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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십자군 전쟁 -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2

by 파장 2015. 4. 19.


십자군 전쟁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2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타리


에데사 공방전

도랄라이움 전투에서 아이슬란의 투루크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지만 십자군 지도자들은 또 다른 잠복 기습을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뒤로 하고 타우루스 산맥을 지나는 먼 길을 선택했다. 몇 년 후 한 젊은 병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 했다. “우리가 올란던 산은 끔찍할 정도로 높고 가팔라서 군사들 모두 또 다른 산을 넘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말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짐을 실은 짐승들도 힘을 잃고 쓰러졌다.” 일렬로 행군해야 했던 군사들은 3주만에 산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이 건조 지대인 비시라아에 다다르자 30도의 무더위가 그들을 괴롭혔다. 

“그 곳은 물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였다. 우리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통 받았지만 먹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 한 젊은 십자군 병사의 기록 중(中)

“당시 500명 이상이 고달픈 여정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전쟁에서 없어서는 않될 전사들의 준마(駿馬)들이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지켜줘야 할 그들이 짐을 실은 짐승들과 다를것 없이 지쳐 쓰러져 갔다.”

- 기윰 드 티레의 기록 중(中)

몇 달간 계속된 힘든 여정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십자군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인 보두앵의 아내 고필드가 죽은 것이다. 고필드는 매우 부유한 여인 이었다. 그녀가 가진 부동산과 재물은 모두 남편 보두앵의 차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재산은 가족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보두앵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만 것이다. 아내가 죽자마자 보두앵의 머리속에는 오직 탐욕만이 가득했다.

보두앵이 아내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 보두앵은 수 백명의 기사를 데리고 단독 작전을 위해 본대를 떠난다. 아내의 죽음으로 잃은 재산을 보상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영토를 차지하는 걱 이었다. 동쪽에서 백 마일 떨어진 곳에 에데사(Edessa) 라는 알맞은 목표물이 있었다.

에데사는 부유한 곳이었다. 금속세공 기술이 발달했고, 유프라테스 강과 인접해 있어 토지는 매우 비옥했다. 또한 동방에서 온 값진 향신료와 장신구들이 이곳에 모였다가 지중해로 운반되는 무역로이기도 했다.

보두댕에겐 더 없이 좋은 목표물 이었다.

문제는 그곳이 이슬람 영토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투루크족과 맞서고 있는 기독교 지역이었다. 하지만 에데사 주민들은 계속 되는 이슬람 공격에 불안해 하고 있었다. 위대한 십자군 지도자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에데사 주민들은 영주인 토러스에게 보두앵을 불러 들이라고 청원 했다.

“에데사의 군주는 아르베니아 기독교인 토러스였다. 토러스는 후계자도 없는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늙은이 였다. 그는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 힘도, 사악한 이교도들을 막아낼 힘도 갇고 있지 못했다.”

- 기윰 드 티레의 기록 중(中)

보두앵인 비싼 값에 지원을 약속했다. 투르크족으로 부터 에데사를 지켜주는 대신 도시의 상속을 약속 받았다. 힘 없는 군주는 자신의 사후에 도시를 물려 주겠다고 약속 한다. 그는 또한 보두앵을 양자로 받아 들이면서 스스로의 무덤을 팠다. 보두앵은 토러스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에데사의 사악한 조언자들이 보두앵에게 이미 상속을 약속한 토로스를 암살하고 도시를 차지하도록 부추겼다. 토로스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났다.토러스는 밧줄을 성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그는 반역자들이 쏜 화살에 맞아 거리로 떨어졌다. 그들의 군주의 머리를 잘라 창에 꽃은 뒤 광장으로 가져와 모든 시민에게 보여줬다.”

- 한 젊은 십자군 병사의 기록

이런 행위는 십자군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십자군의 대의 명분은 동방 기독교 형제들을 이슬람 세력의 위험으로 부터 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두앵은 이미 그 이념을 상실하고 오직 자신의 영토를 차지 하겠다는 일념으로 기독교인 군주를 살해하고 에데사를 자기 손으로 넣었다.

