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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카메라/사진학강의

사진의 역사(6) 사진과 예술

by 파장 2015. 7. 27.

19세기 예술로서의 사진

 

사진은 탄생 순간부터 오랫동안 미술에 한정되어 있던 영역에서 사진도 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고, 풍경, 인물, 정물, 누드 그리고 종교적 우화까지도 사진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일부 예술가들은 사진이 예술의 한 영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했다. 1800년대 프랑스 예술가들이 사진은 영혼이 없는 기계적 공정일 뿐이며, “정성과 사유의 결과인 예술인들의 회화작품들과 비교할 수 없다.” 고 공식적으로 주장한다. 사진가들은 그런 주장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곧 사진을 하나의 종류가 다른 회화라고 여기게 되었고, 1837년 다게르가 찍은 최초의 ‘다게레오타이프(은판 사진술)’에는 신 고전주의 회화 스타일의 구도를 같은 정물들로 그런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1850년~1870년대까지 당시 인기가 있었던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의 회화 스타일과 비슷한 사진들이 유행했다.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은 우아하고 인상적인 인물사진과 ‘왕의 목가(The Idylls of the King)’를 위한 삽화 같은 의상을 입은 사진에 몰두 하기도 했다.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은 당시 사진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시도한 사람들 가운데 유명했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진가였다. 그는 많은 설명적이고 우화적인 합성 사진을 만들었는데, 미리 작품의 내용을 치밀하게 짠 다음, 여러 장의 사진을 인화해 합성시키는 방법으로 최종적인 사진을 만들었다. 

 

 

헨리 피치 로빈슨 (Henry Peach Robinson), 임종 1853

 

 

헨리 피치 로빈슨의 사진은 낭만주의 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상상속의 장면을 합성사진 기법으로 만들었다. 1853년 ‘임종’은 모델들과 배경을 따로따로 촬영한 다음, 그 이미지들을 합성해서 만든 작품이다. 헨리 피치 로빈슨은 19세기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아름다운 예술적 효과를 얻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고급 예술운동(High Art movemont)을 이끌었는데, 사진의 회화적 효과(Pictorial Effect in Photograph)에서 사진가는 어떤 기교도 사용할 수 있고, 사진에 보기 싫은 것들을 피하고 주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회화적이지 않은 부분을 보정하는 것이 사진가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적 사진에 자연주의 표방하는 운동 출연

 

1880년가 끝나갈 무렵, 예술적 사진에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운동이 출연했는데, 그 선두에 있었던 사진가가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이었다. 에머슨은 기존의 예술 사진가들이 취했던 입장에 반대하는 최초의 인물로 사진이 현실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포착하는 방식으로 충실히 이용되어야 진정한 예술로 인정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화화 주의자나 , 합성사진, 모델 의상, 그림 배경 등 일상생활에 대한 감성적인 관점을 비난했다.  

 

 

피터 헨리 에머슨 (Peter Henry Emerson) 수선화 따기 1885

 

 

피터 헨리 에머슨은 ‘고급예술’ 사진가들이 지향하는 방법을 거부했다. 그는 사진은 미술을 모방하지 말고,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이스트 앵글리 안 늪지에서 농부들을 찍은 사진으로 자신의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에머슨은 자연주의 사진(naturalistic Photography)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는데, 그것은 장비를 단순화할 것, 조명이나, 포즈, 의사으 소품 등으로 속임수를 쓰지 말 것, 고전적인 규칙을 따르지 말고 자연적인 구도를 잡을 것, 그리고 좋은 사진이나 그렇지 않은 사진, 평법한 사진을 좋지 않은 드로잉이나 보잘것없는 그림으로 바꾸는 수정(Retouching)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주 피사체에는 초점이 선명하게 맞지만 전경과 배경에는 초점이 약간 벗어나는 상태를 말하는 사람의 눈이 장면을 인지하는 방식의 과학적인 초점 테크닉을 신봉했다. 에머슨은 후에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시녀” 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말을 번복했지만, 그의 최초의 신념은 회화를 모방할 필요가 없이 사진 자체로서의 예술을 탐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의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회화적 사진과 분리주의

