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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십자군 전쟁 -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3

by 파장 2015. 4. 20.



십자군 전쟁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3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타리 

예루살렘의 번영

1096년 6만이 넘는 기독교 전사들이 유럽을 떠나  십자군 원정길에 올랐다. 그들의 목적지는 ‘예루살렘’ 이었다. 지난 400년간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통치권 아래 놓여 있었다. 십자군은 그곳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찾겠다고 맹세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또 부활환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세상의 중심 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은 중동으로 향하는 3천 마일의 고단한 행군길에서 이슬람 세력과 수없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원정 3년 만에 그들은 마침내 예루살렘의 문턱에 당도했다. 도시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슬람인, 유대인, 심지어 기독교인 들까지 3만 여명의 주민들이 몰살 당했다. 십자군이 성지 탈환을 기뻐하는 동안 이슬람 세력들은 서서히 반격을 준비했다. 이제 막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십자군 왕국을 위협할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이 머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고 이슬람의 성전 ‘지하드’ 가 시작된다.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 했다. 신전에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불태워 죽었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풀어 주겠다는 이슬람인과의 약속도 무참히 짓 밟아 버렸다. 이슬람인들은 십자군이 저지른 폭력과 잔인한 학살에 몸서리 쳤다. 더운 놀라운 것은 이러한 만행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40마일 떨어진 도시 ‘다마스쿠스트’ 에서는 수 천명의 이슬람인들이 우마이야 사원에 모여 예루살렘의 참사를 애도 했다. 십자군의 만행에 보복하려는 이슬람인들의 의지는 높았지만 1099년 이슬람 세계는 아직 그럴만한 힘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12세기 가장 유명한 사가인 ‘이븐 알 아티르’는 이슬람 지도자의 분열을 그 이유로 지적했다.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영토를 장악해가고 있을 무렵 이슬람 지도자들은 자기끼리 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 세계는 분열될 수 밖에 없었고 기독교에 대항할 힘을 키우지 못했다.


이슬람 문화는 매우 훌룡하고 과학이나 수학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안정적인 국가를 확립하는데 실폐 했다. 여러명의 강력한 지방 군주들이 각자의 도시 국가를 통치하는 정도 였다. 마호메트 사후, 이슬람 세계는 크게 두 개의 종파로 양분 되어 있었다. 바그다드와 알레포를 중심으로 하는 수니파와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는 시아파가 그것 이었다. 기독교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양분된 세력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슬람의 반격은 십자군도 가장 두려워 하는 일이었다.


티레의 대주교인 ‘기윰’ 이 쓴 십자군 원정 기록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십자군 역사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사라센, 즉 이슬람인들이 어떻게 신생 예루살렘 왕국의 기독교인들이 괴롭혔는지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 주변 지역에는 그들의 적, 사라센 이교도들이 살고 있었다. 왕국내에서도 안전이 완전히 보장되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겁에 질러 아무도 성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예루살렘에 남은 기독교이들은 새로운 왕국의 입지를 보다 권고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예루살렘 탈환후 십자군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기사 2~3백명만 남았다. 예루살렘은 큰 도시였지만 텅빈 도시 같았다. 왕국에 남은 십자군이 할 일은 왕국의 입지를 권고히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유럽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이주를 권장했다. 이슬람교인, 동방정교인, 유대인들의 집이 새로운 이주자들의 거처로 제공 되었다.


예루살렘으로의 이주자를 모집 한다는 광고가 서유럽 각지에 퍼졌다. 마치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서부로 가자고 광고를 했듯이, 이주자들에게 재산과 세금 감면 혜택까지 주어졌다. 또한 그리스도 성지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빠질 수 없는 장점이 있었다.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예수께서 살았던 곳을 가보고 싶어 했다. 그곳은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사도들, 그리고 기독교가 토대로 두고 있는 유대교 예언자들이 살았던 곳 이기도 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예루살렘은 대도시 성지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인구도 크게 불어나 중세 파리와 맘 먹는 3만명에 달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급선무는 예루살렘 왕국의 기반을 확고이 다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주변 기독교 영토와의 결속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유럽인들은 점령한 도시들이 새로운 농장과 마을, 성곽을 세우고 에데사,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 등 네 개의 강력한 십자군 국가를 창설했다.