“만약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전 중동 지역에 동방 정교회만 존재 했다고 하더라도 똑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것 이다. 대신 다른 명분을 대을 것이다. 이를테면 동방 정교회는 정통 기독교가 아니며 자신들만니 진정한 기독교인 이라 주장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동방 기독교인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했던 것 처럼 십자군 전사들은 북쪽에서 침입한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기독교 원리주의자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기록 중(中)


안티오크 공방전

보두앵이 에데사 점령을 자축하고 있는 동안 십자군 본대는 남서쪽으로 150 마일 떨어진 철벽요새 안티오크에 당도 했다.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인 안티오키아는 사도 성 바울로 시대 이후 독실한 기독교가 뿌리 내렸지만 1085년 이후 투르크족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십자군 전사들에게 안티오크는 에루살렘 만큼 값진 목표였다. 안티오크의 옛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 번영했던 도시의 잔재가 터키 동부 변두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 1년후 한 병사는 1097년 그 도시의 화려했던 도시를 처음 본 감명을 이렇게 기록했다.

“안티오크는 두겹의 벽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하나는 매우 높고 넓었다. 거대한 암벽으로 된 성벽 안에는 450여개의 탑이 솟아 있었다. 도시는 네 개의 성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성벽을 따라 흘렀다. 도시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십자군이 이 도시를 탐내는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전략상 이유였다. 안티오크는 시리아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그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후퇴로와 군수품과 보급로 요청도 어려웠을 것이다.

“종교족으로도 안티오크는 예루살렘과 위상과 맘 먹었다. 이곳은 사도 성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교회를 세운 초기 기독교 발상지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곳은 십자군 병사들에게 영적인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 톰 에스브리크 박사

안티오크 주민 대부분은 아르메니인과 그리스 정교 기독교인들었다. 투르크인들은 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지만 도성밖의 십자군은 이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투르크인들은 몰아내고 도시를 온전한 기독교 영토로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티오크는 방어가 철저한 도시였다. 산꼭대기에서 평지까지 거대한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안쪽으로는 두텁고 견고한 성벽이 높이 쌓여 있었고 바깥쪽으로는 일련의 탑들이 도시를 철저하게 방어를 하고 있었다. 탑들은 서로 견고하게 맞물러 있어서 파성태를 사용해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존 프랑스 교수 기록 중(中)

기독교 역사가들만이 안티오크의 처절한 전투를 기록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븐 알 아티르는 그가 프랑크이라 일컫는 십자군에 대항한 이슬람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웅은 안티오크 투르크족 군주 ‘야기 시안’이었다.


“안티오크 군주 ‘야기 시안’는 불굴의 용기와 힘, 지혜와 판단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수 많은 프랑크족들을 죽이지 못했다면 이슬람 영토는 단숨에 그들에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中)

이븐 알 아티르는 큰 키와 흰수염을 지닌 ‘야기 시안’의 무용담을 기록했다.

“프랑크인들이 도시 가까이 다가오자 ‘야기 시안’은 백성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의심스러웠다. 야기시안은 자신의 기독교 백성들이 배반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슬람인을 도성 밖으로 참호를 파게 했다.“ , 그가 말했다.  안티오크는 그대들 것이나 프랑크안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 내가 잠시 맡아 두겠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中)

‘야기 시안’은 안티오크를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도시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십자군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렸다. 모든 이슬람 기록에는 ‘야기 시안’은 안티오크를 지키기 위해 밤 낮으로 노력했던 영웅으로 기록 되어 있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군대를 조직해 십자군의 군수품을 약탈하고 야간 기습 공격으로 막사를 불을 지르고 식수를 빼앗는 등 많은 무공을 세웠다. 홀로 십자군 대군에 맞서 훌룡하게 도시를 지켜냈다.”

- 타이즈 엘 아즈하리 기록 중(中)

그의 노력은 빛을 바랬다. 십자군 8개월 동안이나 도시밖에 묶여 있었고 캠프의 상황을 더욱 처참해져 갔다. 식량도 거의 없는데다가 쫓겨난 기독교인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교착 상태가 길어 질수록 병사들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가인 ‘기윰 드 티레’는 말의 피를 받아 마셔야 했던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날이 갈 수록 병사들의 굶주림은 날이 갈수록 악화 되었다. 게다가 역병까지 퍼져 병사들이 죽어나갔고 그들을 묻을 자리조차 모자랄 지경이었다. 기아와 질병을로 인해 많은 생명이 희생 됬고,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까지 더해 부대 규모는 현저하게 감소 했다. 살아남은 자는 처음에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 기윰 드 티레의 기록 중(中)