사진은 과연 예술인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즈음 사진가들은 사진이 예술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회화주의 사진가들은 자신들의 사진이 스냅사진들과 구별되기를 원했다. ‘아메리카 아메리카 포토그래퍼(Amerrican Amateur Photographer)’지는 좋은 사진들만 벽에 걸 수 있는 권위 있는 전시관과 유능한 심사위원들만 있으면, 우리의 예술 사진이 크게 발전할 수 있다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이 모든 사진 애호가들에게 작극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회화주의 운동은 국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진의 미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전시회들이 이태리의 비엔나 카메라 클럽(Vienna Camera Club)과 영국의 Linked Ring Brotherhood Photo Club 등과 같은 단체에 의해 열렸다.

 

사진이 다른 종류의 예술과 비슷하면 예술적 가치 평가

많은 회화주의 사진가들은 사진이 다른 종류의 사진과 비슷하게 보이면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믿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대놓고 목탄화나 메조틴트 같은 회화작품들을 모방했는데, 특히 분위기나 대기와 빛의 느낌을 중시하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그 대상이었다. 회화주의 사진가들은 아래의 로베르 드마쉬(Robert Demachy) 의 작품처럼 빛이 확산되고 선이 부드러우면서 디테일을 억제한 안개의 쌓인 풍경이나 부드러운 도시 풍경을 즐겼다.

 

 

로베르 드마쉬 (Robert Demachy), 발레리나 1900

 

 

19세기말의 회화주의 사진은 선명한 디테일보다는 빛과 분위기가 더 중요한 인상 위의 회화와 비슷했다.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해서 회화주의 사진가들은 수작업으로 프린트 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사진가가 원하는 대로 손쉽게 변화를 줄 수 있는 두껍고 부드러운 코팅에 이미지를 전사하는 고무 중 크롬산염 프린트가 그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 결과는 지금까지 사진이라고 알려져 온 것들과는 더 이상 어떤 공통점도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이 사진가들은 자연을 인공적으로 재연해 온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사진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예술작품 속에서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너무 선명해서 불편할 정도로 디테일을 재현하는 사진을 버리고 단순하고 폭넓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며 기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Pure)한 사진이 충분히 훌룡하거나 고상하지 않더라도... 어째건 그 사람은 예술가가 되도록 놓아두고, 우리에게 모조품을 억지로 떠맡기려 하지 말고, 우리를 그냥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는 피터 헨리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진의 생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예술로서의 스트레스 사진

스트레스 사진의 탄생

20세기 초, 예술 사진을 지향하는 사진가들은 사진적인 프로세서를 충실하게 따른 이미지를 만들었다. 회화주의 사진가들이 회화와 매우 흡사한 사진들을 만들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9세기 시각예술의 큰 특징인 직접적이고 조작되지 않은 사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917년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카메라 워크’ 지의 마지막 지면을 폴 스트랜드(Paul Strand)에게 할애했다. 그는 폴 스트랜드의 사진을 예술 사진으로써 강력하고 새로운 접근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스트랜드는 “객관성은 사진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런 것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은 기교적인 처리나 조작이 없는 스트레스 사진 기법으로만 만들수 있다”라고 믿었다.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사진에 직접적인 조작을 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많은 사진들을 카메라 앞에 있는 사물의 시작적인 은유이자 정확한 표현이며 동시에 그의 내적인 느낌에 대한 외적인 상징물, 즉 ‘등사물(equivalents)’ 로 생각했다. 1950년 이래,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는 스티글리츠의 등가물 개념을 이행하고 확장시켜 나갔다. 마이너 화이트에게 있어서 진지한 사진가의 목표는 실물의 스트레이트 사진이 사진가와 사진을 보는 이의 심리적 상태를 위한 은유로 기능할 수 있도록, ‘만질 수 있는 것에서 만질 수 없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폴 스트랜드(Paul Strand), 흰색 울타리, 포트 켄트, 뉴욕 1916

 

 

폴 스트랜드의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스트레이트한 접근법은 객관적인 관찰과 주관적인 의미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당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물을 둘러보라. 당신이 살아있다면,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사진을 좋아하고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안다면 그 의미들을 찍고 싶어질 것이다.” 

