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사명을 띠고 죽이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마라의 죽음> 1793 캔버스에 유채 165×128 벨기에 왕립미술관
대중에 현실은 암담할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정치라는 것은 대중하고 전혀 무관하지만 시대가 어려울수록 대중들은 자신에게 꿈을 심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시대의 부름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힘은 비약하지만 뭉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대중에 영향력이 큰 사람이 나타났을 때 수구 세력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세상이 자신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을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인은 제거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세상을 새롭게 지배하고자 꿈꾸는 자를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하지 못하기에 역사적인 오점을 남기는 경우가 생긴다.
다비드(1748~1825)의 <마라의 죽음> 이 작품은 1793년 여름 프랑스 혁명 중에 일어난 실화를 배경을 그렸다. 저널리스트이자 급진주의자 마라는 민중의 정치 참여를 고취시켰던 프랑스 정치인이다. 그는 루이 16세가 단두대 형을 받는 데 선봉자 역할을 했을 정도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급진주의 성향은 대중에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프랑스 왕권주의자들에게는 제거해야만 하는 정적이었다.
1793년 귀족 출신의 열렬한 공화당원이었던 여인 샬롯트 코르도네가 거짓 편지를 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피부병으로 욕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조국을 구한다는 이유였다.
혁명정부는 이 사건을 화가 다비드에게 기록해달라고 의뢰한다. 역사적 사실을 집약한 이 작품은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의 구성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화면 위는 희미한 조명으로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으며 화면 아래 욕조에 마라가 왼손에는 편지를 오른손에는 펜을 들고 죽어 있다. 마라의 가슴은 칼에 찔린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욕조 옆에 두었던 수건은 그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욕조 밖에는 그를 찌른 칼이 놓여져 있다. 잉크와 편지가 놓여 있는 탁자에는 ‘마라에게, 다비드가’라는 화가의 사인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화가의 사인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이 작품에서 마라의 죽음의 자세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죽은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이나 그림과 비슷한 피에타 상이다. 그것은 순교자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혁명의 화가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나는 인민의 목소리를 들었노라. 그리고 거기에 따랐노라’라고 했다. 다비드는 마라가 죽은 후 대중에 전시되었던 시체를 보았지만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살해당했던 당시 상황을 그대로 표현했다.
자신을 사랑 못한 사람들의 선택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존 에버렛 밀레이<오필리아> 1851 캔버스에 유채 76×111 런던 데이트 갤러리
사람마다 싦의 무게가 다르듯 삶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지옥 같을 수도 있다. 우리네 삶은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만족을 하는 사람이고 세상을 살아 갈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놓지는 못하리라.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그린 작품이다. 오필리아의 죽음을 둘러싸고 문학적으로 자살이냐 아니냐에 논란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자살로 그려졌다.
오필리아는 햄릿하고 사랑하던 사이다. 햄릿은 왕이 되고자 했던 삼촌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미친 척하고 다닌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햄릿은 그가 미친 것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왕의 명령으로 방에 숨어 있었던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삼촌인 줄 알고 죽인다.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사실을 알고 감당할 수가 없었다. 오필리아는 슬픔이 너무나 커 미치고 만다. 결국 그녀는 물가를 떠돌아다니다가 죽는다.
이 작품 속에 오필리아는 영혼의 안식을 위해 그냥 물 위를 떠돌고 있다. 그녀가 꺾은 꽃은 흩어져 있지만 그것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수면에 반쯤 잠겨 있는 옷은 어두운 색으로 변해버려 물 속으로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존 에버렛 밀레이는 화실 욕조 속에 모델을 보고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욕조 속에 모델을 그렸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풍경은 영국의 에월에 있는 흑스밀 강이다.
명화 속의 삶과 욕망_박희숙 2007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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