 병사들의 괴로움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타에프 엘 아르하르 박사는 중세 이슬람 역사서에서 안티오크 군주 ‘야기 시안’이 적의 포위를 뚫고 지원 요청한 방법을 찾아냈다. 방법은 바로 비둘기였다. 셀주크 투루크인이 최초의 특급 우편 배달 서비스를 만들어 낸 셈이다. 비둘기 다리에 쪽지를 매달아 보내면 몇 시간안에 이슬람 영토에 다다라서 지원군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달후 정찰병들은 대규모 투르크 지원군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다급해진 십자군은 이제 도시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폴리아 공작 보에몬드는 드디어 돌파구를 찾는데 성공한다. 바로 이슬람 내부의 반역이었다. 그는 흉갑을 제조하는 ‘피로주’라는 병기공이었다. 도시에서 계곡으로 흐르는 강의 하류 지역에서 있는 성에서 일하는 자였다.


“그는 오래동안 야기 시안 밑에서 일했지만 결국 프랑크족과 내통했다. 그들은 피루즈에게 뇌물을 바쳤다.”

- 이븐 알 아티르 기록 중(中)

“피루즈는 성을 한 개도 아닌 세개나 책임지고 있었다. 보에몬드는 이 사람을 제대로 봤다. 그는 언제든지 군주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쟁에서 가장 큰 적수는 내부의 반역이었다.”

- 존 프랑크 교수

“모든 준비를 마쳤다. 병사들은 피루즈가 지키는 성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모에몬드 장군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신의 가호를 빌며 마음을 굳게 먹고 사다리로 올라라, 안티오크는 곧 하나님의 도시가 될 것이다.”

- 십자군에 참전한 젊은 병사의 기록 중(中)

“피루즈가 책임을 맡고 있었던 성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이 곳이 본탑의 토대인 것 같아요. 성벽의 끝부분의 남쪽의 방어선으로 이어집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 피루즈의 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십자군 병사들은 저 앞의 언덕을 넘어 일제히 이곳으로 몰려들어 왔을 겁니다. 피루즈는 여기서 햇불을 흔들고 있었겠지요.”

- 존 프랑크 교수

“우리는 사다리를 가지고 와서 성벽에 단단히 고정 시켰다. 그리고 일제히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다리는 부서져 버렸다. “

- 십자군 참전한 젊은 병사의 기록 중(中)

그러나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군사들은 다른 사다리를 이용해 피루르 성에 올랐다. 몇 분만에 군사들이 성벽안으로 밀려 들었고, 성문이 열리면서 밖에서 기다리던 나머지 군사들까지 모두 모였다.

성문이 열리면서 병사들은 도시 안으로 물밀듯이 몰려 들었다. 8개월간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병사들은 더 이상 거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안티오크의 기독교 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집과 거리와 모스크 안에 있던 모든 이슬람교인들을 잡아 무참히 살해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보두앵은 주저하지 않고 우리 군의 깃발을 성벽 꼭대기에 꽃으라고 명령했다. 도시의 거리는 온통 시체로 넘쳐나 그 악취로 인해 견딜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좁은 길 어느 한곳에도 시체가 널려 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中)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 구분없이 모두가 학살 되었다. 어린이는 물론 부녀자와 노인들까지 모두 죽여, 그동안 당한 고생을 되갚고 자신들이 이곳의 진정한 주인임을 과시했다. 하지만 십자군의 눈을 피해 달아난 한 명의 투르크인이 있었다. 바로 ‘야기 시안’ 이다.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야기 시안은 요새가 함락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황한 그는 30여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도성 밖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도시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난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괴로움에 목놓아 울기 시작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그곳을 지나가는 한 양치기가 그의 목을 베어 안티오크의 프랑크인들에게 가졌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中)

 보에몬드에겐 ‘야기 시안’의 머리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에겐 더 큰 걱정 거리가 있었다. 야기 시안이 살해된 다음날 그의 전갈을 받고 투르크 지원군이 안티오크에 당도한 것이었다. 기독교 점령군들은 다시 포위를 당한 신세가 놓이게 되었다.

