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음악・공연・여행

비우려고 떠나는 길 - 화순 운주사

by 파장 2015. 9. 29.


비우려고 떠나는 길 

화순 운주사(雲住寺)



사진 : 이진기 jingi1967@gmail.com

비추(悲秋), 가을은 슬픈 계절이다. 차가운 기운이 점점 퍼지면서 산천초목들이 시들고 낙옆이 떨어진다. 가을은 한 해의 저녁이다. 계절의 변화에 우리들은 쓸쓸함을 느끼고 슾퍼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올 해 가을에는 한 해 동안 채우며 살았던 것들을 비우기 위해 길을 나서 보기로 했다. 그 첫번째 길로 화순 운주사를 찾았다.


운주사 천불산 불사바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정형화되지 않고, 형식이 없는 독특한 절이다.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있다.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신비로운 절이다.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계곡에 지금은 석불 90개와 돌탑 21기가 산재해 있는데 언제, 누가, 왜 불상과 석탑을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운주사의 절 구조와 탑, 불상의 형식은 일반적인 사찰과 완전히 다르다. 



운주사는 참 이상한 절이다. 어느날 갑자기 세웠다고 하는데, 누구는 신라 말의 승려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이 불법(佛法)으로 만들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후백제 유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또 어느 학자는 여러 근거를 대며 11~13세기에경에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아무도 운주사의 출생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

땅의 생김새를 두고도 어떤 사람은 바다로 나가는 배를 닯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람 한 점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산이 에워싸고 있어서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있다고 하기도 한다. 운주사에는 깊은 산골이나 바다속 같은 적막함이 흐른다. 얼마나 조용한지 밤에는 목탁 소리가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한다. 



절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우리가 시골이나 산사에서 흔히 경험하게 되는 한적함과 느낌이 달랐다. 정적에 가까운 팽팽한 한적함,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였다. 공기의 기운은 분명 심상치 않았으나 서늘하거나 괴괴하지 않았다. 땅의 숲의 정령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기분이었다. 



산모퉁이를 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절이 아니라 탑들 이었다. 초승달처럼 생긴, 폐사지 같이 좁고 긴 평지 위에 몇 개의 석탑이 행렬에서 이탈한 병사처럼 일정한 기준없이 자유스럽게 서 있었다. 모양과 구조가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석탑이었다. 



평지에만 탑이 있는게 아니었다. 오른쪽 산을 올려다보면 능선에도 탑이 있고, 왼쪽 산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도 탑이 있었다. 탑뿐이 아니었다. 불상도 부지기수였다. 절터며 산기슭이며,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석불이 문득 문득 나타났다. 불쑥불쑥 등장하는 탑과 불상을 볼 때마다, 언제, 누가, 왜 이 많은 탑과 불상을 만들었을까? 이곳이 절이 맞기는 한 것인가?  궁금증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정신이 없었다. 석탑이지만 내가 보던 탑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불상이지만 평소 내가 알던 불상이 아니었다. 천불산 동쪽과 서쪽 능선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석탑과 불상들이 가득했다. 밀교를 믿는 사람들의 성지 같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사원 같기도 했다. 절이 아니라 신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공간에 와있는 착각이 들었다. 

황석영 소설<장길산> 에서 운주사가 언급되는데, 전라도 섬에 숨어있던 후백제 유민들이 10세기 초, 어느 날 전라도 화순으로 모여들어 하룻밤 만에 999개의 불상과 탑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원래는 첫닭이 울기 전 천불천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밤의 노고에 힘에 겨운 사내가 거짓으로 새벽닭이 울었다고 소리친 까닭에 999개의 미륵상과 석탑을 세우고 그만 끝이 났다고 한다. 그런데 후백제 유민들이 천불천탑을 세웠다 설화는 그 어디에도 역사적 기록이없다. 또 소설에서는 탑과 불상이 999개라고 했지만 실제는 90개의 돌부처와 21기의 석탑이 남아 있고, 학계에서는 고려 중 후반 화순 지역 민중들이 운주사를 세웠다고 추측하고 있다.



