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by 파장 2015. 6. 29.

1951년 6월 29일 행주, 소녀가 동생을 업고 M-29 탱크 앞에서 전쟁의 공포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다.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65년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반도의 허리가 잘린채로 정전이 아닌 휴전 상태로 이데올로기의 늪에 빠져 아직도 허우적 거리고 있다. 그동안 나는 한국 전쟁에 대해 미디어에서 전하는 일방적이고 편협한 지식만 습득했고,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에 바로 알 지 못했다. 그래서 서중석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를 참고해 정리해 보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 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조선인인군은 선전포고나 사전 예고 없이 38선을 남침했다. 같은 날 12시에 포천, 다음 날 오후 1시에는 의정부를 점령한 데 이어 불과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은 전쟁을 일으키기 앞서 소련, 중국과 긴밀하게 상의했다.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 소련 측에 대남 공격의 필요성을 말한 것은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1949년 8월경 이었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9월에 북한의 공격이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전쟁에 찬성한 것은 1950년 4월 이었다. 이에 따라 5월 중순 중국의 모택동도 동의했다. 소련의 지원으로 5월 하순부터 전쟁 준비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북한이 우세한 공격력을 가진 것은 명백했지만, 초기에 국군이 참패한 것은 이승만과 신성모 국방부 장관등의 책임이 컸다. 두 사람은 1949년에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5・30선거 기간에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말했으면서도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부정사건으로 물러난 채병덕을 다시 육군 총참모장으로 기용하는 등 군 지휘체계가 문란했고, 부패로 군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전쟁 직전 지휘관들이 대폭 이동하고, 장병들이 대규모로 휴가를 가는 등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도망치는 이승만과, 국회 동의 없는 작전권 양도

이승만은 첫날부터 자신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비상국무회의에서 수원 천도를 결정한 직후인 27일 2・3시경 국무위원에게도, 국회에도, 군 지휘관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대전으로 피신하고는, 적을 물리치고 있으며 대통령도 서울을 지킬 것이 라는 거짓 내용의 방송을 이날 밤늦게까지 여러 차례 내보냈다.

국무위원들을 비롯하여 고급관리, 지주, 자본가, 경찰 등도 제 살길을 찾아 재빨리 남쪽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키는 바람에 서울 시민들은 대부분 피란을 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도강파’와 ‘잔류파’ 라는 말이 나왔다. 미처 피란하지 못한 잔류파 사람들은 북한 인민군에게 어쩔 수 없이 협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서울 수복 후 도강파는 잔류파를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 로 몰아세워 괴롭혔다.

대전에 있던 이승만은 또 다시 겁이 나서 7월 1일 새벽 혼자서 부산으로 도망쳤고, 7월 14일에는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권을 양도한다고 통고했다. 1949년 6월 미군으로부터 작전 지휘권을 인수 받은 지 1년여 만의 일로, 국회의 동의 없이 처리되었다.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그리고 중국의 개입

맥아더 사령관은 중국 측이 예상한 대로 9월 15일 인천상륙적전을 감행했다. 인민군은 워낙 열세였기 때문에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유엔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고자 했다. 이즈음 중국은 유엔군이 북상한다면 중국의 안보가 지대한 위협을 받기 때문에 38선을 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거듭 경고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10월초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이미 약화된 북한의 군사력 때문에 유엔군과 국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쾌속으로 진격했다. 10월20일 평양을 장악하고, 24일 청천강을 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을 눈앞에 두었고, 동부전선에서도 청진 지역까지 진출했다.

1950년 9월 15일 LST 이용해 유엔군은 인천에 있는 해변에 상륙해 장비와 병력을 내리고 있다.( AP Photo)

이상하게도 맥아더는 중국의 경고를 계속 무시했다. 10월에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은 11월 하순에 전면적으로 공격에 나섰고, 미군은 패주를 거듭했다. 맥아더가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 라고 할 정도로 전세는 뒤바뀌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은 세계 최초의 전쟁이 되었다.

1950년 12월 4일 중국군의 개입으로 북한  평양 대동강  부서진 다리위를 위험하게 건너는 피란민들(AP Photo)

중국군의 참전으로 미군은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맛보았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중국군에게 내주었다.(1・4 후퇴)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맥아더의 강력한 요청으로 원자폭탄의 사용을 포함한 화학무기의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한 영국등 여러 나라의 반대와 압력으로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확전론자인 맥아더는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중국의 남진은 리지웨어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택-제천 선에서 저지되었다. 유엔군은 반격을 거듭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하순에는 문산-임진각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일진일퇴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지루한 휴전 협상과 평화 정착을 위한 정치회의

미국은 휴전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1951년 6월 23일 말리크 소련 대표가 유엔에서 휴전협정을 제한 했다. 그리고 7월 부터 휴전협정이 개기 되었다. 휴전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2년간이나 끌어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것은 이 전쟁이 이데올로기 전쟁이자 강대국의 자존심과 직결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휴전형상은 휴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4개월을 끌없다. 그것이 해결되자 포로문제가 18개월이나 휴전을 지연시켰다. 중국군과 북한측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자동 송환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 측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자고 맞섰다. 한 때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협상은 위기를 맞는 듯 했다. 결국 양측은 타협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맺였다.

