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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사진과 글

인도는 어떻게 종교의 나라가 되었나?

by 파장 2015. 11. 10.

 

 

통합의 종교, 힌두교와 불교

 

힌두교

 

힌두교는 그 창시자가 없다. 또 로마 교회와 같은 전체 통일된 조직도 없다. 또 다른 어떤 종교에 비해 물질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이 뚜렷하면서도 동시에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사상이 매우 발달해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그 주변에 문화, 건축, 미술, 음악 등이 매우 광범위하게 발달해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교의 체계가 단일적이지 않고 매우 복합적이고 그래서 상호 모순되는 면들이 공존하고 있다.

 

종교의 주된 가르침이 단일적이지 않기 때문에 힌두교 에는 개종이나 박해 라는 문제가 없다. 힌두교는 어휘 안에는 종교를 선택한다는 의미도 없거니와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의미도 있을 수 없고 대립이나 원칙이라는 의미도 없다. 다만 이 땅에서 때어나면서 바로 조상으로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세계와 삶의 길에 관한 보편적 심성을 의미할 뿐이다. 

 

그 보편성 안에는 각각이 서로 다른 종교적 가르침이 있을 수 있고, 그 심성이라는 말 안에도 논리와 체계가 물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 다양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양성 안에는 사상과 신화도 포함되고 의례도 포함된다. 특히 힌두교는 진리 추구나 종교적 목표 달성을 위해 이 사회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과 이 사회를 인정하지 않는 쪽의 두 가지 세계관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다양성은 실로 넓고 깊다. 그래서 힌두교는 어느 한쪽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공존의 원칙 안에서 힌두교는 확립되어 고정된 종교로서가 아니라 대립하는 여러 성격들을 역사의 변화에 따라 흡수해 나가는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힌두교의 이해는 역사적 방법에 따라 하는 것이 우선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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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관점과 힌두교적 관점

카스트와 종교의 관계

 

 

불교

 

불교라고 번역이 된 것은 바웃다(Bauddha), 다르마(dharma) 이다. 인도 전통에서 ‘다르마’는 진리, 보편법, 도덕, 종교 이런 의미가 묶여진 것이라서 다르마를 ‘종교’ 라고 번역하면 일반적으로 무방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웃다’ 는 의미가 다르다. ‘바웃다’는 ‘붓다’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가 되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웃다’ 다르마 라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와 그 가르침을 유일한 것으로 위치시키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라 붓다가 되고자 하는 여러 방편인 것이다. 

 

붓다가 지킨 중도의 토대 위에서 법에 대한 믿음은 여러가지 방편의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생긴 새로움은 변질이 아닌 변화로 간주되어 오는 것이 불교의 전통이다. 이것이 불교 정체성의 시원(始原)이다. 따라서 불교는 새로운 경전을 장착하고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붓다의 교리와 완전히 배타적이고 모순적인 것도 충분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석가모니 붓다가 설파한 것을 유일한 진리로 삼고 그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석가모니 붓다는 붓다가 되기 위한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을 제시해 준 여러 붓다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석가모니 붓다의 말을 따르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 붓다 이외에도 신격화된 또 다른 붓다나 보살 혹은 여러 신을 믿고 여러 고승이나 스승들이 설파한 것을 따르는 것도 엄연하고 정당하게 인정을 받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근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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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인도 역사에 대한 왜곡은 18세기 유럽의 동양학자들에게 팽배한 오리엔탈리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인에게 인도는 합리적이고 물질적인 유럽에 대해 감성적이고 영적인 것의 재현으로 투사되었다. 이러한 신민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에 대한 반말로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체계에 대해 우월성과 역사적 주체성의 확립을 위해 매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신민주의가들이 설정해 놓은 인도의 정체적이고 신비적인 이미지는 부정하였으나, 그에 대한 반발이 지나쳐 인도를 주권과 자치권에 대한 단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완전한 하나의 실체로 그려내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진 인도는 단일 정체 안에서 계급이나 신민주의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민주의가 구축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본질주의의 담론 안에 갇혀버린 결과였던 것이다.

 

새로운 힌두교의 본질주의 중심에는 인도 사회가 탈세속적 힌두교와 위계적 카스트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는 가설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한국 학계에 힌두교의 본질로 널리 알려진 비폭력-불살생, 채식주의, 관용, 요가, 명상, 깨달음 추구 등은 모두 유럽의 동양학자들이 설정해 놓은 가상의 이미지에 대해 유럽화된 인도 지식인들이 반응한 것일 뿐 역사적 전통에 따라 형성된 실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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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의 왜곡

 

인도사는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 진정한 의미의 역사 연구가 유럽 역사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든 경우에서 그렇듯이 처음 연구를 한 사람의 후세에 대한 영향은 실로 막강한데, 처음으로 인도사를 연구한 제임스 밀(James Mill)이 인도사를 힌두 문명, 무슬림 문명, 영국 문명의 세 시대로 구분하여 버렸다. 통치자들의 종교를 기준으로 인도의 역사를 세 개의 시대로 구분하여 버렸다. 고대와 중세는 종교를 기준으로 했고, 막상 근대는 종교가 아닌 즉 기독교 문명이 아닌 영국 문명이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 해석에 실패한 것이 아니고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왜곡을 시도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제임스 밀은 영국이 들어오기 이전의 인도의 문화 즉 인도인의 종교, 정부 형태, 법률 제도, 사회 제도 등 모든 것을 야만적이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된 사회의 영속성은 전체 군주 아래에서 계속된 사회의 폐쇠성 때문이라고 했다. 제임스 밀의 이러한 시대 구분에 의해 인도는 정체 사회가 되었고, 결국 그 위에서 제국주의 통치가 정당화 되었다. 제임스 밀이 한 통치자 종교를 기준으로 한 시대 구분의 영향은 매우 심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삼단 구분은 인도사의 고대, 중세, 근대의 구분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정이 없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대부분의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와 교사들은 고대사를 무슬림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로 구분하고, 중세사를 영국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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