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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문・사회・역사

십자군 전쟁 -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4

by 파장 2015. 6. 29.

무역로를 가로 막는 기독교 왕궁, 이슬람 영웅 살라딘과 하틴 전투 승리

 

1183년 살라딘은살라딘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전쟁 준비를 모두 마친다. 12세기 이슬람 지도자의 야망은 십자군 왕국 하늘 위로 짙게 드리워져 기독교 왕국을 위협했다. 살라딘의 권력의 힘이 커질수록 기독교인들의 두려움도 커져 갔다. 그는 통찰력과 용맹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살라딘 왕국은 금방 두 배로 늘어났고, 기독교인들은 그의 군사들이 머지 않아 그의 대군이 우리 왕국을 공격할 것이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슬람이 통일될 무렵 예루살렘 왕국은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어릴 때 부터 앓고 있던 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하루는 보두앵이 친구들과 함께 놀이를 하다가 서로의 팔을 꼬집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아파했지만 보두앵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의 병은 더욱 심해졌고, 치명적인 나병으로 고통스러워 했고, 날이 갈 수록 병증은 악화 되었다.

하틴 전투 이후에 살라딘에게 생포된 기 드 뤼지냥. 의자에 앉은 인물중 오른쪽입니다

 

보두앵 4세의 병이 심각해 지면서 더 이상 왕국을 통치할 수 없었다. 1183년 가을 보두앵 4세는 병석에 누운체 매형인 ‘기 드 리진영’ 을 섭장자로 임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통치력을 의심 했지만 그는 살라딘을 물리치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겠다고 결심한다. 그를 도와 살라딘 제거에 나설 동료가 있었으니, 잔혹한 성격으로 악명 높은 ‘르노드  샤티옹’ 이었다. 바로 그가 지체되어 왔던 전쟁의 불씨를 당긴 인물이다.

 

르노드 드 샤티옹은 1125년 전후 프랑스 북부 샹파뉴 지방의 소영주 가문에서 분가된 집안의 아들로 때어났다. 1181년 다마스쿠스에서 남하하는 이슬람 순례자들을 학살 하면서 이슬람과의 휴전 조약이 파기되어 소강 상태에 있던 전쟁의 불씨를 당겼다. 샤티옹은 ‘고삐 풀린 개’ 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40년간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인들이 시리아와 이집트의 무역로을 오갈때 그들의 영토를 지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하지만 1187년 1월 샤티옹이 약속을 어기고 만다. 명분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이슬람 상인을 공격해서 귀족과 부녀자들을 포로로 잡고 재물을 약탈했다. 샤티옹은 조약을 위반하고 재물과 가축, 무기를 약탈했다. 이슬람 여행자들을 모두 감금한 뒤 그들을 고문하고 학대했다. 이슬람 상인들이 조약을 언급하자 샤티옹은 ‘그런 애기는 마호메트에게 해라’ 라며 조롱했다.

 

소식을 들은 살라딘은 분개했고, 무장도 하지 않는 순례자들을 공격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살라딘는 ‘어떻게 해서든 샤티옹을 머리를 베고 말 것이라고’ 결심한다. 그날의 기습은 살라딘에게 전쟁의 명분을 재공했다. 그는 가능한 제국의 곳곳에서 병력을 집결 시켰다. 2만병의 보병과 1만의 기병을 이끌고 살라딘을 갈리리 유역의 하틴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 살라딘은 이슬람 세력을 통일하기 위해 내부 세력들이 전쟁을 벌여왔던 여러명의 이슬람 지도자중 한 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하틴 전투에서 그의 위력을 기독교인 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187년 6월 하틴의 넓은 평원에서 살라딘의 군사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로 부터 몰려든 수만의 기병과 보병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들었다.

