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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십자군 전쟁 -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1

by 파장 2015. 4. 19.



십자군 전쟁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1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타리 


지난 천년간 중동의 성지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세계 3대 종교가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켜 왔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것은 11세기 말부터 시작해 200년간 계속된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은 고작 수백 마일 거리 밖에 않되는 작은 영토인 예루살렘 이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성스러운 전쟁, 하지만 그것을 목격한 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입장에서 각각 서술한 역사 기록들은 위대한 영웅들의 무용담과 전투 기록들이 남아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시작

세상의 모든 도시 중 예루살렘 만큼 험난한 과거와 미례를 지닌 곳은 없을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헤롯왕과 솔로몬왕의 위대한 신전이 있는 곳, 이슬람교 에서는 무함아드가 천국으로 승천 했던 곳, 기독교에서는 그들의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곳, 그 후 4세기 동안 예루살렘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의 도시로써 기독교를 옹호하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7세기 들어 예루살렘은 새로운 세력인 이슬람의 차지가 됐다.


그로부터 400년 후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유럽 전역에서 6만 여명의 전사들이 모여 전쟁을 준비한다. 지도자중 한 명인 보두앵 장군과 고드프루아 백작은 에루살렘을 다시 하느님의 도시로 만들게 위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3천 마일의 거리를 지나는 3년간의 십자군 원정 길에 오른다. 고두프루아는 단순한 무사가 아니었다. 카톨릭 교회의 열열한 후원자이며 신상심이 매우 깊은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드는 방법은 단 한가지였다. 그것은 십자군 전쟁이 영혼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신앙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을 대체적으로 아우루는 프랑크인들은 이슬람 세계에서는 지금까지도 이슬람 문명을 파괴할려고 침입한 야만인 이라고 인식되어 있다. 때문에 십자군이란 단어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십자군 전사들은 무엇을 위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험난한 원정길을 선택 했던 것을까? 


극심한 기아와 잦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은 저주 받는 땅이 되버렸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찾을 기회가 필요했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1세기 중세로 돌아 간다면 이곳이 얼마나 시끄러운 세상이었는지 보고 놀라게 될것이다. 조직화된 중앙 정부도 없었고 프랑스와 스페인 같은 대제국도 건설되기 전 이었다. 따라서 크고 작은 성주들이 뺏고 뺏기는 전쟁이 빈번히 벌어졌다.  


이런 혼란스러운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한 학식있는 학자의 기록이 있다. 카네기의 대주교이자 왕의 친구인 ‘기윰 드 티레’ 는 “세상에 모든 믿음이 살아져 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정의는 이미 그 빛을 잃었으며 온 나라가 폭력으로 물들고 있다. 모든 세상일에는 사기와 배신의 음모가 서려 있다. 모든 미덕은 산산조각 나고, 이제는 쓸모 없는 가치가 되었다.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한다.” 라고 기록 한다.


이런 무정부 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것은 교회 뿐이었다. 11세기 서구 유럽은 기독교 신앙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중세 시대는 종교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그들이 종교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세속적인 현대인들은 상상이 불가능한 정도다. 당시 사람들은 언제나 죄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 인간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죄악으로 간주 되었고, 숨쉬는 것 자체도 죄악일 수 있었다. 그 죄악은 신앙으로 살 수 있었지만 교회는 유럽 사회의 전반에 영향을 줄만한 정치적 힘이 부족 했다.


유럽의 세속적인 통치 다툼에서 밀려난 교황은 정치권 밖으로 밀려 났지만 1088년 로마에 입성한 새로운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는 달랐다. 그는 정치, 사회, 종교적 정세를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고, 모든 상황을 이용해 결과를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교황은 카톨릭 교회를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세우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그 기도의 답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오랜 종교적 경쟁자로 부터 날아들었다. 1095년 지원을 요청한는 소식이 교황 우루바누스 2세 에게 전해졌다. 교왕청의 오랜 경쟁자이자, 그리스 정교회의 정치적 수장인 비잔트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콘스탄티누스 황궁으로 부터 보내온 전갈이었다.


당시 이슬람 지배 세력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생겨나 영토를 찾아 중동까지 밀고 내래온 셀주크 투르크족 이었다. 수 만의 투루크의 군사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들은 페르시아, 팔레스티나, 시리아 등 이슬람 지역을 점령하고 마침내 에루살렘까지 손에 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북쪽으로 돌려 비잔트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문앞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권력 균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비잔트 제국은 징세(徵稅)와 징병(徵兵)할 수 있는 지역까지 잃고 점점 세력을 잃고 있었다.


