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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카메라/사진학강의

사진의 역사(2) 칼로타이프와 콜로디온 습판

by 파장 2015. 7. 22.

월리엄 헨리 탈보트,  Zeil in Richtung Hauptwache , 1846

 

 

칼로타이프 - 종이 위의 그림

 

다른 사진 처리방법이 동시에 발표되었다.

다게르의 ‘다게레오타이프’ 방식이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된 지 3주도 채 되지 않은 1839년 1월 25일, 영국인 아마추어 과학자 월리엄 헨리 탈보트(William Henry Talbot)는 영국 왕립학회(the Royal Institution of Great Britain)에서 자신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이미지를 영구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명했다고 발표했다. 서둘러서 발표를 준비하고 있던 탈보트는 크게 낙담했다. 그는 다게르가 자신보다 일찍 사진술을 발표함으로써, 5년 동안 온갖 복잡한 실험을 거쳐서 추구해온, 나중에 사진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세상에 최초로 발표하는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월리엄 헨리 탈보트 (William Henry Talbot), 탈보트의 사진 작업장, 1844 년경의 칼로타이프

 

런던 근처에 있는 탈보트의 작업장 광경을 보여주는 이 사진은 2장을 이어서 만든 초기 칼로타이프 가운데 하나이다. 왼쪽에서는 조수 한 명이 그림을 복사하고 있고, 중앙에 탈보트로 보이는 사람이 초상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선반에서는 또 한 명이 밀착 프린트를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조각을 촬영하고 있다. 오른쪽 맨 끝에서는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초점을 쉽게 맞출 수 있도록 타깃을 들고 있다. 칼러타이프를 한 장, 한 장 붙여서 만든 세계 최초의 사진집 ‘자연의 연필(The Pencil of Nature)’에는 탈보트의 ‘독자에게 알림’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원판은 화가의 도움 없이, 오직 빛의 작용으로 새겨졌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무엇을 흉내 내어 새긴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햇빛이 그린 것이다.”

 

 

탈보트는 종이 위에 이미지를 만들었다.

월리엄 헨리 탈보트(William Henry Talbot)는 처음에는 염화은으로 감광처리를 한 종이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빛에 노출시켜서 만들어지는 네거티브 실루엣으로 실험했었다. 그다음에는 감광 코팅 물질을 노출하는 동안 상이 나타날 정도로 장시간, 노출시킨 카메라 옵스큐라의 이미지로 실험을 계속했다.

 

1840년 6월 탈보트는 현대사진의 근본이 되는 기술을 발표했다.

카로타이프는 감광 유제가 입혀진 종이에 잠상이 형성될 정도의 노출을 준 다음, 화학적인 현상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노출 직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사진은 거기에 존재한다. 그것은 화학적인 과정을 거쳐서... 완벽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고 보고했다. 그 잠상을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 탈보트는 다게레오타이프에 쓰이는 감광재료인 요드 화인(Silver iodide)을 갈로 질산은(gallo nitrate of silver)으로 처리해서 사용했다. 그는 이 발명품에 아름답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인 kalos와 인상이라는 의미의 typeos를 따서, 칼로타이(calotype)라는 이름을 붙였다.

 

탈보트는 금속판이 아니라 종이 위에 사진을 만드는 가치, 즉 복제성(repreducibility)의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월리엄 헨리 탈보트(William Henry Talbot)는 완전히 향상된 종이 네거티브를 감광 처리가 된 다른 종이 위에 밀착시켜서 함께 빛에 노출 누출시켰는데, 이것이 밀착 프린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네거티브의 어두운 부분은 아래에 있는 종이로 광선이 덜 투과되도록 하고, 반면에 투명한 부분은 빛을 통과시키는 역활을 했다. 그 결과 원래 장면의 자연스러운 톤과 유사한 포지티브 이미지가 종이에 남게 된다.

 

칼로타이프의 복제성이 단 한 개의 결과물만을 만들어내는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서 월등한 장점을 같고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다게레오타이프와 같은 선명한 디테일을 재현해내지 못하는 칼로타이프에 실망했고, 결국 널리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종이의 섬유질이 목탄화와 비슷한 부드럽고 약간 결이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칼로타이프는 그 자체로서 보기에 아름다웠다.

 


 

콜로디온 습판 - 선명성과 복제성

 

콜로디온은 다게레오타이프의 선명도와 칼로타이프의 복제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콜로디온 습판방식(collodion wet-plate precess)은 다게레오타이프의 장점인 선명도와 칼로타이프의 장점인 복제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그들보다 감광성이 더 좋아서 노출시간이 5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몇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점들을 고루 가지고 있는 이 방식은 1851년에 도입된 젤라틴 건판이 개발될 때까지 거의 모든 사진가들에게 애용되었다.