1098년 6월, 도성 포위 8개월 만에 십자군은 드디어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적군과 위치가 바꿔 성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고 도성 밖의 투르크군들은 그들은 포위하기 시작 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모두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힘든 사황에서 병사들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방법은 하느님이 그들 편에 계시다는 종교적 신념을 심어 주는 것 뿐이었다. 십자군 병사들은 기적을 빌었고, 마침내 답을 얻었다. 한 병사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계시는 절대로 환상이 아니다. 실제로 하느님이 내리는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거다.”

- 번트 베쉬 신부, 예로살렘 총 대주교 교구


계시를 받은이는 미천한 신분의 사제였지만 이 소식은 십자군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그는 ‘피터 바로톨로뮤’ 이란 이름의 신자였다.  그가 말했다. ‘어느날 밤 성 안드레나 께서 내게 말씀 하셨다. 아들아! 안티오크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거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성스러운 창이 그 곳에 묻혀 있다.’ 그는 이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中)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렀던 창은 수백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말 창을 찾아 낸다면 병사들을 다시 한 번 강한 종교적 신념을 지니게 될 것이다. 또 한 번 그리스도와 강한 연관성을 확신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유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그가 남긴 유품은 있을 수 없다. 단지 십자가나 성스러운 창 처럼 그분의 몸에 닿았던 물건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 번트 베쉬 신부, 예로살렘 총 대주교 교구

“그는 복잡한 종교 이야기가 아닌 간단한 유품으로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 시키려고 했다. 구체적인 신의 계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보다 설득력이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재확인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존 프랑크 교수

피터 바로톨로뮤은 손수 12사도를 선정해 성스러운 창이 묻혀 있다고 계시된 성당으로 달려가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땅을 파 보았지만 창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때 피터가 직접 성당으로 들어가더니 오래된 쇠덩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는 성스러운 창 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메시아의 창이 성당에 묻혀 있다는 주장은 간교한 사제의 농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것을 찾으면 승리한 것이다. 찾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몰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먼저 성당으로 달려가 쇠덩이를 묻은 후 자신의 발자욱을 지워 흔적을 지웠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中)

“십자군 병사들은 이전에도 여러번 신성한 유품들을  위조(僞造)한 적이 있었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린 사람들은 유품을 위조하여 만들어 그것을 팔아 돈을 벌었다. 어떠한 유품이든 말만 잘 만들어내면 신성한 것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십자군 병사들에게는 성스러운 창처럼 그들의 신념(信念)을 확고하게 하는 유품(遺品)이 필요했을 것이다.”

- 티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그것을 믿음의 문제이다. 하느님으로 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성한 물건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할 줄 알고, 그것을 거짓으로 부터 진실을 가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 번트 베쉬 신부, 예로살렘 총 대주교 교구

“십자군 병사들은 사기를 회복하고 전쟁의 의지를 드높였다. 종교적 환희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잘망감에 사로 잡혀 있던 병사들은 다시 일어나 싸우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 존 프랑크 교수

“여섯개의 전선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리는 십자가 깃발의 지시에 맞추어 성문 밖에서 명령을 기다렸다. 전투태세를 갖추고 진격해 오는 우리 군을 보고 투르크군은 이렇게 말했다.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본때를 보여주자’ 하지만 우리 군이 마침내 그 위용을 드러내자 그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中)

십자군에 남는 군마(群馬)는 고작 200마리 뿐이었지만 그들은 성스러운 창을 들고 투루크군관 정면으로 맞섰다. 이 때 한 병사는 하느님이 보낸 성스러운 군대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백마를 타고 깃발을 든 수 많은 군사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지원군인 것을 깨달았다.  투루크군은 놀라서 달아났고 우리는 결국 승리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中)

그 환영(幻影)이 사실이든 아니면 사기 진작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든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약속처럼 동방 정교회에 귀속 되지는 않았다. 보에몬드는 비잔티 제국 알렉시우스 황제와 한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자신이 안티오크의 군주가 된 것이다..

“보에몬드는 아티오크를 차지할 욕심에 알렉시우스와 한 약속을 저버렸다. 탈환하는 모든 영토를 비잔트 황제에게 바치겠다는 서약을 어긴 것이다. 또한 그는 십자군이 기반으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념(理念)마저 내던저버렸다. 비잔트 제국을 도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자던 로마 교항 우르바노스의 뜻이 퇴색 되어버린 것이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십자군은 많은 영토를 손에 넣었다. 보우댕은 에데사를 보에몬드는 안티오크를 지배했다. 두 사람은 모두 큰 부자가 된 것이다.