 

예루살렘 왕은 살라딘의 선전 포고해 응해야 했다. 그도 역시 왕국의 성곽과 도시로 부터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템플 및 구호 기사단을 포함한 1,300명의 기사들과 15,000명의 보병이 집결했다. 그리고 세포리아 라는 지역이 십자군 들이 집결한 장소였다. 언제나 처럼 그들은 성스러운 유물 성 십자가를 가져왔다. 그 십자가가 그들을 보호하고 승리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다. 지금 까지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스러운 유물 십자가를 믿고 있었다. 지금도 예루살렘 한 조용한 사원에 성 십자가의 일부가 금으로 된 성물함 안에 보관되어 있다.

 

신이 그들과 함께 있다고 확인 하면서 기 와 레라드의 군사들은 행군을 계속했다. 7월 3일 십자군들은 세포리아 진영을 떠나 출정했다. 초반 행군은 순조로워지만 날이 갈수록 찌는듯한 더위가 그들을 괴롭혔다. 물도 마시지 못하고 불모지를 행군하던 병사들은 탈수증에 시달렸다. 

 

병사들은 더위 때문에 몹시 괴로워 했다. 군대는 점차 응집력을 잃고 느슨해 갔다. 거대한 기차가 추진력을 잃어 가듯이 그들의 행군 속도도 점차 느려졌고, 광활한 평원에서 그들은 물도, 식량도 구할 수 없었다. 갈증에 고통스러워 하던 십자군 병사들 앞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갈리레 호가 나타났다. 십자군 병사들은 물을 마실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호수쪽으로 길을 뚫기 위해 전진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그들의 의도를 미리 알아채고 길목에 이슬람 군사들을 배치 했다. 살라딘 군사들은 십자군과 호수 사이에 장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기 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물을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은 살라딘 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슬람군의 공격에 그들은 계속 쓰러져 갔다. 날이 저물자 살라딘은 또 하나의 작전을 실행해 옮겼다. 여름에 이곳의 풀은 말라있어 불이 붙기 쉬웠다. 살라딘은 여기에 불을 질렀고 바람을 타고온 연기에 이미 목말라 있던 십자군 병사들의 목은 더욱 타들어 갔다. 살라딘 병사들은 끔찌한 소음을 내면서 그들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북과 심벌즈, 이슬람군의 함성 소리에 시달렸다. 적에게 포위된채 죽을 시간만을 기다려야 하는 그들의 공포감은 극도로 커졌다. 

 

7월 4일 아침 십자군은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들은 철기시대 요새였던 하틴의 분화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구릉 지대까지 올라와 분화구에 기 와 레나르의 붉은색 막사를 세웠다. 성스러운 십자가가 들어있는 성물함도 기 의 붉은색 막사에 보관했다. 십자군의 진영이 무너지자 이슬람군이 마지막 일격을 위해 다가왔다. 승리를 확신한 살라딘은 기 와 레나르를 생포하고 붉은색 막사를 철거 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술탄의 옆에서 우리 군위 위세(威勢)에 눌려 달아난 프랑크군을 지켜 보았다. ‘우리가 승리 했습니다.’ 내가 기뻐하며 말했지만 술탄이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막사가 무너지기 전까지 아니다.’ 말하기 무섭게 막사는 무너졌다.”

 

성 십자가는 이슬람 손에 넘어 갔고, 십자군과의 전투는 살라딘의 완승으로 끝나는듯 했다. 1087년 7월 하틴 전투는 끝이 났다.

