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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그림・전시

생존과 나태

by 파장 2012. 6. 30.


조지 벨로스<클럽 안의 두 선수> 1909 캔버스에 유채 115×160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삶은 사각의 링에 펼치는 치열한 전투 | 벨로스의 <클럽안의 두 선수>

자는 가족을 형성하는 순간부터 삶의 전쟁터에 그대로 내몰리게 된다. 삶의 달콤한 밀월에서 깨어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먼저 우선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과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면서부터 남자는 젊은 날의 풍요로움은 사라지고 남자라는 껍데기만을 부여잡고 삶을 추슬러야 한다. 남자가 권태와 나태에 빠지는 순간 가족은 추운 냉기 속에서 몸을 떨어야 한다. 남자의 삶 속에는 정작 남자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에게는 그저 이기기 위한 삶만이 요구되며, 하루하루는 성가신 날들의 연속이다.

사각의 링 위에서 펼펴지는 권투처럼 남자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도 없다. 남자는 새벽이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상대에 대해 배려할 시간이 없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상대를 제압하고 바닥에 눕혀야만 승리의 손을 치켜들 수 있다. 상대에게 터지고 깨지는 것은 자기 몫의  삶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권투에는 승리만이 존재하고 그것만 기억되는 것 처럼, 남자는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세상의 변방에서 홀로 외로이 긴 나날을 보내야 한다.

벨로스의 작품<클럽 안의 두 선수>에서 두 남자는 승리를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사각의 링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다. 관중들은 두 사람의 격렬한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링 안에서 싸우는 권투 선수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관중도 돈이 결려 있는 게임기에 절대로 눈을 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백인 남자와 흑인 남자다. 백인 권투 선수의 몸은 특별한 조명 없이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데 반해 흑인 남자의 몸은 그나마도 오둠 속에 가려져 있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가 이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흑인 권투 선수는 그때까지 패빼을 모르던 잭 존슨이라는 실제 인물이다. 벨로스의 작품에 소재를 제공한 이 경기에서도 흑인 잭 존슨이 승리한다.

이작품에서 흑인과 백인을 사각의 링에 세운 화면구성을 위해 벨로스는 실제로 경기가 열렸던 뉴욕의 클럽에 찾아가 직접 보고 구상했다. 실제 경기는 당시 흑백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고, 관중들은 일방적으로 백인 선수를 응원했다. 벨로스는 백인에 대한 관중들의 일방적인 지원 속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흑인의 고통의 어둠 속에 묻히게 함으로써 표현해냈다. 조지 벨로스(1882~1925)는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나는 두 사람이 죽을 것 같이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라고 밝혔다.

 

존 프레데릭 루이스<낮잠> 1876 캔버스에유채 88×111 런던 테이트 갤러리


삶의 권태 루이스<낮잠>

존을 위해 싸우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 편안하고 안정된 삶일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깊이를 잴 수 없는 고독을 가라앉히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막상 할 일도 없다. 누닐수 있는 것들을 싸우지 않고도 이미 다 가졌기 때문이다. 남들한테 보이는 자신의 거짓된 그림자가 싫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권태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안개에 싸인 것처럼 복잡하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만,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삶의 지루함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낮잠>은 권태로운 일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화면 왼쪽에 있는 소파에서 귀부인은 잠들어 있고, 화면 오른쪽에 있는 테이블에는 하얀 백합과 빨간 양귀비가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뽐내며 꽃병에 꽃혀 있다. 그림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창이며 직물, 소파 위에 놓인 부채 등은 방 안의 분위기를 상당히 동양적으로 만든다.

창에는 녹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지만 대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느껴지며, 여인의 머리 밑에 있는 창문은 조금 열려 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의 바람은 여인을 편안한 잠의 상태로 빠져들게 한다.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에 취해 여인은 깨어나지 못하고 달콤한 잠에 머물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하얀 백합은 순결을 상징하고, 붉은색 양귀비는 꽃말처럼 영원한 잠을 의미한다. 또한 양귀비는 마약으로서 일종으로 고달픈 삶을 잊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양귀비는 삶의 초라함을 꿈속의 찬란함으로 바꾸어주기 때문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루이스는 흰 백합을 함께 그려 넣었다. 이 작품에서 서구의 문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것은 백합이다. 백합은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꽃이다.  존 프레데릭 루이스(1805~1876)는 이 작품에서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위험한 순간을 양귀비로 표현했다.

 

 

명화 속의 삶과 욕망_박희숙 2007. 7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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