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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그림・전시

나를 찾아 길 위에 서다

by 파장 2012. 7. 3.

기대 반 설렘 반의 떠남

 

에두아르 마네<넝마주이> 1869 캔버스에 유채 195×130 로스앤젤레스 노튼 사이먼 미술관

파리가 예술의 도시로 각광받고 있던 19세기에 그곳으로 모여들던 예술가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인간상은 바로 그런 자유로운 넝마였다. 문예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은 거리에 버려져 쓸모는 없을지 모르나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것들을 예술적 소재로 주워 담는 자라는 의미에서 예술가들을 넝마라고 불렀다. 물론 그 말에는 도시의 거리야말로 풍부한 예술적 상상력의 근원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에는 화가들도 그런 의미에서 거리의 악사, 집시, 떠돌이 곡예사를 종종 그렸다. 그 중 마네는 예술가로서의 자아상을 염두에 두고 ‘넝마’라는 그림을 그렸다.

에두아르 마네는 예술가로서의 자아상을 염두에 두고 <넝마주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 넝마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정신적 자유로움을 즐기는 자이다. 그는 편안한 잠자리를 갖기 위해, 또 따뜻한 수프가 있는 풍성한 식탁을 갖기 위해 시간과 노동을 파는 대신 차라리 길거리에 늘부러져 있는 거친 자유를 선택한다. 넝마에게 길은 곧 삶의 터전이다. 떠나면 길이 되고, 멈추면 집이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마네 자신은 결코 넝마처럼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물질주의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고, 넝마는커녕 차라리 멋쟁이 댄디였다. 마네에게 넝마는 그저 자유로운 예술가에 대한 은유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영등포역에서 보았던 노숙자들도 생각만큼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우두머리가 있는 듯했다. 없는 자들 사이에서도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네의 그림 ‘생 라자르 역, 기차 도착’이 생각난다. 물론 오늘날의 기차는 이 그림 속의 증기기관차처럼 역 전체를 뿌옇게 증기로 가득 채우면서 극적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소독차가 지나가듯 주변을 아무것도 볼 수 없이 온통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당시의 증기기관차는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머나먼 세상에서 출발하여 또다시 알 수 없는 세상 저편으로 사람들을 데려갈 것만 같다. 이상한 연기에 휩싸여 나타났다가 다시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듯 그림 속 기차역은 신비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곳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무슨 특별한 것과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유로운 삶은 토마스 모어가 지은 ‘유토피아’(1516)에서도 언급된다. 유토피아는 단순한 쾌락의 장소가 아니다. 그 곳은 복숭아꽃 향기 가득한 무릉도원도 아니고, 황금 강이 흐르는 엘도라도도 아니다. 유토피아에서의 행복한 삶이란 시간을 단순히 흥청망청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고 채워나가는 것에 있으며,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즐거운 일을 하며 지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자기 시간을 지적이고 보람된 활동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여기서도 아이러니가 발견된다. 모든 시민의 자유로운 시간을 보장해주기 위해 유토피아에서는 노예제도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나 잡일, 소의 도살 등 선택할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일은 모두 노예의 몫이었다. 자유는 유토피아에서조차 모두에게 열린 길이 아니었나보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자기가 택한 길 전체를 볼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내리게 될 종착역은 목적지와 다를 수 있다는 것, 여기까지만 생각해봤을 뿐이다. 간혹 한 번쯤 간이역에 내려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미로에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미로는 길이 아니다.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고, 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에 대해 너무 오래 의심하지는 말자. 잘 가던 기차마저 놓쳐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림에, 마음을 놓다.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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