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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그림・전시

세상밖으로 다시 나온 서양화가 이쾌대

by 파장 2015. 7. 19.

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 , &nbsp;1948 ~49, Oil on canvas,&nbsp;72 cm X 60 cm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두루마기 차림의 화가가 중절모를 쓰고 전통 붓을 든 채 우리네 시골을 배경으로 서있다. 그림은 해방 직후인 1948~1949년에 그렸으리라 추정하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에서 혼돈의 시대를 사는 화가의 고뇌가, 그래도 눈 뜨고 현실을 마주하겠다는 의지가 함께 보인다.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군에서 부유한 대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사에서는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손꼽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월북 화가라는 이유로 언급조차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휘문고를 졸업하고 1933년 일본에 건나가 제국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유명 전람회에서 3년 연속 입선하며 주목을 받았고, 귀국해서는 이중섭, 최재덕 등과 협화를 결성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쾌대 < 2인 초상 >, 1939. Oil on canvas,72cm x 53cm

 

이쾌대 <무희의 휴식>, &nbsp;1938, Oil on canvas, 116.7&times;91㎝

 

 

 

혼돈의 시절 치열한 삶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는 동안 이 땅은 새로운 문물과 가치관이 유입되면서 격변을 겪었다. 여전히 구한말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과 하루라도 빨리 서양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람이 혼재해 우왕자왕했다. 청년 예술가 이쾌대는 조선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자신이 무엇을 그릴 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가 북한으로 간 마흔 살까지 수없이 바뀌는 화풍이 이를 말해 준다. 이쾌대의 작품에서는 들라크루아, 미켈란젤로, 세잔, 푸생 등 개성이 다른 여러 화가의 그림자가 보이는 한편, 우리 고유의 것을 화폭에 가져오기 위해 실험한 흔적들도 역력하다. 

 

부녀도 갠버스 유채 73cm X 60.7 cm, &nbsp;1940년

 

이쾌대 < 카드 놀이하는 부부 >

 

이쾌대 <봄처녀> Oil on canvas, 1940년대 말, 45.7Cm X 38.3cm

 

 

역사의 비극이 개인의 비극이 되었다.

해방 이후 좌우의 이념 대립이 극심해지고 끝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몸이 편찮은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 때문에 피란을 가지 못했다. 역사의 비극은 곧 개인의 비극이 되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그를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 부역에 동원했고, 서울이 수복되면서 이번엔 국군이 그를 체포해 부산의 수용소로 보냈다. 3년간 수감된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쾌대는 1953년 남북한 포로 교환 당시 북한행을 택했다. 그리고 1965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그 이유를 알기가 어려웠다.

 

이쾌대 < 첼로 연주자>

 

이쾌대 < 자화상 >

 

 

다시 세상밖으로 나온 서양화가 이쾌대

이쾌도가 북으로 간 이후 그의 아내 유갑봉과 자녀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며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갔다. 이쾌대의 아내 유갑봉은 방년 18세에 화가의 아내가 되어, 남편과 꿈 많은 동경 유학시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었으나 남편의 월북으로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포목상을 운영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남편이 남기고 간 작품만은 굳건히 지켰다. 그러나 안따갑게도 그녀는 1980년, 빛을 보지 못한 남편들을 작품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쾌대의 작품은 그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날 때 갓난아기였던 막내아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날 이쾌대의 대작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쾌대 < 자화상 >, 목판에 유채, 45.7cm x 38cm

 

이여성(李如星), Oil on canvas,&nbsp; 90.8&times;72.8cm, 연도미상

 

 


 

이쾌대 최고의 대작, '군상' 시리즈

이쾌대의 그림은 잔잔한 감동과는 거리가 있지만, 시선을 압도하는 벅찬 감동은 강렬하다. 예컨대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펙터클한 ‘군상’ 시리즈(‘군상-1 해방고지’, ‘군상 Ⅱ’, ‘군상 Ⅲ’, ‘군상 Ⅳ’)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35명의 남녀가 나체로 한 덩어리가 된 ‘군상 Ⅳ’는 광복의 기쁨과 건국의 열기로 달아오른 격동기를 조형한 절창이다. 무엇보다도 해부학에 근거한 근육질의 인물들이 압권이다. 웅장하다. 그런데 이들은 비현실적인 관념 속의 인물이다. 단적인 예가 있다. 각 인물들의 포즈가 작위적이란 점이다.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처럼 포즈가 과장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의 작위적인 포즈가, 칼레를 구하기 위해 나선 시민들의 결연한 비장미를 극대화 해주듯이, ‘군상 Ⅳ’의 포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해방공간의 낙관적인 전망과 열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비탄에 잠겼다가 서서히 일어서는 인간군상은 마치 빛을 향해 자라는 ‘향일성 식물’ 같다. 이 식물의 ‘머리’는 그림의 왼쪽에 놓여 있는 셈인데, 이 지점에 선 인물들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난다. 이는 좌절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희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상 Ⅳ 1948 캔버스 유채 177cm X 266 cm

 

군상Ⅱ 1948년 130 Cm X 160 cm, Oil on canvas

 

군상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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