살라딘은 기독교 군을 격퇴했다. 이제 그의 숙제 레나드를 대면하는 일 만 남았다. 살라딘은 그가 이슬람 대상에게 저지른 만행을 되 감아주고 싶었다. 살라딘은 사로잡은 레나르 샤티옹과 프랭크족 왕 기 드 뤼지영을 불러들이 도록 명령했다. 기 왕이 갈증을 호소하자 술탄은 물 한잔 주어 마시게 했다. 물을 마신 후 기 왕은 물잔을 레라드 샤티옹네게 건넸다. 그러자 술탐이 왕에게 말했다. “저 사악한 자에게는 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를 살려두지 않겠다. 그리고 단 숨에 레나드의 목을 베어 버렸다. 기 왕은 이제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살라딘은 기 왕에게 매우 친절한 말로 “왕는 다른 왕을 죽이지 않는다. 다만 사악한 레나드는 죽어 마땅한 것을 저질렀기에 죽인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이런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살라딘은 십자군 왕국의 정예 기사로 이슬람군에 대앙한 구호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술탄은 기독교 세력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모든 기사들을 잡아 한 명도 예외 없이 처형 하도록 명령했다. 십자군이 자랑하는 유능한 기사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하틴 전투 패배 이후 성지 내의 십자군 도시들은 혼란에 휩쌓였다. 기 와 예루살렘 왕국은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이슬람군은 모든 성과 도시를 약탈했다. 모든 주사위를 한 손에 모아 던졌지만 결국 실폐로 돌아간 상황 이었다. 십자군은 전멸(全滅) 했고,  예루살렘 왕은 이슬람의 포로가 되었다. 마침내 살라딘의 꿈이 이루워 진 것이다. 

 

하틴 전투의 승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번 승리로 살라딘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이슬람 통일을 위해 바쳤던 그의 노고가 빛을 바라는 순간 이었다. 그는 결국 이슬람이 갈구(渴求)하는 승리를 손에 넣었다. 

 

“우리는 운명의 잔을 들이켰고 무수한 창들이 우리를 뒤따랐다. 용맹한 말들은 천둥같은 울음 소리와 함께 거대한 먼지 구름을 만들며 달렸고 날까로운 창검(槍劍)은 섬광같은 빛을 바랬다. 오늘은 이교도들의 종말을 고하는 날이다. 신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끄셨다.”

 

하틴 전투에서 포획한 성 십자가의 성물함은 다마스쿠스 시내를 돌아 다니며 전시되 기독교인들에게 치욕감을 안겼다. 이러한 십자군 패배는 이미 2년전 기독교의 역사가인 기 윰 드 티레에 위해 예견된 것이다. “근자의 십자군 왕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비극적인 참사에 못 이겨 나는 후세에 전해 주기 위해 기록했던 연대기 편찬 작업을 중단하고 무덤과 같은 침묵을 견디기로 결심했다.” 기 윰 드티레는 기독교인들이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살욕에 치을 떨고 있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아크레, 사이사레아, 자파가 차례로 무너졌다. 1087년 10월 이슬람군은 가장 중요한 목표물인 예루살렘에 당도했다. 그들은 성 밖에 진지를 구축하고 도성 포위를 준비했다. 주민들은 이슬람군의 자비를 애원했지만, 1099년 1차 십자군이 그랬던 것 처럼 살라딘도 모든 기독교인 들을 학살하고 싶어 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살라딘의 강력한 대군의 힘을 당해내지 못 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살라딘이 도시를 공격하면 이슬람의 성소인 알-아크샤 사원을 파괴 하겠다고 협박하며 교묘한 심리전을 펼쳤다.  살라딘은 고심끝에 몸 값을 받고 기독교인들을 살려 주기로 했다. 조약이 타결되고 평화적으로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다.

 

살라딘의 승리는 위대했다. 살라딘이 아랍에서 위대한 추앙받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되찾은 뒤에도 십자군과 같은 보복적인 학살을 금지 했고, 기독교인들에게 도시의 출입을 허용하면서 예루살렘을 더욱 번영 시켰기 때문이다. 1차 십자군 때와 다르게 평화로운 방법으로 예루살렘은 이슬람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징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모욕했다. 1187년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입성 했을때 그들은 가장 먼저 바위사원 꼭대기의 십자가를 떼어내어 예루살렘 거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발로 차며 침을 배었다고 한다.   