1095년 황제 알레시우스 1세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반격을 계획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 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종교적 형제인 교황에게 투루크족을 궁지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소수 정예 기사들을 보내 줄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교황 우루바누스 2세는 이것을 계기로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기회로 삼을 생각을 품게 되었다. 당시의 교황들은 정치적 성격들이 매우 강했다. 지금의 교황들도 조금 정치에 관여를 하고 있지만 중세 시대와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 당시 교황들은 음모, 조작, 책동 등 각종 권모술수(權謀術數) 능한 정치가 들이었다. 이것을 교회의 정치가들 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교황 우루바누스 2세는 비잔트 제국의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십자군을 모집해 이슬람과 성전을 일으켜 교황권을 강화하고 로마를 세계 권력의 중심지로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교황이 십자군을 일으킨데에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서유럽의 세속적인 통치자에게 넘어갔던 기사단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 기사들의 무력이 교회를 노리는 위험을 없애는 것 이었고, 또한 이단자들을 몰아내고 성지를 기독교인들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1095년 11월 프랑스 크레르몽 에서는 교황 우루바누스 2세의 가슴을 울리는 연설이 울려 퍼졌다. 교황은 왕자, 성직자, 기사, 일반인 모두 카톨릭 교회의 깃발 아래 모두 모여 전쟁에 나갈것을 촉구 했다. 아마도 당시 교황은 무척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 였던 것 같다. 그의 연설을 듣던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연설장 에는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교황의 연설에는 교묘한 종교적 선동이 숨어 있었다. 이슬람 세력이 성지 순례자들에게 가한 잔혹 행위를 과장해서 들려주면서 트루그족을 악마로 귀정하고 십자군 전쟁이 두 신앙간의 최후의 전쟁이 될거라고 강조했다.


기윰 드 티레의 당시 기록에는 “교황의 말씀은 마치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렸고, 청중은 모두 신의 계시에 귀를 기울렸다. 우리 신앙의 요람이며 주님의 고향이자 부호의 원천인 그곳이 주님을 받들지 않는 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오랜 세월 사악한 믿음을 계승한 이슬람 교도들이 우리 그리스도가 몸을 누우신 성스러운 곳에서 폭정을 일삼고 있다.우리의 성지를 짐승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성서에서 살해되고, 처녀들은 매춘과 죽음중 선택을 강요 받았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감정적으로 격양된 상태였을 것이다. 교황 우루바누스 2세가 성전 참여를 촉구하자, 사람들은 십자가를 받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옷을 찢여 만든 십자가를 가슴에 붙혀 그들의 기독교 형제들을 구하러 동방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드높은 명성과 영광을 얻을수 있다는 기대로 수만명의 남자와 여자, 온 가족 혹은 마을 전체가 교황 우르바누스 십자군에 가담했다. 


예루살렘 으로의 여정을 생생히 기록한 한 십자군 병사가 말 했듯이 그들에게 부를 얻을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이 있었다. “교황이 말씀 하셨다. 구원을 원하는 자는 망설이지 말고 성전에 기대어 울어라. 부유하지 않는 자에게도 성스러운 자비가 낼릴 것 이다. 또한 사악한 이들로 부터 성묘를 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손수 지배하라.”


순수한 종교와 사상 만으로는 동기부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십자군에 가담한 사람들은 엄청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동은 세계 모든 상인들이 통과하는 상업의 중심지였고, 십자군들은 그런 돈을 노리고 참전했을 것이다. 엄청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을수 있다는 유혹은 시작에 불과 했다. 십자군 원정대에게는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주어졌다. 교황 우루바누스2세가 십자군에 영혼을 바친 자들에게는 천국으로 가는 타켓을 주겠다고 말한것이다.


“형제와 친척을 상대로 싸웠던 자들에게 야만인들과 싸울수 있는 성스러운 기회를 주겠다. 세속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기독교를 구원할 목적으로 십자군의 원정길에 오르는 자는 누구나 그가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사면 받을수 있다.”

