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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음악・공연・여행

비우려고 떠나는 길 - 순천 선암사

by 파장 2015. 10. 9.



비우려고 떠나는 길

순천 선암사 仙巖寺



사진 : 이진기 jingi1967@gmail.com


 전남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선암사(仙巖寺)는 태고종의 중심 사찰이다. 사찰 창건에 대해서는 백제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 했다고 하는 설 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주장이 있으나 둘 다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로 보기도 한다. 고려시대 의천에 의해 중창하면서 번창한 선암사는 소박하고 아늑한 숲길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인 승선교(보물400호)와 아름다운 정원을 같고 있는 사찰이다.


선암사(仙巖寺)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이다. 불교에서 총림이란? 경전교육기관인 강원, 참선, 수행 도량인 선원, 계율 교육기관인 율원을 가진 절을 말한다. 조계종의 5대 총림으로는 조계 송광사, 영축 통도사, 가야 해인사, 덕숭 수덕사, 고불 백양사가 있다.


태고종은 불교의 한 종파로 일제 강점기 시절, 불교 말살 정책으로 스님들을 강제로 결혼시키는 대처승 제도로 부터 생겨났다. 1954년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은 불교를 정화 한다는 명목으로 대처승을 친일승이라고 해서 이들 모두 승적에서 파문 시켜버렸다.  비록 가정을 같고 있는 많은 대처승들은 항일 독립운동가 였고, 불교 교육자들이었다. 이에 발반한 대처승들은 1970년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선암사를 총 본산으로 하여 태고종을 만들었다. 





선암사로 가는 길은 오래된 고목들과 젊은 나무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깊은 숲 터널이다. 참니무, 단풍나무, 삼나무, 서어나무, 싸리나무, 이팝나무, 작살나무, 편백나무 층층나무 등 여러가지 나무들이 손을 잡고 어깨를 기대며 공존하고 있다. 숲길은 절까지 1.5km 정도 길게 이어진다. 선암사의 숲길은 봄이면 동백꽃 붉게 타오르는 백련사 숲길, 송광사 편백나무 숲길, 봉곡사의 소나무 숲길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숲길이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공존과 어울림, 선암사의 숲길을 설명하기에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이 숲길에서는 어느 하나 제 잘났다고 거들먹거리거나 앞장서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비하하며 물러서는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살기 위해 치열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정적으로 태양을 찾지만 어느 한 나무들도 군락을 이루며 세력을 형성하지 않으니 당연히 차별받는 나무도 없다. 여러가지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오랜세월 자리를 지키며 공존과 어울림의 미학을 만들고 있다.




오래전 선암사에 공존과 어울림의 미학과 어울리지 않았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태고종 총무원에서 임명한 주지와 절 내부에서 뽑은 주지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 용역 업체 직원들과 불자들이 동원되어, 총무원 세력을 선암사에서 내쫓으면 다시 선암사 스님들이 총무원이 세운 권력을 물아냈다. 마치 재개발 현장에서 깡패을 동원해 세입자들을 몰아내는 조폭적 상상력이 절간에서 벌어졌다.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소유’ 이다. 본디 불교에서는 수행자들의 토지를 포함한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승려들은 돈도 만지지 못했다. 부처의 집에서 '소유' 와 '권력' 을 탐하며 한 바탕 걸쭉하게 싸움을 벌인 것이다. 스님과 불자들은 조화보다는 불화를, 화해보다는 갈등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들은 선암사의 공존과 어울림이라는 의미를 버렸던 것이다.

 




선암사의 공존과 어울림의 숲길을 걷다보면 길옆에 서 있는 목장승이 두개가 보인다. 이 장승은 1987년에 만든 것으로 남자 여자가 아니라 두 장승 모두 남자상이란 점이 특이하다. 방생정계(放生淨界)-이곳부터는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 호법선신(護法善神)-불법을 수호하고 성불하게 돕는 착한 신 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장승으로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어 오랜 세월을 견디어 냈다.



선암사 숲길은 부처를 만나러 가는 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선암사 흙길을 반쯤 지나면 ‘홍예교’ 라는 작은 아치형 돌다리가 나타난다. 우리말로는 무지개다리다. 작은 홍예교는 조금 있으면 선암사의 절경이 시작된다고 앞장서 알려주는 일종의 전령이다.


작은 아치형 다리에 올라서면 이윽고 이보다 훨씬 장대한 또 하나의 무지개다리가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선암사만큼이나 유명한 승선교다. 승선교를 조금 더 깊이 강상하려면 다리 밑으로 내려가는 게 좋다. 다리는 수면을 기준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다. 돌에 비친 모습까지 포함하면 완벽한 원이다. 조금 물러나면 조형성과 균형미가 돋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돌의 숨결이 느껴진다.