 

십자군 왕국이 모두 함락됬다.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 진영은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머지 않아 3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다.

 

 

하틴전투 패배로 이슬람 함락과 제3차 십자군 원정

 

1087년 하틴 전투 패배와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유럽을 뒤흔들었다. 이 소식을 듣자 마자 교황 그레고우스 8세는 3차 십자군 원정을 천명한다. 온전한 정신과 충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자라면 이 같은 처참한 소식을 듣고 슬픔을 억누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에 대해 “ 저 사악한 야만인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피를 탐하고 칼로서 신성한 장소를 모독 했으며 성지에서 기독교를 몰아냈다.” 고 말했다.

 

3차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이 2차 십자군 원정과 다른 것이다. 하틴 전투 패배와 예루살렘 함락은 서유럽에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유럽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원정대를 모집했다. 1089년 5월, 황제 프리드히 1세가 이끄는 10만 대군이 독일을 출발했다. 신성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히 1세는 서유럽 최고의 권력자 였다. 45년간 황제로 있으면서 2차 십자군 원정에서 3차 원정때까지 살아 있었던 소수의 지도자중 하나 였다. 기독교 세력의 마지막 카드 프리드히 1세가 출정한다는 소식에 살라딘도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히 1세는 원정길 도중 강을 건나다 익사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의 군사 대부분은 의욕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제 십자군의 수장 자리는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 33살의 청년 리처드 1세에게 돌아갔다. 흔이들 리처드 1세를 잉글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신화적인 존재로 생각 한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프랑스인 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의 영지는 거의 프랑스에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통치했던 앙주 제국의 영토는 잉그랜드, 현재 프랑스에 걸쳐 있다.

 

에노오노르의 아들인 리차드 1세는 이미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생애 대부분을 전정터에서 보낸 그는 전쟁에서 군자금의 확보가 최우선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차드 1세는 십자군 원정에 목표를 이룰려면 무엇보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모든 경로를 통해 돈을 모우기 시작했다. 3차 십자군 원정의 재정 마련을 위해 살라딘 11조 라는 세법이 신설되었다. 리차드는 모든 사유재산을 매각했다. 성과 도시, 통치권 까지 모두 팔아 전쟁 물자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가능하다면 런던 까지 팔 거라는 말 까지 돌 정도였다.

 

리차드 1세는 2차 십자군 원정의 과오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탄탄한 조직력과 강력한 무기를 같고 있는 군대를 원했다. 14개월간의 준비 끝에 리차드 1세는 드디어 십자군 원정길에 오른다. 한편 두려울게 없는 살라딘은 이미 자신의 적수가 아니라고 판단 했기 때문에 하틴 전투에서 사로잡은 기 드 뤼지영을, 다시는 살라딘을 향해 칼을 뽑지 않을 것과 영원히 그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 받고 석방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어기고 신을 벌을 받았다.

 

기 는 살라딘과의 약속을 어기고 남아 있는 군사들을 모아 왕권을 회복하고 왕국을 세우려 했다. 기 는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기독교 세계에서도 버려진 인물이었다. 기는 실축돈 명예를 회복하려면 무엇가 업적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레반트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 아크레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왕국을 잃은 왕은 새로운 영토가 필요했다.

 

아크레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 살라딘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400명의 기사와 7천명의 보병을 이끌고 기 는 아크레 탈환을 준비한다. 아크레의 프라이 타워, 방파제에 그는 병사들은 둥글게 배치한 후 도시 전체를 포위했다. 아크레의 이슬람군들은 공성기를 이용해 돌덩이와 십지어 시체의 일부를 날려 보냈다. 소식을 들은 살라딘은 지원군을 보내 도시 방어를 돕게 했다. 살라딘의 군사들이 합세하자 기 의 군사들은 도시로 들어 갈 수 없었다.

