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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카메라/사진학강의

사진의 역사(5) 사진의 역활의 변화

by 파장 2015. 7. 27.

 

 

 

초기 사진의 시간과 움직

초기 사진들은 아주 긴 노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오늘날 디지털을 사용하는 사진가들은 1/100초의 노출도 길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의 프로세스를 사용했더 사용가들은 감도가 아주 낮은 유제로 작업해야 했었기 때문에 몇 초 정도의 노출은 오히려 짧은 것으로 생각했다. 노출 중에 움직이는 사람이나 사물의 모습은 흐려졌고, 노출이 길면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름상에 남길 정도로 정지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은 거리가 텅 빈 것처럼 보인다.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 사원이 있는 거리, 파리 1839                                                                                     에드위어드 앤소니, 브로드웨이,1859

 

 

통행하는 사람과 마차, 자동차들로 가득한 두 도시의 거리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긴 노출을 주어서 찍은 파리의 거리는 외쪽 아래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사람만 찍혀 있을 뿐 적막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스테레오 카메라의 밝은 렌즈와 감도가 놀라운 콜로딘온 습판으로 찍은 브로드웨이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스테레오 사진은 걷고 있는 사람, 움직이는 마차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진이다.

단초점거리 렌즈가 달린 스테레오 카메라는 조리개를 열어도 밝고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노출이 가능했다. 그 사진을 본 사람은 “지금까지 억지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도시 사진들에 비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주) 스테레오 사진 : 두 장의 사진을 얼마쯤 간격을 두고 나란히 찍어서 스테레스코프(한 눈에 한 장씩의 사진만 보이게 하는 도구)를 통해서 보면 입체적인 느낌을 주는 사진이 되었다.

 

순간 포착 사진들은 맨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움직임의 단면들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포착된 어떤 운동들은 그때까지 묘사되었던 그림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이 잘못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예를 들어, 사진으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달리는 말의 앞발은 앞으로 뒷발은 뒤로 쭉 뻗은 식으로, 네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진 상태로 그려지는 게 보통이었다.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즈(Eadweard Muybridag)는 사진의 운동 연구의 선구자였다.

1878년에 발표된 그의 사진이 말의 네 발은 배 아래에 모여 있을 때에만 땅에서 모두 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사진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새로운 고감도 젤라틴 유제와 특별히 제작된 다중 렌즈 카메라를 이용해서, 그는 운동 중인 인간과 다른 동물들에 대한 많은 연구를 수행했다. 1887년 그는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찍은 781개의 연구 결과를 역에서 11권의 책을 펴냈다.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즈 (Eadweard Muybridag) 운동 연구, 1885년경

 

 

 

사진 유제의 감도가 높아짐에 따라 운동의 연구도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위의 사진들은 사람과 동물의 뭄직임을 분석한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지의 ‘동물운동(Animal Locomotion)’의 일부이다. 머이 브리즈는 서로 동조시켜 놓은 여러 대의 카메라들을 함께 작동시켜서 서로 다른 각도에서 운동의 각 단계가 동시에 기록될 수 있도록 고안했다. 

 

 


 

 

 

기록으로서의 사진

사진은 다양한 수준에서 기록으로서의 역활을 한다.

많은 스냅사진들도 어떤 특정 장면을 기록해서 거기서 찍혀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중에 그 장면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마도 보도사진은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직접 보았을 장면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다른 측면에서 현실을 기록하는 동시에 사진가 자신의 그 현실에 대한 의견을 기록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은 그의 사진에 대해서, “바로잡아야 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으며, 가치를 인정받을 필요가 있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 즉 다큐멘터리로 알려지게 된 하나의 스타일로서의 사진의 용도를 설명하는 것이다.

 

외젠 앗제(Eugène atje)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기록으로 생각했지만,

외제느 앗제의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방 입구에는  ‘예술가를 위한 다큐먼트’라고 적혀 있었다. 외제는 앗제는 자신이 사랑했던 1900년대 초의 파리의 거리, 카페, 상점, 기념물, 공원과 사람들을 찍은 수 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생전에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그는 파리의 시각적인 기록을 원하는 화가나 건축가들에게 사진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 어떤 장소의 겉모습에 대한 기록을 할 수 있는 사진가들은 많지만, 외젠 앗제의 사진은 파리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우리들에게 당시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독일인들을 기록했다.

 

아우구스트 잔더 , 노동자, 1927

 

 

 

독일의 사진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은 피사체의 개인적인 특징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독일을 구성하고 있던 사회계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노동자, 군인, 상인, 시골의 가정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일정한 포즈를 취하게 해서 촬영했다. 이 인물 사진들은 사실적이고 감정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냉담해 보이기도 한다. 잔더의 사진들은 개인의 개성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그들의 사회적 신분에서의 역할만이 드러나 있다. 

 

아우스 잔더의 사진은 개인적인 인물 사진이라기 보다는 당시 독일 사회계층에 대한 기록이다. 별돌을 잔뜩 짊어진 이 노동자의 사진은 잔더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 사회계층에 관한 수 백 장의 사진 중 하나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직업을 냉정하고 힘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잔더는 의도적으로 네거티브 방식을 사용해 배경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시간이나 장소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진과 사회적 변화

사진은 세상에 대한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역활을 한다.

19세기 말에 덴마크에서 태어난 신문기자 제이콥 리이스(Jacob Riis)는 사회적인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진을 이용한 최초의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리이스는 뉴욕 슬럼가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신이 10년 동안 직접 지켜본 비참함과 악덕에 관해서 어떤 설명으로도 충분히 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선의를 펼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제이콥 리이스 (Jacob Riis) 이탈리아닌 넝마주의 집, 저즈 스트리트 1894

 

 

제이콥 리이스는 카메라를 이용해서 뉴욕 슬럼가를 사회에 알리는 작업을 했다. 그의 사진들은 창문이 달리지 않는 방과 밀집 주거를 금지하는 주택법의 재정으로 이어졌다. 밤에 어두운 방안을 촬영하기 위해서 리이스는 독일에서 개발된 마그네슘 카트리지를 터트려서 어두운 곳을 밝히는 방법을 이용했다. 이 방법은 현대의 플래시 탄생의 역할을 했다.

 

 

루이스 하인 (Lewis W. Hine), 면화공장 실 짓는 소녀, 남부 캐롤라이나 뉴베리 1908

 

 

루이스 하인은 1908년에서 1921년까지 아동 노동착취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는 국립아동노동위원회(National Child Labor Committee)를 위하여 5천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당시 감독자는 아이들이 기계에 끼는 사고 정도는 그냥 지나치는 것이 예사였다. “가끔 손가락이나 발이 으스러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은 특히 아동 노동력 착취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열정적인 사회학자였다. 20세기 초에는 아동 노동력 착취와 같은 악덕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그는 정치권력가들에게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비참한 인권 탄압의 현실들을 기록했다. 그는 “그 아동과 그의 가족들이 악덕업자들의 부담을 줄어주고, 그로 하여금 생활비를 쓸 수 있게 해주며, 제조 장비를 제공하고, 성수기와 비성수기를 맞춰주고, 동시에 급여를 줄일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는 말로 냉소와 분노가 석인 심경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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