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휘둘리는 당신의 굴레
그림 속의 방은 화가 '리우리트 링' 의'코펜하겐에서 세든 조그만한 다락방 화실이다. 완전히 젖여지지 않는 창문의 틈새로 모델을 선 소녀가 얼굴을 내밀어 바깥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네모난 창틀 선과 닾개 창문의 선, 그리고 세로로반호를 그리는 창문지지대의 선이 이중삼중으로 겹겹이 소녀를 가두어 놓는다. 소녀는 창문 틈새로 겨우 바깥세상을 볼 수 있을뿐이다. 그녀의 시선은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마치 주인공이 사랑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굴레' 라는 제목은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쓴『윤리학』의 일부에서 따온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간의 굴레란 한마디로 인간이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뜻한다. 모옴의 주인공 역시 격정의 덫에 매여 있는 사람이었기에, 인간의 굴레'를 제목으로 가져온 것은 참으로 적절했다.
스피노자는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이성의 통제력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성의 힘만으로 어떻게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막겠는가. 격정이 오기도 전에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이 세상에서 몇이나 있겠는가. 사랑의 감정은 늘 세상 저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예고도 없이 괴물처럼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때로 그것은 너무도 광포해서 곁에 있을 때에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고, 오직 나중에 휩쓸고 지나간 상흔만을 볼 뿐이다.
덴마크 화가 Laurits Anderssen Ring(1854-1933)은 'Ring' 이라는 덴마크 시골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링은 19살 때 코펜하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텐마크 아카데미 학생으로 입학했으나 화풍과 규율에 저항했다. 그의 그림은 늘 현실을 향했다. 신화적 판타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진짜 사람, 진짜 풍경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림속의 소녀는 어쩌면 화가의 19살때 풍경을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얼룰일까 무늬일까
인간의 이성은 감정을 통제할 만큼 월등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성이 아니라 느낌이 혹시 해결책이 아닐까? 나는 페르시안 카펫을 끌어들인 모옴의 인생론이 요즘 들어서 조금씩 가슴에 와 닿는다.무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식대로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그때그때의 느낌에 손을 맡겨보아야 격정이 만들어낸 인생의 얼룩은 바로 그 시절에는 보기 싫지만 다 지나고 나면 무늬가 되는 것이다. 느낀 그대로 엮어야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고유의 무늬가 탄생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 르레 마그리트(Rene Magritte)<인간의 조건Ⅰ>의 작품은 난해해서 나름대로 어렴풋이 의미를 짐작할뿐이다. 그림을 보면, 창밖으로는 실제 풍경이 펼쳐져 있고 창안에는 똑같은 풍경을 그린 캔버스가 놓여있다. 풍경과 그림은 아주 꼭 들어 맞아서, 어느 것이 풍경이고 어느 것이 그림인지 가려내기 어렵다. 유리창이라는 틀이, 또 캔버스라는 틀이 풍경 앞에 놓여 있지만, 안과 밖을 명쾌하게 구분하지도 않는다. 그 틀은 마술처럼 한편으로 구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러낸다. 밖의 것이 안에도 있고, 안의 것이 밖에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잘 보기 위해서 타인의 눈을 필요로 하고, 나 자신의 욕망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타인의 촉감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감정이란 막고 통제하려고 하면 굴레가 되지만, 느끼고 만끽하려고 하면 자신을 더 잘 알게 하는 마술의 틀이 되는 것이다.
그림에,마음을 놓다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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