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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카메라/사진학강의

사진의 역사(1) 최초의 사진과 다게로타이프

by 파장 2015. 7. 19.

19세에는 사망했거나 어떤 이유로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을 가족사진에 포함시켰다. 이 사진에서 함께 있는 있는 인물들의 관계를 추측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힘을 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다게레오타이프를 잡고 있는 남자가 액자에 살짝 대고 있다. 여자는 오른손을 살짝 대기만 하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있다. 달콤한 옛일을 화상하는 듯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달리 그녀는 입가에 힘을 준 채 렌즈를 곧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 사진은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무엇가를 남기고 있다.
작가 미상 다게레오타이프를 들고 있는 부부, 1850년경

 

 

 

사진의 역사 - 사진의 발명

 

사진은 전구와 자동차, 다이너마이트 등 19세기에 발명된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놀라움과 즐거움을 만들어낸 것은 아마도 사진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진을 편하고 쉽게 찍고 있지만, 사진의 발명 당시 사람들은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객관적인 사진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고 감탄했다. 그리고 사진술의 발명으로 사물의 형태와 크기, 다른 물체와의 관계 등을 기록하는 역활를 사진이 맡게 되었다. 

 

사람들은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대신, ‘해빛으로 그린 작은 그림(Sun Drawn Miniature)’ 을 갖게 되었다. 전쟁이나 다른 나라의 낭만적인 풍경을 그림으로 얻는 대신 사진으로 직접적인 시각적 표현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은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진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성공적인 사진이 발명되었다는 공식발표에 대해 독일의 유력지인 ‘라이프키거 쉬타탄짜이거(Leipziger Stadtanzeiger)’ 는 독일의 철저한 조사에서 밝혀진 것처럼,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한다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는 일 자체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다’ 라고 일갈했다. 사진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광학, 화학)들은 오래전부터 확립되어 있었는고, 그런 불신을 갖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의 카메라의 전신은 ‘카메라 옵스큐라’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작은 구멍을 통과한 빛이 상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10세기 아라비아 학자 ‘알하젠(Alhazen)은 그 현상을 자세히 설명했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서 일식을 어떻게 관찰하는지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란 ‘어두운 방(dark chamber)’을 뜻하며, 바깥을 보여주는 핀홀 구멍이 뚫여있는 어두운 공간을 의미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구멍에 비치는 상의 질을 개선시키 위해서 핀홀에 렌즈를 끼워 넣게 되었고, 실제 방만큼 컸던 카메라의 크기도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 이렇게 해서 카메라 옵스큐라는 금 도화지 위에 투사된 이미지를 화가가 따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밑그림용 도구가 되었다. 

 

17세기 초부터 어떤 은의 화합물이 광선에 닿으면 검게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이미지가 영구적으로 검게 변하지 않도록 그 반응을 고정시키는 방법은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였다. 

 

최초의 사진을 만든 사람은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 였다.

최초의 영구적인 그림을 만든 사람은 프랑스 중부에 살고 있던 발명가  ‘조제프 니세포르(Joseph Nicephore Niepce)’ 였다. 석판인쇄 실험을 하고 있던 그는 자연스럽게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서 자연으로 부터 직접 상을 얻으려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그는 처음에는 빛에 노출되면 검게 변한다고 알려진 염화은(Silver chloride)으로 실험을 했지만, 나중에는 빛에 노출되면 딱딱해지는 역청(asphalt)의 일종인 유대 비투멘(bitumen of Judea)으로 재료를 바꾸었다.

 

니엡스는 용해제인 라벤더 오일에 비투멘을 녹여서, 그 용액을 백랍(pewter)판에 발랐다. 그 백랍판을 넣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자신의 정원을 향하도록 창가에 설치한 다음 8시간 동안 노출을 주었다. 빛이 많이 비치는 밝은 부분에 있는 비투멘은 단단해지고, 반대로 어두운 부분의 비투멘은 용해 가능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백랍판을 라벤더 오일로 세척했다. 이렇게 해서 빛이 덜 비쳐서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던 비투멘은 오일에 씻겨나가고, 딱딱해진 부분만이 영구적인 이미지로 남겨지게 되었다. 니엡스는 이 처리방식을 그리스어로 헬리오(태양)와 그래피(그림)을 합해서 <헬리오그래피 heliography>라고 했다.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 (Joseph Nicephore Niepce)&nbsp; 그라의 집 창 밖 풍경, 1826년경, 헬리오그래피

 

니엡스의 세계 최초의 사진을 만들어냈다. 이 사진은 1826년경 그의 집 안뜰에 있는 건물 지붕에서 찍은 것으로, 빛에 노출되면 굳어지는 아스팔트의 일종인 유대 비투멘을 바른 백랍판 위에 만들어졌다. 

 

 

니엡스의 연구에 관한 소식이 프랑스인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Dagueerre)에게 전해졌다. 다게르도도 카메라 옵스큐라를 스케치용으로 이용해왔고, 그 이미지를 영구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니엡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정보를 교환하자고 제의했고, 1829년경에 그들은 파트너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사진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명품들로, 서구 국가들에서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 많이 생겨났다. 그들은 일부 부유층만 누닐 수 있었던 가족의 초상화를 원했다. 또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많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직접 나가볼 기회가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여행기나 사진을 구입해야 했다. 