운주사의 불상은 거칠고 어찌 보면 반조형적이지만 대부분 친근하고 해악적이다. 처음 보는 불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고 그래서 친구나 이웃을 보는 것처럼 정겹고 편안하다. 소박하고 활달하고 꾸밈없고 자유분방한 돌부처들. 이름난 절에서 많이 본, 저 높은 곳에서 하대하듯 사람을 내려다보는, 엄숙하고 화려하게 금칠로 장식한 부처와 족보가 다르다. 운주사의 돌부처는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충청도 전라도의 마을 미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전국에 있는 미륵이 모여 한바탕 단합 대회라도 하는 것 같다.



운주사의 백미는 대형 부부 와불이다. 서쪽 산을 오르다 보면 거대한 와불이 불쑥 나타난다.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갑자기 어느 사내가 첫닭이 울었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미처 세우지 못했다는 바로 그 불상이다. 남편의 키가 12미터, 부인의 키는 9미터 인데 처음에 규모에 압도당하고 조금 후엔 너무 커서 비현적으로 다가온다. 와불은 산자락을 침대삼아 그냥 벌렁 누어 있다. 남녀 부처가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는 모습이 천진하고 능청스럽다. 와불은 원래 석가모니가 열반에든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지만 운주사의 와불은 그런 불상과 딴판이다. 누워 있느나 석가모니가 아니라 미륵을 닮았고, 정밀하게 조각한 게 아니라 자연 상태의 바위를 대충 쪼아서 만들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와불이 많지만 부부 와불은 세계에서 운주사 누운 부처가 유일하다.



탑도 특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운주사 탑은 기존 사찰의 그것과는 여러모로 남다르다. 원형탑, 원반형탑, 모전탑, 2층탑, 5층탑, 7층탑, 9층탑..... 세상의 탑이란 탑을 다 모아 놓은 듯하다. 어떤 탑은 몸에 마름모꼴 모양이나 기하학적인 문신을 새기고 있다. 일정한 형식이 없어서 처음엔 당혹스럽다가도 보면 볼수록 흥미롭고 인상적이다. 그 모습이 마치 솥단지를 이어서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 떡시루를 몇 개 겹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방형탑은 콩고물을 얹은 제사떡을 닮았고, 원반형탑을 보면 봄이 되면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시던 동그랗고 도툼한 쑥개떡을 닮았다.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은 형식과 규칙이 없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 처럼 전통적인 조형 문법을 완벽하게 전복기키고 있다. 그 모습은 이탈과 자유방임을 넘어 포스트모던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민중들은 애초부터 어떤 형식을 만들 의도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의 꿈을, 소박하지만 뜨거운 영혼을 탑과 불상에 담으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순수함이 품질좋은 돌로, 솜씨가 뛰어난 석공도, 내로라하는 건축가도 없었음에도 권력자와 가진 자 편에 줄을 선 사람들이 흉내를 낼 수 없는 '다름' 의 세계를 천불산에 가득 펼쳐 놓은 것이다. 

1천 년 전, 화순 땅 민중들은 삶이 고달프고 희망의 꼬리가 잘려 나갈 때마다 자신들을 닮은 불상을 만들고, 춥고 허기가 질 때마다 자신들을 닮은 불상을 만들고, 춥고 허기가 질 때마다 가마솥과 떡시루와 먹음직한 개떡을 닯은 탑을 세웠을 것이다. 당장은 일어날 수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고단한 삶을 딛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꿈을 부부 와불과 북두칠성을 닮은 칠성바위에 새겼을 것이다.

운주사의 천불천탑들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쓸쓸하고 안타까운 그러나 그보다 몇 배는 아름다운 꿈이 흐른다. 천불산의 돌을 깨기위해 정을 들고 있는 민중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시지포스였다.


글 출처 : 남자의 여행(유명종) 중 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