이젠 기독교인의 차지가 된 예로살렘으로 유럽의 순례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매 년 수천명의 순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지를 찾아 성소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다. 오늘날 여행자 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먹고 자고 병을 치료 받을 장소와 가이드북이 필요했다. 12세기 가이드북 에서 가장 가볼만한 곳으로 성묘교회를 들 수 있다. 중요한 성지를 한 곳에 집결 시키기 위해 십자군이 재건축한 곳으로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었다.


12세기 가이드 북 에는 여행자들이 들러야 할 기념품 상점도 담겨 있고, 음식점들도 안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행중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료소도 안내 하고 있었다. 당시 성묘사원 옆에 병원이 있었는데 늘 환자들도 가득차 있었다. 매일 2천 명의 환자들로 넘쳐 났고, 하루밤 사이에 50명 이상이 죽어나기도 했지만 그 자리는 곧 다른 환자들이 빈자리를 메웠다. 


성지 탈환 이후 십자군은 세례 요한 병원을 운영했다. 이곳에서 순결과 청빈 그리고 복종을 맹세한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을 보살폈다. 구호 기사단으로 알려진 이들은 곧 성지를 요가는 수 천 순례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군사적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순례자들 주변에는 늘 강도들이 들끓었고, 12세기 성지 순례 안내서를 보면 자파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는 숨진 순례자들의 유골이 즐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료 순례자의 시신을 묻어 주려고 멈첬다가 그 무덤이 자신이 무덤이 될 거라고 충고 하기도 했다.


순례자들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해 두 번째 자선 단체가 설립되었다. 금욕적인 수도자와 무사로써의 면모를 동시에 갖춘 그들은 이교도와의 전쟁이 헌신과 구원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유대교 신전인 솔로몬 템플을 기점으로 구성된 템플 기사단이라고 불렀다. 두 기사단은 곧 이슬람 세력의 큰 적으로 성장 했으며 가장 강력하고 두려운 십자군의 상징이 되었다. 구호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은 그 후 새왕국의 방어력 증강을 위한 성곽 건축을 관장 했고, 가장 유명한 것으로 시리아에 위치한 ‘크락데슈발리 성’ 일명 기사의 성이 있다.


이슬람의 반격, 성전 지하드

거대한 기독교 성체들은 이슬람 세력이 범접 못 할 십자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슬람인들은 여전히 십자군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날을 기다리고 이었다. 그리하여 투쟁과 성전을 뜻하는 ‘지하드’ 가 다시 한 번 언급 되기 시작한다. 12세기 초반 이슬람 전역에서 지하드의 깃발아래 뭉쳐 십자군을 몰아 내자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지하드는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이념이다. 지하드는 7세기 마호메트 시대에서 기원된 것으로 십자군만을 상대로 새롭게 생긴 용어가 아니었다. 이슬람교 원리인 지하드가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일어난 것이다.


‘이마드 앗 딘 장기’ 는 오늘날 이라크 영토인 모술의 총독이었다. 현명 하지만 무자비 했던 장기의 목표는 영토 확장이었다. 그는 십자군을 상대로 지하드를 일으켜 성공한 첫 번째 이슬람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십자군을 몰아내고 성지를 되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시리아를 통일해야 했다.


알레포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요새 도시중 하나였다. 제1차 십자군도 침입할 엄두를 못했을 정도다. 대부분 이슬람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알레포도 독립적인 도시 국가 였다. 장기는 알레포를 세력 기반으로 삼아 십자군을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막강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장기는 알레포를 방어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1028년 조약이 체결되고 장기는 통치권을 획득한다. 이렇게 해서 장기는 북부 시리아의 1 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가 권좌에 오르기전, 이슬람에는 강력한 통치자가 없었다. 또한 기독계 세력의 침입으로 이슬람 세력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다시 정의를 꽃 피웠다. 장기는 무려 20년간에 걸친 시리아의 분쟁을 끝내고 북부 시리아를 통일한다.