 

 

니엡스와 다른 방식의 프로세서를 완성시킨 다게르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그것을 <다게레오타이프daguerrotype> 이라고 했다. 니엡스는 사진이 초래할 영향력을 보지 못한채, 사진의 발명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몇 해 전인 1833년 사망했다.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  (Louis Jacques Dagueerre), 화가의 스튜디오 안의 정물 , 1837

 

다게레오타이프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다게레오타이프는, 그 처리방식을 발명한 다게르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노출 시간은 니엡스가 헬리어그래피를 만드는 데 걸린 8시간보다 훨씬 짧은 몇 분 정도였다. 니엡스의 사진보다 디테일과 톤이 풍부하게 묘사되어 훨씬 좋았다. 이 후 다게르의 처리방식을 앞 다퉈 받아들였고 사람들은 시로 읊어지기도 했다. “빛은  소리 없는 예술가인가, 사람의 도움 없이도 은빛 밝은 다게르의 영원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네.”

 
 
다게레오타이프(밝은 은판 위의 그림)
 
1950년대 다게레오타이프 카메라

 

다게르는 니엡스와 공동동작업뿐만 아니라 여러 해의 독자적인 실함을 거쳐서 드디어 자신이 만족할만한 다게레오타이프 방식을 완성시킨 다게르는 1839년 1월 7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the French Academy of Science)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한 프랑스 신문은 ‘선 속에 살아있는 세밀함, 탁월한 명암화의 지식, 세련된 마감..., 원근법은 또 얼마나 경탄할만한가, 자연 그 자체이다. 라고 대서특필했다. 한 영국의 과학자는 더 구체적으로 “사진의 완벽함과 충실성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보인다. 맨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디테일, 석고의 균열, 처마에 떨어져 있는 시든 나뭇잎, 또는 멀리 있는 쇠시리에 쌓인 먼지가 이 감탄할만한 사진들에 고스란히 재현돼 있을 정도이다.” 고 찬탄했다. 사실 다게레오타이프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지금도 그 정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어떤 프린팅 방법으로로도 이리지널 다게레오타이프의 훌룡한 톤의 범위와 디테일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 방식이 발표된 직후, 수 많은 다게레오타이프 스튜디오들이 문을 열고, 이 해빛으로 그린 작은 그림’을 갖기를 원하는 대중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1853년 무렵에는 미국에서만 이미 연간 3백만 장 정도의 다게로타이프 사진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초상 사진이었다.

 

 

다게레오타이프는 은으로 도금된 고광택 동판 표면 위에 만들어졌다.

은으로 도금된 고광택 동판은 박스 안에서 요드 결정을 담은 용기 위에 은 표면을 아래로 해서 놓아둠을써 감광성을 얻게 된다. 요드 증기가 올라오면서 은과 반응을 일으켜 감광성의 요드화은의 복합물을 형성한다. 카메라에서 노출이 이루어지는 동안, 은으로 도금된 동판에 잠삼이 기록된다. 화학 반응은 일어났지만 아직은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다. 이 판을 현상하려면, 역시 은의 표면을 아래로 해서 바닥에 가열된 수은이 담긴 접시가 있는 또 다른 박스 안에 넣는다. 수은 증기가 판의 노출된 부분과 반응을 일으키고, 빛에 노출된 곳에는 수은이 은과, 일종의 합금인 뿌연 아말감을 형성한다. 이 아말감이 이미지의 밝은 부분을 차지하고, 빛이 비치지 않았던 부분에는 아말감이 형성되는 않는다. 이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요드화은은 티오 황산 나트륨 정착액에 씻겨 나간다. 따라서 그 부분에는 금속 판만 남게 되어, 사진의 어두운 부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큰 유행을 보였지만 ‘다게레오타이프’ 는 기술적 한계점이 있었다.

어떤 각도에서만 이미지가 제대로 보였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는 불평의 목소리가 나왔다. 처리과정에서 사용되는 수은 증기는 독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다게레오타이프 사진가들의 수명이 단축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최대의 단점은 이미지를 담은 판이 단 한장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본을 다시 찍은 것 이외에는 복제품을 만들어 낼 방법이 없었다. 아름다운 다게레오타이프는 한 개의 네거티브로부터 원하는 만큼의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네거티브-포지티브 방식에 빠르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작가 미상 ,&nbsp;17세기의 에밀리 디킨스, 1847년경, 다게로타이프

 

다게로오터이프는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수많은 사람들은 초상 사진을 찍었다. 노츨 시간은 1분 이내로 줄었지만, 고객들에게 점잖은 기품을 요구하기에는 그래도 긴 시간이었다. 어떤 떠돌이 사진가가 찍은 이 사진은 19세기 시인인 에밀리 디킨슨이 남긴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시와 마찬가지로 이 사진은 표면상으로는 직접 것처럼 보이지만, 깉이 들여다보면 뭐라고 표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그녀는 나중에 사진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고 ‘굴뚝새처럼 작고, 내 머리카락은 밤송이처럼 뻣뻣하며, 내눈은 손님이 마시다만 유리잔의 셰라주 같다.’ 라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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