청록파 시인 조치훈은 석굴암을 두고 돌에도 피가 돈다고 했다. 다리를 만든 사람은 자연과 지형을 꼼꼼히 살피고 연구했을 것이다. 풍경과 땅의 형태를 고려해서 다리의 규모와 모양을 결정했을 것이고, 마지막에는 돌 하나하나에 영혼을 걸었을 것이다. 돌덩이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생물에서 표정이 나오고 숨결이 느껴지겠는가? 다시 보아도 승천교는 숨을 쉬고 있는거 같다. 같으로는 그저 무생물의 돌다리이지만 승천교는 영혼과 세포를 품은 생물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승천교는 화강암으로 만든 아치형 석교다. 계곡의 폭이 넓어 아치 또한 유달리 큰 편이다. 아랫부분에서부토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이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물에 비쳐진 모습과 어우려져 완벽한 하나의 원을 이룬다. 승선교는 그 밑단부분이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급류에도 휩쓸릴 염려가 없다, 가운데부분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웅장하며, 자연미를 풍기고 있다. 이 다라는 조선 숙종 39년(1713)에 호암대사가 6년에 걸쳐 완공 했다고 전한다. 일부에서는 선암사를 지을 때 원통전과 함께 설치했다고도 한다.




승선교(昇仙橋),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의미가 깊은 이름이다. 글자 그대로 풀면 신선이 승천하는 다리다. 가진자의 여유인가? 산문을 한 참이나 지났으므로 이곳은 틀림없이 부처의 세상인데 다리 이름은 천연덕스럽게 도교 식으로 지어 놓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승선교 밑에서 시선을 저 앞으로 던지면 신선이 내려와 노는 누정이라는 뜻의 2층 누각인 강선루가 보인다. 


승천교가 신선이 승천하는 곳이라면 강선루는 신선이 내려와 머무는 집이다. 승선교에서 자연을 즐기다가 천상이 그리우면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인간 세상을 잊지 못해 구름을 타고 강선루로 내려오고, 승선교와 강선루는 하나의 묶음이다. 둘은 물리적 형태로 완전히 다르다. 승선교는 장대한 석조 건축물이고, 강선루는 담백하고 소박한 2층 목조 구조물이다. 그리고 둘은 100미터 안팎의 거리를 두고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둘은 하나이다. 하나이지만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부처의 땅이되 부처의 영역도 아니다. 이곳은 신선의 놀이터이다. 불교의 땅에 자리를 튼 도교의 세계이다. 선암사는 이렇듯 제 품 안에 철학이 다른 도교를 넉넉하게 품고 있다. 선암사는 공존의 미덕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승선교 주변은 이름에 걸맞게 신선이 노릴 만큼 풍경이 아름답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강선루까지 눈에 넣고 나면 자연과 인공의 공존이 절정을 이룬다. 자연이 창조한 숲과 계곡, 사람이 만든 석교와 누각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담백하지만 극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비우려고 떠나는 길’ 의 목적지가 승선교인 양 다리 밑에 머물며 한 참을 신선들의 놀이터를 카메라에 담았다. 






강선루를 지나고 다시 숲길을 지나면 ‘삼인당(三印塘)’ 이라고 하는 길고 타원형 모양의 연못이 있다. 삼인당은 길다란 둥근 타원형의 못 가운데 알 모양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와 너비가 2.2:1의 비율를 갖는 긴 계란형의 지당 내에 길이 11m, 너비 7m의 긴 계란형 섬이 있다. 이와 같은 특이한 양식의 지당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기 힘든 것이다. 알 모양의 섬은 자각자리(自覺自利), 긴 타원형의 못은 각타이타(覺他利他)를 의미한다. 선암사 사적에 의하면 삼인당은 신라 경문왕 2년(862)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며 삼인(三印)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이라는 삼법인을 말한다.


선암사에는 유난히 아담한 연못이 많다. 사찰 경내로 흐르는 두 줄기 물길을 그대로 이어받아 연못에 잠시 가두어 물살을 약화시키는 기능과 함께 시각적으로는 아늑함을, 청각적으로는 청량함을 동시에 연출한다. 가장 위쪽 차밭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달마전의 유명한 4단 다조(茶槽)에 걸러지고 이것이 삼성각 앞 방지(方池)와 설선당 옆 쌍지(雙池)를 거쳐 일주문 옆 지원(池苑)으로 흘러들고 여기서 작고 가는 폭포가 되어 낙숫물 소리를 일으키며 계곡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또 한 줄기는 일주문 아래 삼인당(三印塘)이라는 타원형의 연못에 잠겼다가 계류로 흘러든다.