 

리처드 1세 아크레 도착해서 아크레 점령

그 이후 2년 동안이나 이슬람군과 십자군의 지루한 전쟁이 이어졌다. 기 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는 벗어나기 위한 지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처드 1세가 이끄는 1만 7천 규모의 십자군 도착이 머지 않았다. 1191년 6월 수개월 간의 철저한 준비와 1년간의 머나먼 행군 끝에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가 아크레에 도착하자 십자군은 열열히 환영했다. 하지만 그의 출연은 이슬람군에 놀라운 충격이 되었다.

리처드 1세와 그의 군대는 지쳐있는 기독교군의 원기를 회복 시켰다. 군대의 통수권을 잡은 리처드 1세는 몇 주 후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전선을 타개한다. 리처드 1세는 유럽의 첨단 군사 기술을 사용해서 거대한 공성용 투석기를 운반해 왔는데 병사들은 이것을 동료와 같이 친밀하게 느껴서 ‘하느님의 투석기’ 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신의 유력을 적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였다.

 

분해되어 운반된 공성용 투석기는 중동에서 다시 조립되어 아크레에서 십자군의 화력을 증강 시켰고 덕분에 쉽게 성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라딘도 이들의 공격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한 시리아 병사가 중세의 네이팜탄 같은 그리스 화약을 만들자고 제안 했다. 원유에 끈적한 나무의 진핵을 썩어 만든 그리스 화약은 닿기만 하면 모조리 때워 버리는 위력적인 화약이었다. 이 화약은 만들기가 까다로운데, 가장 중요한 성분은 나프타 이다. 화약이 터지면 불꽃이 이리저리 뛸 뿐만 아니라 나프타의 끈적거리는 성질 때문에 닿기만 하면 머든지 불때워서 잿가루로 변하게 만들었다.

 

십자군 진영을 향해 그리스 화약이 빗발쳤다. 마침내 세개의 거대한 궁성탑에 불이 붙으면서 리처드는 위기를 맞이했다. 유성처럼 떨어지는 그리스 화약이 목표물을 명중해서 모두다 태워 버렸다. 중요한 무기를 잃고만 리처드는 다급하게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그는 탑의 및 바닥에서 돌을 빼오는 병사에게 돌 한 개당 금화 4개를 주겠다고 제안 했다. 리처드 1세는 성벽을 뚫기위해 노력했다. 성벽의 돌을 빼내 통로를 만들어 도시로 침입하기 위해서 였다.

 

5주간의 전투 끝에 리처드 1세의 군대가 드디어 성벽을 뚫고 들어가 아크레를 점령하고 이슬람군 2천 7백명을 생포했다. 살라딘의 연승 행진에 마침내 제동이 걸렸다. 바하 알 딘은 패배의 충격에 빠진 술탄 살라딘을 위로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 처럼 비통해 했다. 성심을 다해 위로한 뒤 살라딘에게 팔레스타나와 예루살렘을 지켜서 이슬람 백성을 보호 해야 하다고 충고했다.

 