장기의 부하중 하나는 그를 성난 사자와 삵괭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들었다면 그 부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장기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부하들은 언제나 겁에 질려 있었다. 만약 그가 농작물을 밟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누군가 명령을 어겼다면 즉시 그를 처형했다. 


1114년 장기는 십자군에게 자신의 무자비함으을 모두 보여줄 준비를 마친다. 목표물은 전략 요충지 알레포에서 120마일 떨어진 십자군 공국 에데사 였다. 장기는 알맞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기는 항상 에데사를 주시하며 그곳을 손에 넣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데사 군주가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1114년 에데사, 십자군 공국이 생긴지 반 세기만에 이슬람 세력은 드디어 반격을 개시한다. 장기는 3만 대군을 이끌고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 방어를 위해 남아있던 얼마 않되는 십자군 기사들은 당황해 황급히 성안으로 후퇴했다. 이슬람인들이 오래동안 기다렸던 복수의 시간을 아랍의 위대한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성벽을 때려 부쉈지만 그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장기의 군사들은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무수했고, 도시는 온통 이슬람 군사들로 가득했다. 새들 조차 두려움에 날개를 접었고 물 샐 틈 없는 완벽환 포위와 가공할 위력에 파괴가 계속 되었다.”


이슬람군이 에데사 내부로 침입하는 방법은 성벽을 허물고 들어가는 방법뿐이었다. 장기는 광부를 데려와 어느 곳을 부서야 할 지 조사하기로 했다. 벽을 넘어 침입하는건 활에 맞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위험했다. 하지만 성벽 아래에 지하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장기의 군사들은 그곳을 찾아내서 바닦을 파내기 시작했다. 기독교 주민들은 지하 통로를 방어하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하지만 장기의 위력적인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슬람군은 터널을 지탱하는 나무틀에 불을 질렀다. 나무들이 타면서 그 위에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하 통로 덕분에 빠르게 도시 안으로 집입한 장기의 군사들은 기독교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이 살해 되었다. 에데사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도시 중심에 세워진 요새로 몰려들었다. 선량한 에데사 주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요새로 몰려 들었지만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성문 앞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다 결국 질식사 하거나 압사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마침내 에데사를 손에 넣은 장기는 이슬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기독교 공국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지하드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에데사 점령은 예루살렘 탈환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번 승리로 이슬람인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장기는 이슬람의 승리를 이끌었지만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포악하고 무서운 존재 였다.


장기의 노예 한 명이 그에게 하찮은 잘못을 저지르자 그는 다음날 아침에 죽이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던 그 노예는 장기를 먼저 죽이기로 결심한다. 위대한 장기가 막사에서 자고 있을때 그 노예가 장기를 찔렀고 그는 숨을 거두웠다. 그 누구도 그의 허망한 죽음을 막지는 못하였다.


에데사를 점령한지 2년만에 59살의 장기는 그의 침상에서 살해되고 만다. 이슬람의 희망도 그와 함께 사라지는 듯 했지만 장기의 위업(爲業)을 계승할 적임자가 있었다. 그는 장기의 아들 ‘누루 앗 딘’ 으로 아버지와 전혀 다른 통치 스타일의 통치자였다. 무자비한 투르크족 전사의 아드 누루 알 딘 은 아버지의 위업(爲業)을 이어받아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되찾기를 원했다.


누루 앗 딘은 신앙심이 매우 싶었다. 화려한 의상과 사치스러운 음식, 여자와 재물을 탐내는 바그다드 칼리프들과 달리 그는 유희를 전혀 즐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절재하지 않는 생활 때문에 이슬람인들이 기독교 세력에게 패한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존경을 받았다. 새로운 이슬람 지도자의 등장을 지켜본 기독교인들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메세지는 간단하고 강력했다. ‘단결과, 지하드’, “야만인들이 우리의 영토를 짓 밟고 있다. 우리의 영토를 되찾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그랬던 것 처럼 우리도 신의 이름으로 성전을 일으켜야 한다.” 누루 앗 딘의 비전은 매우 직설적 이다.