- 기윰 드 티레의 기록중(中)

 

교황 우루바누스 2세의 계략은 적중했다. 서유럽 기사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거다. 그는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속죄 받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했다. 전쟁에 나가면 영혼을 구원 받을 수 있고 십자군에 지원하면 죄를 사면받고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교황은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교리조차 변경했다. 그는 성전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여섯번째 계율은 이단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이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며 내가 전사들의 영혼을 구할거라 말했다. 그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어떤 결과를 초래 할 지 모르는 위험한 발언 이었다. 어쩌든 결과적으로 이교도들에 대한 분노가 서유럽 전역에서 끓어 올랐다. 또한 로마 카톨릭 이외의 모든 비 기독교 신자들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기도 전에 교황의 설교에 자극 받은 광신도들은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과신도들은 자신들과 신앙이 다른 기독교들을 모두 이단자라 생각했다. 유대인에 대한 순례자들의 분노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독교에 반하는 적이라며 유대인들을 마구 학살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집과 교회당을 파괴하고 그곳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나누워 가졌다.”

- 기윰 드 티레의 기록중(中)


결국 유럽 전역에서 수천명의 유대인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학살되었다. 결국 죄 없는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 1차 십자군 원정의 특징이 되어 버렸다.


비잔틴 제국을 너머 예루살렘으로

1096년 가을, 교황 우루바누스 2세의 연설이 있은지 1년 만에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군대가 그들의 기독교 형제의 나라를 구하고 이슬람으로 부터 성지(聖地)를 되찾기 위한 3천 마일의 원정에길에 나섰다. 북부 유럽의 지도자는 고드프루와 드 뷔용 이었는데 그는 원정때 성직자를 대동할 정도로 매우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십자군 원정 이전에도 유능한 장군으로 존경 받고있었다. 고드프루와 옆에는 그의 동생 보우댕 드 블로뉴 백작이 있었다.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보우댕은 한 때 성직자의 길을 걸었지만 여색과 전쟁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했다.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개인적으로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힌 돈으로 조성되었다. 원정에 필요한 돈은 당시의 6년 정도의 수입에 해당한다. 부유한 귀족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원정에 참가 하기도 했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들의 아내들 역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대부분 남편을 따라 나섰다. 말하자면 한 도시나 마을 전체가 예루 살렘을 향해 떠났다. 원정길에 그 많은 사람들의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일부는 약탈하기도 했겠지만 원칙적으로 지나는 길에 지방 농부들로 부터 비싼 값으로 식량을 구입했을 거라고 생각이든다.


6개월 동안 고드푸르와의 대군은 동부유럽의 강과 산맥을 넘어 천마일을 진군했다. 그들은 마침내 다른 지역에서 출발한 십자군 병력과 합류 지점인 동방 정교회의 심장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지금의 이스탄불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은 현재 터키의 최대의 공업도시 이자 대표적인 이슬람 도시다. 하지만 900년 전에는 유럽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마지막 기독교 도시로 십자군은 이곳 보스포로스 해역을 넘어 이슬람 영토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바로 이곳에 동방 정교회의 본거지 성 소피아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번쩍이는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된 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의 번영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십자군은 성 소피아 성당을 가까이에서 볼 수가 없었다. 9미터 높이의 두꺼운 돌벽이 도시를 따라 10마일 이상 2중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지가 도시를 방문하면 황제가 성문을 열어 그를 도시안으로 맞아 들었으나 십자군 원정대 앞에서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열개의 금문은 마치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세개의 아치로 이루워진 문으로 꼭대기에는 네개의 청동 코끼리상이 있고, 그 주변의 벽은 역사적인 영웅들의 무용담을 조각해 장식했다. 십자군들은 이 웅대한 개선문의 위용에 놀랐겠지만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황제 알레시우스 1세는 성문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교왕 우르바노스에게 정예군 파병을 요청했던 황제는 6만 대군의 보고 격분했다. 황제는 원래 300여명의 기사 부대를 지원받아 위험 지역에 배치할 생각이었지만 그와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황제에게 십자군 수 만의 대군은 마치 메뚜기의 재앙처럼 보였을 것이다. 군사들은 끝도 없이 황제의 도시로 밀려 들어왔다.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종교적 경쟁자가 보낸 대군은 성 밖에 주둔하자 황제는 큰 위협을 느겼지만 그에게는 그들을 상대할 만한 힘이 없었다. 하지만 알레시우스 1체는 위기를 극복할 묘안을 생각해냈다.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간악하고 교활한 인물로 마치 전갈처럼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악의을 보이지 않지만 꼬리에는 강한 독을 품고 있는 상종하지 못할 인물이었다.”