십자군과 리처드 1세는 아크레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함으로 인해 기독교 세계 전체에 퍼졌고 ‘사자심왕’ 이라는 새로운 별명도 같게 되었다. 이제 3차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행군 할 때였다. 하지만 리처드 1세는 수 천명의 포로들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그는 살라딘에게 금화 20만개와 성 십자가를 보내면 이슬람 포로들을 풀어 주겠다고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협상이 지연되면서 사자심왕 리처드는 살라딘이 포로들을 이용해서 십자군을 지치게 만드는 속셈이란 것을 깨닫았다. 분노가 극해 달한 리처드 1세는 마침내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는다. 그날 아크레에서 리처드 1세가 취한 행동은 십자군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십자군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왔던 이슬람 포로들을 모두 끌고 나와 단칼에 죽이고 말았다. 아크레에서 이슬람 포로들이 무참히 학살된 사건은 지금 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리처드 1세는 말 할 수 없는 포학하고 냉정한 인간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포로들을 먹이고 감시 하는데 많은 비용과 병력이 필요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풀어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작혹한 학살 이었지만 군기를 다시 회복해서 예루살렘으로 행군을 계속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기가 충천한 십자군 1만 2천 병사들은 1192년 8월 아크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남진했다. 살라딘은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남진을 막아야 했다. 예루살렘을 잃으면 이슬람 세계에서 그의 권자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아크레를 떠날 당시 십자군은 모두 이슬람군을 완전히 격파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들의 행군 대형은 매우 특히했다. 육지 쪽으로는 보병들이 기병대를 호위 했고, 기병대의 앞쪽에는 템플 기사단이, 뒤쪽에는 구호 기사단이 배치 되었다. 가장 강력한 병력이 취약 부분을 엄호하는 형태였다. 기병대와 바다 사이에는 방어 하기가 가장 까다롭다던 군수품 전차를 배치 했고, 마지막으로 바다에는 군 장비를 실은 십자군 함대가 떠 있었다. 완벽한 군사 배치였다.

 

3차 십자군은 두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과 리처드 1세 로 축약될 수 있었다. 둘은 모두 최고의 전사이자 전략가, 정치가 였다. 살라딘은 십자군에게 전투를 부추겼다. 하지만 빗 발치는 화살에도 리처드는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군 지도자로써 리처드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은 극에 달해 이었다. 그런 빗발치는 화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행군을 계속했다. 화살 열개를 맞고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은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십자군의 행군을 저지 하려는 살라딘의 전략은 실폐하고 말았다. 바로 이 부분의 리처드의 타고난 군 지도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살라딘의 맹추격에도 살아남은 리처드의 군대는 1191년 9월 십자군 도시 ‘자파’에 도착한다. 한 달후 십자군은 자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이제 성지가 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순간 리처드는 모든 병사를 충격에 빠뜨리고, 오늘날 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놀라운 결정을 하게 된다. 리처드는 자파에서 예루살렘 까지 45마일 중 몇 마일을 남겨 놓고 멈춰섰다. 예루살렘을 탈환해도 지켜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참전했던 병사들은 리처드의 결정에 몹시 분노했다. 하지만 이들을 무시하고 회군을 명령했다. 리처드 1세는 1만 2천 병력으로는 이슬람 전역에서 동원된 살라딘 대군과 맞서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3차 십자군 임무가 실폐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리처드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그곳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는 군 통수권자였고 왕이었다. 십자군 전력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을 힘이 없었다. 설령 되찾는다고 해도 그 곳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192년 봄, 리처드는 8개월 전에 점령했던 해안도시 아크레로 철군했다. 그는 이후의 십자군의 길을 터주기 위해 해안 도시들을 모두 병합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결심으로 그의 숙적 살라딘을 자극한다.

 

예루살렘의 방어에 전력 투구할 필요가 없는 살라딘은 지금의 캐라이브 해안도시 자파를 기습공격 했다. 십자군이 모든 해안 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위해 살라딘은 자파에 군사들을 보내 도시를 포위한채 빠르게 도시로 침투했다. 다급해진 수비대들은 아크레에 머물고 있던 리처드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리처드는 신속하게 대체 했다. 그는 단 55명의 기사들과 석궁 사수들을 이끌고 자파로 향했다. 해안가에 상륙한 순간부터 리처드의 뛰어난 지도력이 다시 한 번 발휘된다. 십자군은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했지만 리처드는 굽힐줄 모르는 용맹을 과시하며 살라딘이 보는 앞에서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쟁에서 서로를 매우 존경했던 것으로 보여지다. 살라딘은 리처드가 매우 훌룡한 장군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리처드 역시 살라딘이 이슬람을 통일한 위대한 지도자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리처드가 해안가에서 이슬람군을 도시로 유인하자 살라딘은 다시 한 번 그의 능력에 탄복한다. 거리 곳곳에서 십자군과 살라딘 군대의 전투가 계속됬다. 그러던 중 이슬람군 화살이 리처드가 탄 말에 명중했다. 리처드가 위험에 처하자 살라딘은 그에게 다른 말을 갔다 주도록 명령했다. 전투가 계속 되면서 양쪽 군사들은 모두 지쳐 갔다. 하지만 결국 리처드의 정예 부대가 능력을 발휘 하면서 살라딘의 군사들이 후퇴했다. 