마아라트 알 누만에서의 잔혹한 대학살

1098년까지 십자군은 공국을 지배하는데 시간을 허비했고 예루살렘으로 진군을 계속 해야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티오크 공방전에서 승리한 십자군은 내부의 지도자 사이에서 그들의 향후 행보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투를 계속 해야 하는가? 얼마나 기달려야 하는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병사들의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나눠졌고 의욕을 잃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는 병사들도 있었다. 원정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톰 에스브리즈 박사

병사들은 예루살렘으로 남진을 주장 했지만 지도자들은 여전히 논쟁을 계속했다. 이들은 이미 십자군 원정의 목적을 잊은지 오래였다. 안티오크에서 말을 달려 이틀 거리인 ‘마아라트 알 누만’에서 드디어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차 십자군은 이곳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다. 모든 역사 학자들이 꼭 한 번 와 봐야할 곳이다. 1차 십자군이 그들의 극악 무도한 본색을 드러냈던 곳이니까.”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테완대학

십자군 병사들은 이곳에서 가장 잔혹한 살육을 저질렀다.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는 십자군이 충격적인 학살을 저지른 마아라트 알 누만 을 처음 방문 했다. 

시리아 북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11세기의 요새의 위용을 잃은지 오래다. 유적지를 놀이터 삼은 아이들은 박사를 신기한 듯 따라 다닌다.

“이곳이 마아라트 알 누만 의 요새가 있었던 것 같다. 왼쪽으로는 모스크의 잔재들이 남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도시의 군주가 살았던 성이 보입니다. 이건 교회 같다. 마아라트 알 누만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인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병사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마아라트 알 누만 모든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테완대학


십자군 병사들이 안티오크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보에몬드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1098년 11월에 이곳에 당도했다.

“안티오크에서 멀지 않는 마아라트 알 누만 은 투르크족과 사라센이 대부분이다. 보에몬드는 사라센 지도층에 역관을 보내 가족들과 가산을 정리해 성문위에 있는 궁에 피해 있으면 그들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알렸다. 우리는 도시안으로 들어가 집이든 창고든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약탈했다. 새벽녘까지 주민 전체가 몰살 되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中)

“기록을 보면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을 산 채로 불속에 집어 넣었다. 겨우 겨우 달아난 자들도 결군은 십자군에 잡혀 목이 베이거나 칼에 찔려서 죽임을 당했다. 도시 안에사 무려 2만 5천 명이 살해 되었다. 십자군은 이슬람교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었다. 말하자면 ‘인간청소’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 타에프 에 아리하리 박사

십자군의 잔혹한 행위는 더 이상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아라트 알 누만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사태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34일간 머물렀다. 어떤 이들은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도시안에서 더 이상 약탈할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상태에 만족할 줄 모르고 답답해 했다. 급기야 그들은 시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심지어 시체의 살을 잘라 요리해 먹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 부대에선 어른의 시체를 단지에 넣고 끓여 먹고, 어린아이의 시체를 꽃챙이에 꽃아 구어 먹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中)

성스러운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목적은 오직 적을 이기는 것 뿐이다. 전쟁에는 살인과 폭력, 선동, 위협 등 말하자면 죽음과 충격과 공포만이 존재하 뿐이다. 인육을 먹는 행위는 적에게도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 주기 위한 작전일 수도 있다.

“봐라, 우리는 너희를 산 채로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다. 어째든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그들은 산 채로 십자군에게 잡아 먹힐까봐 두려워 했다.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3년간 3천 마일(48,00킬로) 행군

마아라트 알 누만의 참극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더 이상 군사들을 방치해선 않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십자군이 그 임무를 완수하고 성지를 탈환할 때가 온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은 다소 온건적인 이슬람 세력인 파티마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은 십자군에 화의(和議)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99년 6월 유럽 대륙을 떠나던 6만 대군의 1/4도 채 되지 않는 1만 3천 명의 십자군 전사들이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한 예루살렘의 문턱에 당도한다.

“십자군 전사들은 드디어 그들이 목적했던 예루살렘 성문 앞에 3년간 3천마일에 달하는 긴 여정 끝에 극심한 고통과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여 그들은 성지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감격해 울었고, 땅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3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십자군은 예루살렘 공격을 준비했다.성벽은 15미터 높이에 두께는 3미터나 되었다. 도시 내부로 침임하려면 사다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슬람군이 이미 주변의 나무들을 모두 없애버린 상태였다. 