휴전협정을 체결에는 미군 대표와 중국군 대표, 북한측 대표가 서명했을 뿐, 한국 대표는 서명하지 않았다. 휴전협정은 휴전에 합의했을 뿐이어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휴전협정 60항은 전 외국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정 조인 후 3개월 내에 정치회의를 열 것을 권고했다.

정치 회의는 계속 미루어지다가 1954년 제너바에서 남한과 유엔군 참전 15개국, 북한・중국・소련 등 19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정치 회의는 예상대로 설전장이 되었고, 하등의 합의를 보지 못한 채 6월 15일 폐막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끌려오다시피 한 한국 대표 변영태 외무부 장관이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과 상층되는 14개 조항으로 된 평화적 통일방안을 제시했다는 것은 국내의 평화통일론자들을 고무 시켰다. 한편 1953년 10월 1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한국전쟁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AP Photo)

 

한국 전쟁의 집단학살

 

전쟁은 대규모 집단 학살을 수반한다. 전쟁 초기의 학살로는 형무소 재소자 학살과 보도연맹원 학살이 규모가 컸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 학살은 경찰과 군에 의해 7월 초 평택 부근에서부터 시작되어 인민군이 들어오지 못한 경상남도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자행되었다. 이 대학살로 최소한 5만 명 이상, 많은면 1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보도연맹원 과 형무소 재소자 집단 학살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학살은 빨치산 등 좌익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인사 및 전향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그해 말 가입자 수가 30만명에 달했다. 주로 사상적 낙인자를 대상으로 했고, 거의 강제적이었으며,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형무소 정치범 처형은 2000년 1월 초 공개된 미국 문서 가운데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1800명이 3일간 군경에 의해 학살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학살은 대구형무소, 부산형무소, 마산형무소 등에서도 있었다.

 

 

1950년 9월 대전교도소에서  북한군들이 후퇴하기 전 자신들의 무덤을 파게하고 민간인 400명을 학살했다.  (AP Photo)

 

중국이 남아할 때에도 큰 피해가 있었다. 중국군이 물밀듯이 내려오자 정부는 청장년들을 국민방위군으로 편성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보급품 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가운데 혹한 속에 무리한 이동을 강요하여 집결지인 영남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청장년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국민방위군 사령부 간부들은 장병들에게 지급될 군수물자와 군량미를 대대적으로 착복했다.(국민방위군 사건)

1951년 2월을 전후해서는 빨치산 토벌을 맡은 11사단(사단장 최덕신)에 의해 전남 함평, 전북 고창, 경남 거창과 산청 등지의 주민이 집단 학살되었다. 특히 공비 토벌을 위해 주둔해 있던 국군이 무고한 양민들을 공비로 몰아서 열살도 안 되는 어린아이 313명을 비롯하여 무려 719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거창 양민학살 사건은 국회에서 진상 조사에 나서는 등 정치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학살로 인한 고통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과 월북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몰려 감시를 받고 시달렸다. 그들은 공직은 물론이고 일반 기업에 취직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어 1980년대까지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다.

 

한국 전쟁의 피해

전쟁은 학살 말고도 남과 북에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주었다. 인민군이 진주한 남한 지역에는 인민위원회 등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가 대량으로 산출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대패질하듯 순식간에 밀리고 밀고 해서 주민들의 고통이 몇 배로 컸다. 중국군이 공격할 때 유엔군은 북의 주민들을 남으로 피란하도록 했고, 정부는 중부 지방 주민들을 대규모로 피란 가게 했다. 이 때문에 남북 이산가족과 남남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는데, 남남 이산가족 중에는 고아가 많았다. 전쟁미망인과 상인군인도 거리를 헤맸다.

 

한국전쟁은 전쟁에 의한 통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했다. 그런가 하면 남과 북에 극단적인 정치체계가 들어서게 하는데 일조했다. 또한 학살, 부역자, 연좌제는 끔찍한 공포의 기억을 되살려 전쟁에서의 다른 고통과 함께 극우반공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사회를 만들어 냈다. 전쟁은 주민들의 평준화를 초래하는 데 일역을 맡았다. 전쟁으로 인한 육군의 팽창은 거대 조직을 탄생시켰고, 이 조직은 권력을 탐냈고, 5.16 쿠테타로 훔치는데 성공했다. 

<출처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