 

1192년 9월 까지 양진영의 전투는 답보 상태였다. 이 때 살라딘의 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계속 전쟁을 수행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군사들은 외국에서 온 용병이 아니라 이슬람 지역에서 징병된 사람들 이었고 임금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멀지 않는 곳에 고향과 가족, 재산, 토지가 있는 사람들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데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살라딘은 사자심왕 리처드와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한다. 기독계 세력은 자파에서 아크레 까지의 해안 도시들을 지배하고 예루살렘은 이슬람이 지배하는 조건 이었다. 다만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 방문 하는 것은 허용 되었다. 그렇지만 리처드는 정작 성묘 교회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한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살라딘과 사자심왕 리처드왕 죽음으로 십자군원정 실패

 

1192년 10월 리처드 1세가 유럽으로 떠났고, 그는 살라딘에게 사절을 보내 군자금과 병력이 확보하면 반드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고 천명한다. 이에 살라딘은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잃을 운명 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리처드에게 넘어가길 바란다. 라고 했다. 그로 부터 6개월 후인 1193년 3월 살라딘은 56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5년간 쉬지않고 전투와 행군에 쇠약해진 것이 원인 이었다. ‘바하 알 딘’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 했다. “내가 도착 했을때 그는 이미 죽어 신의 곁으로 가고 있었다. 모든 성과 도시, 그리고 나라가 위대한 술탄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모든 사람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신께 그를 도와 달라고 간곡히 기도 했다.” 살라딘의 위대한 업적은 예루살렘을 되찾은 거라고 볼 수 있다. 중동의 모슨 이슬람인들이 염원했던 일을 그가 해낸 것이다.

 

사자심왕 리처드로써는 그가 성지를 떠난지 얼마 않되서 살라딘이 죽은 것이 안타까울뿐이었다. 리처드가 그 해 겨울 까지만 버텨더라도 예루살렘을 되찾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라딘 사후 이슬람 세계는 세력 다툼으로 분열 했기 때문에 리처드로써는 더 없이 좋은 기회를 놓인셈 이었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다시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1199년 유럽에서의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십자군 이후 1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성지를 되찾겠다는 목적은 끝내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십자군 원정의 유일한 성공은 제1차 원정 뿐이었다. 12세기와 13세기 내내 십자군은 단 한 번도 이슬람군을 압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매번 전쟁에서 패하면서도 성지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포기 하지 않았지만 끝내 목표을 이루질 못했다.

 

1291년 기독교의 마지막 전초 기지인 아크레가 함락 당한다. 200년간 지속된 성지 지배는 완정히 끝이난다. 하지만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십자군은 아랍 사회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이슬람을 침입한 야만족, 십자군의 만행은 마치 어제 일어난 일 인듯 아직도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또한 서구 세력이 이슬람 지역을 침범할 때마다 사람들은 십자군이 또 다시 일어 났다고 말한다. 

 

1차 십자군 성공 이후 기독교 세력은 성지를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1137년 예루살렘이 살라딘에 함락되고 기독교의 성지 지배는 막을 내린다.  거대한 두 문명이 대결했던 십자군 전쟁, 그들은 각기 신의 이름을 걸고 성지 지배를 위해 싸웠다. 당시 이들이 흘린 피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를 영원히 정리 내렸다. 

 

“십자가와 초승달, 이미 천년이 지난 두 신앙의 충돌은 오늘날 까지도 짖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직 까지도 피를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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