루이 7세의 2차 십자군 원정

한편 유럽에서는 에데사의 함락 소식이 교황에게 전해졌다. 1145년 12월 1일 교황 유기니우스 3세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2차 십자군 원정을 천명한 것이다.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야심차게 시작 되었다. 가능한 많은 영토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기독교 세력은 1차 십자군의 위업(爲業)을 재현 하겠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교회에서는 십자군 참가자들에게 아버지들의 업적을 계승해야 된다고 설교 했다.


교황의 설득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응답했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그의 아내 엘레오노즈였다. 제1차 십지군은 귀족들이 이끌었지만 이번에는 프랑스왕 루이 7세가 십자가를 짊어졌다. 한 나라의 왕이 2~3년간 자리를 비우고 목숨을 잃을 수 도 있는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다.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루이 7세는 에데사를 재탈환하고 십자군 영토를 확장해 1차 십자군을 계승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의 경험이 전혀 없었고 타고난 군 지도자도 아니었다. 


1147년 5월, 3만명 이상의 제2차 십자군이 원정길에 오른다. 십자군의 중심에는 300여명의 템플 기사단이 있었다. 십자군이 프랑스를 떠나 소아시아에 당도하기 까지 5개월이 걸렸다. 그들은 로마 도로를 따라 터키 중부의 험난한 지형을 통과해야 했다.


제2차 십자군은 전략상 큰 오류를 범했다. 그들은 겨울에 지금의 터키 영토인 아나폴리아 남동부 산악 지대를 통과했다. 이 시기에는 식량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행군하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한 모든 식량을 직접 운반해야 했었다. 그 지역에는 높은 산이 많고, 길이 좁아서 짐을 실은 동물들도 자주 쓰러졌다. 십자군의 문제는 원정로를 잘못 택한 것 뿐만 아니라 투르크족의 영토를 지나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슬람군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아나폴리아 남동부 지역이 산악지대 이긴 하지만 외부로 노출된 평지가 많이 있었다. 트루크군은 이곳에서 잠복해서 십자군의 취약한 부분을 노리고 있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단한 결속력이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 바람에 십자군 부대는 점차 결속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중무장한 선발대는 행군 대열에서 점점 멀어졌고, 루이 7세와 왕비 엘레오노즈를 때운 마차는 뒤쳐져서 적에게 노출되고 말았다. 투루크군은 이 기회를 놓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트루크군의 기습에 십자군들은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군사들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루이 7세와 왕비 엘레오노즈은 몸을 피했지만 수 천명의 군사들은 목숨을 잃었다. 사태 수습을 위해서 군통수권을 템플 기사단에 넘겨 주어야만 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십자군 전사들은 1차 원정에서 점령했던 안티오크에서 행군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2만명 으로 감소한 십자군은 이미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누르 잇 딘의 군대와 대치했다.


루이 7세는 에데사를 탈환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다마스쿠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곳은 누르 앗 딘도 오래 동안 노려왔던 도시였다. 문제는 누가 먼저 도시를 점령 하느냐 였다. 1148년 루이 7세가 먼저 공격을 시도 한다. 다마스쿠스의 공격은 누르 앗 딘에게 선정 포고의 의미였다. 그가 알레포에 이어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는다면 두 도시를 차지하는 최초의 이슬람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십자군 공국의 동쪽 변경 전체가 단 한 명의 지도자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한 때 다마스쿠스는 십자군과 동맹 관계였지만, 최근에는 적대적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들을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의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만찬가지로 다마스쿠스 주민들도 집과, 가족과, 재산을 지키고 싶어 했다. 다마스쿠스는 알레포의 군주 누르 앗 딘 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독립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도시를 지키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크족 십자군에 대항해 이슬람을 지켜 내려고 했다. 모두들 신앙을 지키다가 천국에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목숨을 건 항쟁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있었으니 이른 한 살의 율법학자인 ‘알-필달라위’ 였다. 다마스쿠스 에서는 지금 까지도 그의 무용담이 회자 된다. 카페에서 한 이야기꾼이 그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사악한 십자군 병사들은 다마스쿠스를 차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5만의 보병과 기병대가 우리 도시로 밀려왔고 우리 주민들은 맞서 싸웠다.” 