 

당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감광유제를 유리판에 고정시킬 수 있는 물질을 찾고 있었다. 유리는 결이 없고 균일한 투명성을 가지며, 화학적인 반응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유제의 지지체로서 금속이나 종이보다 우수했다. 니엡스의 사촌인 ‘아벨 니엡스 드 생 빅토리(Abel Niepce de Saint-Victor)’는 거기에 계란 흰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그의 알부민 유리판은 너무 긴 노출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더 나은 물질을 찾기 위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한 가지적 적합한 물질이 새로 발명되었는데, 그것은 에테르나 알코올에 용해된 질산섬유소인 콜로디온(collodion)이었다. 이것은 젖어 있을 때는 끈끈한 상태이지만, 곧 건조되기 때문에 질기고 투명한 막을 형성하게 된다. 영국의 조각가인 프레데릭 스코트 아처(Frederic Scott Archer)는 습작으로 모델들의 사진을 칼로타이프로 찍으면서 콜로디온 유제의 베이스로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콜로디온의 단점은 감광판이 젖어 있는 상태에서 노출과 현상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유리판에 유제를 칠하는 데에도 민첩한 손가락과 유연한 손목, 그리고 숙련된 타이밍 등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콜로디언과 요드화 칼륨(potassium iodide)을 썩어서 유리판의 중앙에 부은 다음, 유리의 가장자리를 잡고 상하좌우로 기울여서 표면에 유제가 고루 도포되도록 했다. 남는 콜로디온은 다시 용기에 부었다. 그런 다음, 유리판을 질산은(silver nitrate) 용액에 담가서 감광 처리를 했다. 감광 유제가 젖어 있는 상태에서 잠상이 형성되도록 노출을 주고, 피로갤론산(pyrogallic acid)이나 황화철(iron sulfate)에 넣어 현상한 뒤에 정착과 수세와 건조 과정을 거쳤다. 이 모든 작업을 사진이 찍히는 장소에서 실행해야 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가는 암실 전체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클로디온 습판 처리과정은 많은 이점이 있었지만, 불편했다.

유제를 바르는 유리판은 유제가 마르기 전에 코팅과 노출, 현상이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으려면 어디든 암실 전체를 모두 가지고 다녀야 했다. 당시 한 사진가가 콜로디온 습판 방식의 촬영 장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촬영 장비들을 마차에 가득 싣고 기착역에 도착했다. 10kg 청동으로 만든 23 ×28cm 카메라, 5.4리터 질산은 용액을 담을 수 있는 5.4kg 방수 유리통이 담긴 나무 상자, 23 ×28cm 크기의 플레이트 12장을 넣을 수 있는 상자, 렌즈, 약품, 하루 동안 작업하는 데 필요한 13kg짜리 물건 등 여러 가지 물품을 넣을 61 ×46 × 30cm 크기의 상자, 길이 1.5m에 무게가 2.3kg나 나가는 삼각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실로 사용할 수 있는 가로 세로 1 ×1, 넓은 작업용 테이블을 넣을 수 있는 높이 2m의 텐트에 이것을 가죽 케이스에 넣으면 무게가 18kg이 되고... 이 모든 장비의 무게가 54kg이나 된다.”

 

콜로디온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이미지 양쪽에 모두 이용할 수 있었다.

유리에 코팅을 하면, 나중에 알부민을 코팅한 종이 위에 포지티브를 할 수 있는 네거티브를 만들 수 있었고, 검은 벨벳이나 종이, 물감 같은 어두운 물질을 유리의 뒤에 두면 이미지는 일종의 다게레오타이프와 유사한 앰브로타이프(ambrotype)라고 하는 포지티브로 바뀌었다. 어두운 에나멜을 칠한 금속 위에 콜론 디온을 칠해서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내구성이 있고 저렴한 틴타 이프(tintype)는 미국에서 인기가 있어서 앨범이나 선전물, 그리고 심지어 무덤의 묘비에도 얼굴 사진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스테레오 사진을  만드는 방법은 큰 인기를 누렸다.

두 장의 사진을 얼마쯤 간격을 두고 나란히 찍어서 스테레스코프(한 눈에 한 장씩의 사진만 보이게 하는 도구)를 통해서 보면 입체적인 느낌을 주는 사진이 되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는 이 입체사진을 것이 인기 있는 가정오락 가운데 하나였다. 불과 25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한 장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진이 1860년대에 이르러서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장에 이르게 되었다. 인물을 찍고, 전쟁을 취재하고, 먼 나라를 탐사해서 그 증거로서 사진을 가져오는 등, 이제 사진은 이 세상에서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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