- 기윰 드 티레의 기록중(中)


황제는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들을 황궁안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고드푸르아와 형제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들 이외에 다른 한 명의 지도자가 문제였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노르만 용병 대장인 보이몽 드 프랑크가 그 주인공이다. 보이몽은 훌룡한 외모와 풍체를 지닌 것으로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빛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보이몽의 무공(武功)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시실리아에서 이슬람 세력과 충돌에서 승리했고, 지난 몇 년간 비잔틴 제국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이봉도 정치가가 아닌 군인으로서 황제의 술책에 넘어가고 있었다. 


“황제는 위대한 장군 보이몽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예(禮)를 다해 그를 접대하라고 명령했다.보이몽이 고드푸루아, 보두앵과 함께 캠프를 틀자, 황제는 그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는 간교한 계략으로 그들의 발목을 묶어두고자 했다.”

  • -한 젊은 십자구의 기록 중(中)


 알렉시우스는 많은 영토를 잃고 있었다. 그는 잃었던 영토를 되찾아 십자군이 아닌 자신의 영토로 삼고자 했다. 황제는 비장의 카드를 숨기고 있었다.


십자군은 준비된 군대가 아니어서 식량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현대의 군대처럼 보급 체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자체적으로 식량을 마련해야 했다. 알렉시우스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해 그들과 협상을 했다. 그들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황제는 식량 공급을 중지해 버렸다. 굶주린 군사들은 제국을 공격할 수 도 있었지만 결국 식량의 열쇠를 지고 있는 황제의 뜻에 따라수 밖에 없다는 것 을 깨닭게 된다.


식량을 공급해 주는 대가로 세 명의 지도자들은 황제로부터 충성 서약을 강요 받는다. 서약 내용은 원정대의 최고 통수권(統帥權)이 황제에게 있으며 투르크족 으로부터 탈환(奪還)한 영토는 모두 비잔틴 제국과 동방 정교회에 귀속(歸屬) 됬다는 것이 었다. 십자군 원정대는 새로운 동맹 비잔틴 제국의 도움으로 보스포로스 해엽을 건넌다.


원정대는 곧 적의 영토내로 진입하고 그들의 불안한 동맹은 첫 번째 실험대에 오른다. 콘스탄티노플의 지원을 받고 있는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까지 천 마일을 남겨 놓고 있었다. 출정 몇 주 후인 1097년 10월, 원정대는 처음으로 적의 도시에 도착한다.


이즈니크의 옛 이름의 니케아는 한 때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지만 20년전 투르크족이 점령한 후 지금은 술탄 크르츠 아르슬러의 요새로 사용되고 있었다.


니케아 공방전

1076년 4월 6일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해 니케아에 도착한 십자군은 니케아 북쪽 언덕을 넘어와 온 도시를 둘러싸고 강력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자 군사들은 적을 섬멸한 생각에 신이났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3마일의 높이의 성벽이 10미터가 넘고, 30 미터가 넘는 탑이 두꺼운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니케아를 침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이 어느 방향으로 침입해도 눈에 띨 수 밖에 없었다 


십자군은 니케아를 6주 동안 포위하고 결렬한 전투을 벌였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곧 첫 번째 승리을 앞에 두고 있는 듯 보였다. 비록 영토는 알렉시우스 1세 에게  넘겨 주기로 했지만 십자군들은 전리품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의 생각은 달랐다. 니케아 서쪽 측면을 따라 아스카니아 호수가 흐르고 있는데, 1097년 6월 18일 니케아와 전리품을 모두 차지하기 위한 비잔틴 제국의 밀사가 이 곳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은 십자군을 돕기 위해 아스카니아 호수에 배를 댔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들은 도시에 갇힌 투르크족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십자군에 의해 도륙을 당하느니 비잔틴 제국에 순순히 항복하길 택했다. 그날 아침 성벽에는 항복을 뜻하는 황제의 깃발이 휘날렸다. 비잔틴 황제의 항복 깃발을 목격한 십자군 병사들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기독교 형제인 황제 알레시우스 1세가 이들을 배신한 것이다. 


