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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음악・공연・여행

천년 고찰 낙산사 (洛山寺)

by 파장 2015. 11. 2.


동해 자전거 여행 - 천년고찰 낙산사

2015년 10월 29일

동해 바다는 하늘과 바다가 수평선 너머 끝도 없이 이어져 어디가 끝인가 알 수가 없다. 강릉 주문진에서 출발한 자전거는 바람이 싸나워 자전거는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길의 목적지를 낙산사로 잡고 길옆에 동해바다를 두고 2시간쯤 쉼 없이 페달을 돌려 양양해변에 도착했다. 낙사사로 가는길, 낙산항 등대에서 끝없이 수평선이 이어진 동해 바다를 바라보니10월, 동해 바다에도 가을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천년 고찰 낙산사(洛山寺)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신라 화엄종의 종파를 만든 의상대사(625~702)가 관음보살을 직접 만나고 나서 동해의 명산인 오봉산에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에 창건한 사찰로, 낙산사라는 사찰명은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알려진 ‘보타낙가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사찰로 인정되어 2009년 사적 제 495호로 지정되었으며, 홍련암과 으상대 주변 해안 일대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같고 있어 2007년 명승 제27호 지정되었다.


낙산사는 창건이래 여러 차례 화재와 전쟁 등으로 파괴와 중건이 반복 되었는데, 858년(신라 헌안왕 2년)  범일국사의 중창 이후 몽골군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파괴된 것을 그때마다 재건했다. 특히 2005년 4월 5일 양양지방에 발생한 대형산불로 인해 보물 제479호 였던 낙산사 동종과 원통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2005년 부터 2006년 발굴조사를 통해 원통보전 일대에서 6차에 걸친 증.개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조선 정조시대를 복원시기로 잡았으며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 를 참고하여 복원불사가 진행되었다.


현재 낙산사 경내에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진신사리를 봉안한 해수관음공중사라탑비(보물 제1723호),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의상대(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홍련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등의 문화재를 비롯하여 동해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해수관세음보살상, 7관음과 1500관음을 모신 보타전, 의상 기념관 등 많은 성보문화재가 남아있다. 2005년 화재 이후 국민들과 부자들의 정성을 모아 천년고찰 낙산사를 중창했다.




의상대(義湘臺)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낙산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서 좌선(坐禪)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장자이다. 1925년 당시 주지 만옹스님이 건립하였고 만해스님이 의상대기를 지었다. 이후 수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2009년 9월 해체복원 하였다. 육각형의 정자로 익공(참조1) 양식의 공포(참조2)에 겹처마 모임지붕으로 상부에 화강암 절병통(참조3)을 올렸다. 주변의 해송(海松)과 암벽 그리고 동해바다가 어우러진 동해안의 대표적인 해안정자로 의상대에서 맞는 일출은 낙산사의 백미(白眉)다.


참조1. 익공(瀷工) : 공포의 구조형식인 주심포(住心包), 다포(多包), 익공(瀷工)계의 세 가지 형식 중 구조적으로 가장 간결하게 꾸며진 형식 이익공은 익공이 2개인 양식

참조2. 공포(供包)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참조3. 절병통(節甁桶) : 궁전, 사모 정자, 육모 정자, 팔모 장자 따위의 지붕마루 가운데에 세우는 기와로 된 항아리 모양의 양식



홍련암(紅璉庵)은 의상 대사가 동굴 속으로 들어간 파랑새를 따라가 석굴 앞 바위에서 기도하다 붉은 연꽃위의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세운 암자로, 홍련암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676년(신라 문무왕 18년) 이상 대사가 창건한 이후 수차례 중건을 거처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의 전각은 2002년에 중건된 것으로 관음굴이 있는 해안가 절벽 위에 세워진, 흔치 않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앞뒤의 지붕 형식이 다른 불전으로 전면은 팔작지붕, 배면은 맞배지붕 형식이다. 불전 내 바닥에 난 구멍의 유리를 통해 절벽 아래 관음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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