 들고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진주한 미 연합군 환영하면서 행진
1945년 9월, 서울시내 행진하는 미군
1945년 9월, 서울시내 주둔한 미군 헌병들과 시민들
1945년,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식. 주요 정부인사들 위로 경계를 하고 있는 미군 호위병이 눈길을 끈다.

8 15일은 한국인들에게 일제의 강제점령에서 해방(解放) 되는날 이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2차대전 종전(終戰)이기도 하다. 우리의 해방이 세계 2차대전이라는 전쟁의 결과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945년 10월, 미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군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있다.
1945년 10월, 부산항에서 무장해제된 일본군이 미군에 의해 이동하고 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항에서 긴 행렬을 지어 배를 기다린 일본인들을 태운 배가 조선을 떠나고 있다. 부산항의 일본군 철 수선 승천인원 2천명이지만 4천명씩 태워 1일 1회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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