알렉시우스가 투르크족과 내통해 도시를 손에 넣자 십자군은 분노에 떨었다. 그들이 동맹국이라고 믿었던 황제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길에 벌어질 트루크족과의 싸움에서 지원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십자군의 원정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니케아의 전리품을 빼앗긴 십자군 부대는 캠프를 철수한 뒤 예루살렘을 향해 적진 깊숙히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투르크의 술탄 크르츠 아르스탄이 언덕위에서 그들의 행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력적 요충지를 잃은 술탄은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십자군에게 중요한 도시 니케아를 빼앗긴 술탄 크르츠 아르스탄의 마음 속에는 오직 그들에게 복수 하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는 적군에게 기습을 하기 위해 계곡에 잡복하고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탄은 5만이 넘는 군사를 모두 동원할 생각이었다. 십자군 보다 앞서 정찰병을 보낸 그는 기습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냈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도릴라이움 전투라는 이름으로 십자군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오랜 연구 끝에도 정확한 전투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존 프랑크 교수는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정확한 장소를 찾았다고 주장한다.


전투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장소를 찾기란 어렵다. 확실한 것은 그곳이 두 계곡 사이 였고, 늪이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 계곡 사이의 지점은 매우 넓은 장소였을 것이다. 양쪽 군사를 동원하려면 넓은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097년 십자군이 걸었던 길은 다섯명 정도만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6만 대군이 이 길을 건너는데만 사흘이 걸릴 정도였다. 그 결과 보이몽이 이끄는 선발대가 본부대에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크르츠 아르스란이 잠복하고 있는 계곡에 단독으로 캠프를 차렸다.


“이곳은 매우 평평하고 광활하다.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다. 아마도 이 지점이 확실할 거 같다.”


존 프랑크 교수는 니케아로 부터 35 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오래동안 잊혀져 왔던 십자군의 첫 전투 지역인 도릴라이움을 찾았다. “바로 여기다. 모든 현대 건축물을 치워 놓고 보면 이곳이 바로 두 계곡이 만나는 평온 지역이다.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진다. 또한 땅도 습지처럼 축축하다. 우리는 지금 십자군 전쟁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그 장소에 서 있는 것이다.”


109년 7월 1일 새벽, 단독으로 캠프를 치고 있는 보이몽의 군대를 향해 수 만 명의 투루크군이 언덕에서 내려와 기습 공격해 왔다. 보이몽이 “그리스도의 용맹한 전사들이여! 힘겨운 전투가 눈앞에 놓여 있다. 모든 전사들은 나아가 적에 맞서 싸우라.” 라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투르크군의 공격에 십자군은 꼼짝없이 포위 되었다. 아무리 많이 죽여도 투르크군의 공격은 끝이 없었다. 투르크 기병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십자군 병사들은 그들의 새로운 전술에 대응할 힘을 잃었다. 그들은 단순한 기병이 아니라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마 궁수들이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매우 용감하고 민첩하며 매우 뛰어난 궁수들 이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매우 용감하고 민첩하며 매우 뛰어난 궁수들 이었다. 서유럽 기사들과 달리 무장이 가벼워 기동력이 있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며 정확하게 활을 쏠 수 있었다.


투르크군은 놀라운 전술로 보이몽의 2만 병사를 섬멸하고 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놀라운 능력은 기마 궁술 뿐만 아니었다. 투르크군은 십자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화살과 창을 던졌고 먼 거리에서 활을 쏘아 댔다. 하지만 그들이 이떻게 먼 거리에서 활을 쏘아댈 수 있었는지 확인 되지 않았다. 타에프 엘 박사는 최근 아랍어로 쓰여진 한 이슬람 문서에서 비밀을 풀어줄지도 모르는 녹키야 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녹키야는 트루크군에 소속된 족(足)궁사 부대였다. 부대원들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뒤 다리 근육을 이용해 거대한 활을 수백 미터 까지 날렸다. 이떤 기록에 보면 그들이 활을 쏠 때 그 수가 엄청나 잠시동안 해빛도 가릴 정도 였다고 한다.


이미 군사 4천을 잃은 보이몽 진영으로 트루크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군사들에게 진영의 사선을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바로 그 때 계곡 넘어에서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 보드앵이 이끄는 십자군 병사들이 위기에 빠진 형제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다. 고드푸루와와 보두앵의 지원 부대가 합세한 십자군은 이제 5만 대군을 허아렸다. 지원군의 합류로 십자군의 수는 투루크군의 수를 압도 했다. 투르크족은 더 이상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훗날을 기약하며 재빨리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투루크군의 전략은 매우 뛰어났다. 그들의 전술은 뛰어났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고, 그들은 뛰어난 전사들이다.


십자군 전사들은 스스로 천하무적 이라고 자신했다. 한 전사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5주 후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한 달이 지났지만 예루살렘까지는 아직 수 백 마일이 남아 있었고 수 백 명의 병사들은 전투가 아닌 고된 행군으로 목숨을 잃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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