삼인당 부터 절까지는 조금 거칠고 가파른 길이다. 따지고 보면 가파른 길도 아닌데 그동안 원만한 길을 걸어온 탓에 그렇게 느껴진다. 밋밋한 언덕을 다 오르면 돌담 너머로 푸른 차밭이 펼쳐진다. 보성이나 강진의 그것처럼 반듯하지 않고, 이랑이 시원스럽게 달려 나가는 맛도 없어서 이게 무슨 차밭인가 싶을 테지만, 그래도 스님들이 몸 수양을 하여 만든 것이다. 봄철에는 울력 나온 스님들이 찻잎 따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차밭 둘레로 개간 할 때 나온 막돌로 울타리를 처놓았는데 그 풍경이 제 멋대로 자란 차나무 만큼이나 자유방임적이다. 일부러 가꾸지 않은 돌담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유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선암사 야생차는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전통을 이어받아 800년의 역사가 있다. 선암사에 처음으로 차를 보급한 분은 도선국사로 선암사 일주문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선암사차의 역사는 통일신라 말로 선과함께 같이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인 대각국사는 칠구선원을 신축하고 현재 칠전선원차밭에 차를 심었고 여기서 수확한 차를 법제하여 송나라에 수출하였다고 전해진다. 대각국사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선암사 차에 관련된 기록이나 구전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극기의 시에서 정막하고 고요한 사찰로 기록하고 있어 선을 위주로 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참선과 함께 차를 즐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차배지에서 생산한 야생차는 화개 차를 최상품으로 치지만, 순 자연산 야생차는 선암사 차를 최고로 친다. 선암사 야생차의 특징을 '구수하고 깊은 맛’ 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차나무가 삼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음지에서 자라 찻잎이 연하고 운무와 습한 기후가 깊은 맛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선암사 차를 맛보기란 쉽지 않다. 선암사 차밭은 규모가 크지 않아 수확량도 적어 귀한 대접을 받는다.














선암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상하좌우로 확장되고 있다. 크게 보면 대웅전 영역을 비롯하여 원통전영역, 웅진당영역, 각황전영역 등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그 영역 사이의 구획이 사실은 에매모호하다. 나누고 구분하고 정리하는 게 서툴러서 혼란스럽게 보이기는 하지만 좋게 보면 그게 선암사의 특징이다.  독존 보다는 공존을, 단절보다는 소통을, 분리보다는 통합을 구현한 절집, 그게 선암사이다. 그리고 전각과 전각 사이에 화단이 있어 사계절 꽃이 피고, 대대적인 증축 없이 하자보수만 하여 남다른 격조와 고풍이 풍겨있다.


1500년이 지난 고찰이지만 선암사 건축이 주는 감동은 그리 크지 않다. 지은지 200년이 다 되었다는 대웅전은 겹처마에 팔각지붕이어서 웅장하기는 하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에 비하면 조형미와 우아함이 한참 뒤쳐진다. 대웅전 앞마당을 지키고 있는 두 개의 삼층석탑도 양식이 익숙해서 반갑기는 하지만 그다지 깊은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도 눈길을 끄는 절집이라면 해우소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선암사 해우소는 시인 정호승 시 <선암사> 때문에 유명세를 탓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라고 아름답게 표현한 시다.


선암사의 옛 해우소는 너무 개방적이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대충 구역만 나누어 놓았을 뿐 사실은 남여 화장실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칸막이가 어른 엉덩이 정도의 높이까지만 올라오고 나머지는 휑하게 뚫려 있어서 쭈구리고 앉아 있으면 옆 칸 사람의 머리카락이 보일락 말락 한다. 자연과 계절을 화장실 안까지 끌어들이고, 자연을(배설물을)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구조는 찬탄할만하다. 그러나 선암사 해우소는 해우의 은밀함을 즐기려는 인간의 심리까지는 아우리지 못하고 있다. 도무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숲길과 승선교와 야생 차밭이 선암사 밖의 매력이라면 사찰 경내의 빛나는 보물은 나무들이다. 나라 안의 이름난 절이 대개 숲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경내로 나무를 들인 절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무를 들인다 해도 잘 생긴 소나무나 느티나무, 배롱나무나 몇 그루의 정원수를 심은 게 고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선암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예외이다. 좀 심하다 싶을 만큼 나무가 부지기수다. 너무 많은 게 오히려 흠이 될 정도이다. 특히 대웅전 뒤쪽, 그러니까 원통전 영역과 삼성각 앞마당은 차라리 사원이라기보다는 고택의 정원과 같다.  자산홍, 벚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 매화나무, 석류나무, 은행나무, 사철나무, 영산홍, 측백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지 절집이 아니라면 수목원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나무들은 마당과 화단에 두서없이 서 있다. 언뜻 보면 질서가 없어 보이나 덜 정리된 모습이 오히려 정겹고 자연스럽다.


선암사는 공존과 어울림의 절집이다. 나무와 나무가 상생하고, 도교와 불교가 공존하고, 절집과 나무가 통섭한다. 선암사는 공존으로 시작해서 공존으로 끝을 맺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존의 아름다움을 웅변하는 절이 선암사인거 같다.


도움받은 책 : <남자의 여행> 유명종 디스커버리미디어, <선암사> 태고종 총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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