성벽 가까운 과수원에서 전투가 시작 되었다. 늙은 율법 학자 알-필달라위는 전쟁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그는 전쟁터에 달려나와 마치 신이 내린 전사처럼 기독교인들을 무찔렀다. 그가 말했다. “내 목숨은 이미 신에게 맞겼다.” 하지만 밤새 공포스러운 전투에서 시달린 주민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말았다. 혈투 끝에 십자군은 이슬람군을 제압하고 다마스쿠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시 성벽 가까히 쳐들어 왔다.


알-필달라위는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고 전지 전능한 신의 이름으로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안타갑게도 그는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웠다. 도성 근처 과수원에서 벌어진 몇 일간의 전투에서 수 천명의 이슬람인 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립을 주장하던 다마스쿠스 주민들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 뿐이었다. 그들은 누루 앗 딘 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누루 앗 딘은 마침내 기다리던 기회를 얻었지만 루이 7세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누루 앗 딘과 대결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다마스쿠스를 포기하고 후퇴 하면은 더 없는 치욕이 되겠지만 그들과 대결 한다고 해도 질게 뻔했다. 결국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도시 포위 진영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후퇴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무능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루이 7세는 패배의 치욕을 않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드높은 희망을 않고 시작된 2차 십자군 원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난다. 루이가 예루살렘에 가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자 이슬람 세력은 더욱 강력히 단결했다. 기독교인들은 포위를 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성지를 지키는 병사들은 더욱 줄어 들었다. 이 때부터 동방의 기독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제2차 원정의 실패로 이슬림 세계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들은 신의 가호로 승리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1차 원정 당시 십자군 대군이 몰려왔을 때 이슬람인들은 뼈 아픈 패배를 당해야 했다. 십자군의 2차 원정의 실폐로 누르 앗 딘은 보다 쉽게 다마스쿠스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위협과 설득을 통해 자신의 영토에 통합될 것을 설득했다. 그는 오직 단합된 이슬람의 힘만이 십자군 영토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마스쿠스는 그의 끝없는 설득에 결국 손을 들었다. 1154년 마침내 누루 앗 딘은 다마스쿠스에 입성한다.


모두들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기쁨에 들떴다. 부자와 가난한자, 귀족과 상인들이 모두 나와 쌀과 꽃잎을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고 그의 장수를 기원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승리를 자신했다.  누루 앗 딘은 아랍인이 한민족이며 하나로 뭉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같게한 지도자였다.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세계의 강력한 두 도시가 한 사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의 목표는 지하드를 일으켜 기독교인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에데사, 알레포, 다마스쿠스 등은 이제 십자군 원정의 동쪽 변경(邊境) 지역은 모두 누루 앗 딘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마지막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올가미를 더욱 죄어야 했다. 기독교 영토를 완전히 포위 하려면 남쪽의 강력하고 부유한 영토인 이집트가 필요했다.