십자군 병사들은 나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마침내 땅속의 구덩이에서 400개의 손질된 목재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신이 그들 편에 서 계심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목재가 15미터 성벽을 허물 공성탑 두 개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결전을 위한 준비는 끝이 났다.

1099년 7월 14일 십자군은 두 조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했다. 두 개의 공성탑은 각각 도시의 북서쪽과 남쪽에 설치 되었다. 두 군대 중 어느 한 곳의 벽만 무너져도 예루살렘은 함락할 수 있었다.

“머리위로 수 많은 돌과 대포와 화살이 빗발틴다고 상상해 보자, 전쟁은 잔혹하고 격렬했다. 십자군은 인간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말 그대로 이슬람군을 잡아 투석기에 넣고 성벽을 향해 발사하는 것 이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담쪽에선 이슬람군이 기름 단지와 불화살로 십자군의 공성탑을 공격했고, 마침내 하나를 불태워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위대한 십자군 지도자 고드프르와가 이끄는 북서쪽 진영의 공성탑 하나 뿐이었다.

고드프르와는 작전을 변경했다. 여기 레이몽 아길레라는 사람이 쓴 기록을 보면 고드프르와는 성 스테판 성당과 요셉 계곡 사이로 이동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드프르와는 이슬람군 방어선이 취약 부분을 발견 했지만 그곳은 도시 북동쪽으로 1마일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몇 시간 뒤 날이 어두워지자 고드프르와는 군사들에게 공성탑을 옮겨 방어가 소흘한 곳으로, 바로 이곳이 십자군 병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침입한 장소다.

이슬람군은 고드프르와의 공성탑을 무너트리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들은 쇠갈고리를 던져 그것으로 탑을 무너트리려 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거대한 낫사슬을 잘라 버렸다. 성벽위에서 잠시 동안 불이 난 틈을 타 고드프르와는 성벽 아래로 가교를 내려 성벽에 대도록 명령을 했다.

성벽이 무너직고 이슬람군은 모두 달아났다. 마침내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 

“우리는 솔로몬 신전까지 사라세인을 추격해 모두 죽였고, 신전의 벽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자는 모두 칼로 머리를 베었다. 살아남은 사라센인은 시체들을 끌고와 성문 앞에 높이 쌓아 두었다. 높이 쌓여 있는 시체들은 마치 장작더미인 양 불태워 졌다. 이 보다 더 끔찍한 이교도 학살은 들어본 적이 없다. 죽은자가 얼마인지는 하늘만이 아신다. 예루살렘은 우리 것이 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中)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처음 그들이 목적 했던대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이 자신을 굽어 살피고 있다고 생각했고, 십자군에 참여한 모든 서유럽 사람들은 하느님께서도 십자군이 일어서길 바라고 계셨다는 믿음을 같게 되었다.

고향인 북유럽을 떠나온지 3년만에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의 국왕으로 추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한 곳에서 왕의 칭호를 받기를 거부했다. 일년후 그는 성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 후 욕심 많은 에데사 군주 보두앵이 달려와 형 고드프루아의 자리를 대신 했다. 형 처럼 겸손한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두앵은 예루살렘의 왕에 오른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졌다. 하지만 6만명의 대군이 3천 마일의 대장전을 떠나게 한 장본인, 교황 우르바누스는 예루살렘이 400년 만에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폭이 채 800m 도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십자군은 자그만치 3만명의 이슬람인과 유대인을 학살했다. 십자군은 아랍 사회에 깊은 충격을 던저 주었다. 그들은 이슬람을 침입한 야만족이며, 그들의 충격적인 잔혹 행위는 마치 어제 일어난 일 인 듯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 되고 있다. 또한 서구 세력이 이슬람 지역을 침범할 때마다 사람들은 십자군이 또 다시 일어났다고 말은 한다.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미국 부시 대통령이 서슴치 않고 테러를 막기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슬람 사람들은 십자군이란 단어 하나 만으로도 공포에 몸서리 쳤었다.

십자군 전사들이 승리에 기뻐하며 예루살렘 도시를 더욱 곤고이 하고 있을 무렵, 이슬람 세력은 서서히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분노가 폭팔해 예루살렘 왕국을 덮치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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