스트레이트 사진 1950년대 예술사진 주도

스트레이트 사진은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예술 사진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사진가로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이 있다. 그는 최소한의 장비와 테크닉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사진의 모든 부분이 선명하게 나오도록 조리개를 최소로 좁힌 렌즈를 장착한 8×10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는 네거키브를 밀착해서 인화했고, 크리핑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작업하는 방식은 미리 구상없이 시작한다.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은 내 감정을 몰입하면, 렌즈를 통해서 재발견하게 되고, 최종적인 표현 형태가 카메라 스크린에 나타난다. 나는 노출을 결정하기 전에 최종적으로 인화된 사진에 나타날 질감과 움직임, 비례 등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 머리속에서 미리 그려본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면 내가 머리속에 그렸던 것이 자동으로 고정되고, 더 이상의 조작은 하지 않는다. 최종 결과물인 인화된 사진은 카메라를 통해서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엔셀 에담즈, 폴 카포니그로, 이모겐 커닝햄 같은 사진가들이 이런 스트레트 사진 방식을 사용했다.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 피망 No 30, 1930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의 다이렉트 포토(Direct photography)는 객관적이고 사적인 사진이다. “구름, 토르소, 조개, 피망, 바위, 굴뚝 이런 것들은 모두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 연관된 생명이라고 하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개체들이다.


새로운 시각을 찾아서

20세기 다양한 분야에서의 변화의 바람

20세기 초에는 과학, 기술, 수학, 정치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예술분야에서는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 운동들이 출현했고, ‘예술’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미래파 예술운동은 ‘이미 시도된 모든 모티브와 주제를 예술의 장에서 쓸어낼 것, 과거에 대한 숭배를 파괴할 것, 이떤 형태의 모방도 철저히 무시할 것, 그리고 모든 형태의 독창성을 찬양할 것’ 을 제안했다.

 

급진적 예술과 디자인의 중심지 바우하우스

급진적인 예술과 디자인, 사고의 핵심에 바우하우스(Bauhaus)가 있었다. 1922년, 베를린의 바우하우스에 헝가리 출신 예술가인 라즐로 모호이 나지(laszlo moholy nagy)가 부임했다. 그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고, 19세기의 회화주의적인 관습들을 현대의 생활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각(new vision)’ 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사진 재료들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라즐로 모호이 나지 (laszlo moholy nagy) 질투, 1927

 

 

라즐로 모호이 나지와 만 레이와 같은 사진가들은 현실적, 비현실적, 추상적인 이미지의 탐구에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다.  ‘라즐로 모호이 나지의 질투(1927)’는 몇 장의 사진을 합쳐서 만들었다. 나지는 이런 사진을 “숨겨진 의미가 번득이는 미요한 디테일의 요란한 충돌”이라고 정의했는데, 이 정의는 그의 애매모호한 사진에 잘 들어맞는다.  

 

나지는 사바티에 효과(솔라리제이션), 독특한 앵글, 광학적 왜곡, 다중노출 등을 통해서 사진의 시각을 넓히려는 다양한 방법을 탐구했다. 그는 “이것들을 적절히 이용할 경우, 복잡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진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고 생각했다. 새로운 예술 형태를 탐구하는 또 한 사람의 예술가는 파리에 활동하던 미국 출신의 만 레이(Man Ray)였다. 그는 현대적 존재의 모순을 비판하는 사상인 다다(Dada)에 몰입했다. “나는 모순을 좋아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자연에 존재하는 무한한 다양성과 모순을 가져본 적이 없다.” 고 그는 말했다. 모호이 나지와 마찬가지로 만 레이도 솔라리제이션을 비롯한 다양한 기법을 작품에 사용했다.

  

 

만 레이 (Man Ray) 솔라리제이션, 1929

 

 

만 레이 사진에서는 현상하는 도중에 이미지를 빛에 순간적으로 노출시켜서 모델의 팔의 가장자리의 검은 선과 그 밖의 톤이 반전되어 만들어진 솔라리제이션(Sabattier effect) 현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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