이슬람 신화적 인물 살라딘의 등장

1160년 이슬람을 통일한 누루 앗 딘의 목표는 십자군 왕궁을 완전히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미 시리아를 손에 넣은 그는 이집트와 독립적인 수도인 카이로를 원했다. 당시 카이로는 무기력한 남편을 둔 젊고 이쁜 아내에 비유 될 수 있다. 누루 앗 딘이 기독교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곳을 먼저 손에 넣어야 했다. 카이로를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십자군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십자군도 커이로를 노리고 있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부유한 이집트는 1160년 당시 모든 세력의 목표물 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독립을 유지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한 종파인 시아파의 거점으로써 이집트는 수니파 세력의 누루 앗 딘을 기독교 세력 만큼이나 적대시했다. 하지만 1188년 십자군 병사들이 카이로 부군의 이집트 도시에서 시아파 이슬람인들을 학살하는 실수로 인해서 누루 앗 딘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카이로 지도부는 항복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이 그런 일 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쉽게 도시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만행 소식을 듣자 그들은 다시 항쟁을 결심했고, 결국 이집트인들은 누루 앗 딘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기다리는 전갈을 받은 누루 앗 딘은 그의 부하중 가장 유능하고 야심에찬 살라딘을 카이로로 급파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은 신화적 인물이다. 그의 영웅담은 절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인 바하 알 딘에 의해 살라딘의 생애는 재창조 되었다. 바하 알 딘은 살라딘의 열렬한 숭배자 이기도 했다. “나는 위대한 영웅 살라딘의 숭고한 무용담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살라딘은 출정하는 순간부터 지하드를 위해서가 아니면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살라딘은 누루 앗 딘과 마찬 가지로 십자군을 몰아내기 위해 이집트와 시리아를 원했다. 하지만 직접 그곳을 통치한다는 것은 누루 앗 딘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먼저 그는 이집트 지도자들의 손에서 영토를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살라딘이 권력을 잡아가는 동안 그에게 방해가 될 수 있는 이슬람 권력자들이 시기적절하게 죽어 갔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이 살라딘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낳았다. 하지만 그들의 사인(私人)에 공통점이 없어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1169년 말 경쟁자들의 시기 작절한 죽음 덕분에 살라딘은 이집트의 모든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누르 앗 딘은 살라딘의 반연을 끊임 없이 의심했고, 살라딘의 반역을 처벌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5년 후 반역을 저지른 살라딘을 제거하기 전에 누루 앗 딘은 석연치 않는 이유로 5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살라딘은 누루 앗 딘의 거점 도시로 달려갔지만 이미 후계자가 정해진 뒤였다. 시리아의 새지도가 된 누루 앗 딘의 아들  알 사리히는 이제 겨우 12살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누루 앗 딘의 아들 알 사리히는 살라딘의 입성을 거부하고 그의 군대를 알레포 도성 밖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대담한 계획을 실행해 옮겼다. 종교 원리주위자 무사들에게 살라딘 제거를 명령한 것이다. 암살을 뜻하는 어세신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어세신이라는 단어는 마리화나를 뜻하는 헤시시란 단어에서 생겨났다. 누군가를 암살하려면 마리화나에 의지하지 않고느느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유래(由來)가 생겼다.


암살자들은 도성 밖에 있는 살라딘 막사로 숨어들어 갔다. 그들은 호위병 한 명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 갔지만 살라딘은 경미한 부상만 입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살라딘 암살에 성공 했다면 거대한 혼란이 야기 되었을 것이다. 암살자들이 그의 막사에 침입했다는 사실만으로 살라딘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일년 후 살라딘은 알레포 점령 목적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번에는 보안에 철저를 기했다. 사방에 호위병을 배치하고 막사 주변에 석회와 잿가루를 뿌려 발자국을 탐지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도 다시 한 번 살라딘의 막사 침투에 성공한다. 그리고 살라딘의 베개 옆에 과자 선물을 놓아두고 살라딘이 퇴각하지 않으면 다음 번에는 기필고 죽이겠다는 경고문도 놓아 두었다. 이 일로 살라딘은 또 다시 알레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를 잡기 까지 7년이 흘렀다.


1181년 19살이 된 그의 경쟁자 알-사이흐가 죽은 것이다. 앞서간 아버지와 할아버지 처럼 의문의 죽임을 맞이했다. 살라딘이 무자비 했다는 것은 사실 이었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권력을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을 것이다. 그가 알-사이흐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이제 살라딘 차지였다. 80년 동안의 이슬람 분열이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살라딘은 십자군의 영토를 완전히 포위하고 기독교 세력을 위협했다. 이슬람 세력에 포위된 십자군 영토내 기독교 세력들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염려했던 위험한 상황이 현실로 나타났다. 전쟁과 위협을 통해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통일한 살라딘은 이제 기독교 세력이 차지한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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